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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팔척협정(八尺協定): 중국역사상 최대의 매국조약

by 중은우시 2012. 3. 2.

글: <황화강> 제37기,38기합본

 

 

 

80년이 흘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중국역사상 최대의 매국조약은 만청이 체결한 것도 아니고, 북양정부가 체결한 것도 아니며, 민국정부가 체결한 것도 아니다. 1930년 중화소비에트정권의 전신인 중앙소비에트지구정권(中央蘇區政權)이 일본관동군 군부와 체결한 <팔척협정>이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비밀협정에서 중앙소구정권은 적나라하게 일본침략자들에게 총과 돈을 내주었고, 전력을 다하여 일본침략자들이 동북을 점령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하여 국민정부에 타격을 가하려는 목적을 달성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팔척협정>의 체결은 직접적으로 '9.18'사건과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침략을 불러왔다.

 

1928년말, 장학량이 동북에서 깃발을 바꿔들면서, 중화민국정부는 전국을 통일한다. 동북지구가 가입함에 따라, 중화민국은 사상유례없는 규모의 자원과 공업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황금10년의 발전은 처음부터 고속도로에 접어든 것이다. 1929년 4분기부터, 중화민국의 GDP와 1인당 GDP는 급속히 성장한다. 글로벌경제공황의 배경하에서 홀로 뛰어났다. 1930년초, 중화민국의 GDP는 경제위기에 빠진 일본의 두 배가 된다. 1인당 GDP는 일본의 40%에 달한다. 이 경제건설의 성취는 오늘날까지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백성은 부유하고 나라는 강했다. 중화님국은 전인민이 부유하고, 재정이 남아돌게 된 후, 국방, 군사력도 급속히 강화된다. 1930년초, 4척의 항공모함, 4척의 대형전열함이 해군상장 진소관(陳紹寬)의 주재하에 다롄, 칭다오 및 상하이의 군항에서 건조된다. 6년에 모두 완공할 예정이었다. 독일이 설계를 도와준 전투기도 심양에서 첫번재 원형기를 생산했다. 1930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렇게 평론한다: 전통강국 구미는 경제위기의 진흙탕에 빠져서 몸을 빼내지 못하고 있는데, 동방의 중국은 이미 조용히 굴기했고, 얼마후면 일본을 추월하여 동아시아의 거인 및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화민국의 주변국제형세도 유례없이 개선된다. 이것은 일본의 대중국정책 조정때문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후, 중국인민은 이전의 원한을 잊고 일본의 이재민들에게 돈을 기부한다. 그리하여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준다. 정계에서도 갑오년이래의 침화정책에 대하여 반성을 한다. 1929년 글로벌 경제공황에 일본도 빠지게 된다. GDP는 대폭 감소하고, 군비도 삭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중국침략정책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배경하에, 일본의 정치세력중 침화파는 세력을 잃고 친화파가 득세한다. 일본은 중국의 동북에서 남만철도를 따라 주둔한 군대를 전부 철수시키고, 타이완을 반환할 생각까지 한다. 그리고 청나라와 맺은 갑오전쟁의 대일배상금을 중화민국에 반환할 생각도 한다. 구체적인 방안을 국회에서 토론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금을 지원하고, 전문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이 교육과 공업을 일으키는데 도와주고자 했다. 1931년이전에 중일관계는 밀월기였다. 중화민국의 국제관계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중화민국의 국민은 양미토기(揚眉吐氣)하고, 공전의 행복을 누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보기를 원치 않는 것들이다. 1927년 장개석이 공산당소탕을 개시한 후, 중국공산당은 점차 기반을 잃어간다. 1930년이 되자, 뤼진(瑞金)을 중심으로 한 강서 서남부, 복건 서부일대에 할거지구를 보유했고, 중앙소비에트지구(中央蘇區)를 건립했다. 이후 건립되는 중화소비에트정권의 전신이다. 민국정부가 동북을 취득한 이래 취득한 거대한 성취는 중앙소비에트지구정권이 반기지 않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민국의 번영은 그 근원을 따져보면 그저 자본주의자의 번영이다. 이런 번영은 단지 글로벌 자본주의 체인의 일환을 강화시킬 뿐이다. 민국이 번영할수록, 프롤레타리아혁명은 희망이 없어진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인이 되는 날이 더욱 늦게 도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앙소비에트지구정권은 민국정부가 동북지방을 얻는 것을 극력 저지하려 했다. 1929년 소련으로 하여금 동북을 점령하도록 하려는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실패로 돌아간 후, 중앙소비에트지구정권은 동북을 분열시켜, 민국에 타격을 가하는 희망을 일본침략세력에 건다.

 

1930년초, 중앙소비에트구정권은 비밀리에 대표를 파견하여, 일본관동군 주둔지와 일본본토로 가서 활동한다. 군계, 정계의 호전분자들과 접촉한다. 수개월의 초보적인 활동을 거쳐, 중앙소비에트지구정권의 동북분열계획은 관동군 참무인 판원정사랑(板垣征四郞), 석원완이(石原莞爾)등의 침화음모와 뜻이 일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식합작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1931년 중국의 새해가 막 지나면서, 중화민국의 4억국민이 아직 평화롭고 즐거운 분위기에 빠져 있을 때, 재난성 전쟁의 그물이 어두운 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중앙소비에트지구의 대표단은 왕약비(王若飛)를 단장으로 하여, 상해에서 비밀리에 배에 오른다. 하룻밤낮의 항행을 거쳐 일본 관동군이 지배하는 뤼순(旅順)에 도착한다. 관동군 만철주식회사의 초대소인 대화여관에 투숙한다. 그달 29일, 중앙소비에트지구대표단은 관동군의 대표인 판원정사랑과 대화여관의 소형회의실인 팔척각(八尺閣)에서 비밀협정을 체결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팔척협정'이라고 부른다. 협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앙소비에트지구는 일본이 동북, 화북을 탈취하는 것을 지지하고, 그곳을 일본세력범위로 인정한다.

2. 중앙소비에트지구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원조받은 경비중 2억3천만금루불을 일본관동군 참모부에 넘겨주고, 일본관동군 참모부가 분배하고 군비로 쓴다. 그리고 일본국내 정치로비에 사용한다. 중앙소비에트지구는 감사팀을 보내어 선양과 도쿄에 주둔하며 경비의 합리적인 사용을 감독한다.

3. 관동군은 1931년 10월까지 동북에 대한 진공을 개시한다. 그리고 미래의 몇년내에 적극적으로 화북을 탈취한다. 중앙소비에트지구가 중화민국의 정권을 탈취하는데 협조한다.

4. 일본세력범위는 장강일선까지로 한다. 즉, 화북, 화중을 점령한 후, 중공정권과 강을 경계로 나누어 통치한다.

 

2억3천만금루불은 당시의 일본에게 거금이다. 이차대전이전에 달러본위제도가 아직 건립되지 않았다. 금본위시대에, 이 2억3천만금루불은 모두 금화와 은화의 형식이었다. 만일 중국공산당이 민국정부와 정성을 다하여 협력하여, 이 2억3천만은 민생건설에 사용하였다면 4억인민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거금은 원래 쇠약해진 일본침화세력에 혈액을 주사해준 꼴이 된다. 중국4억인민 내지 전체 동아시아 인민에게는 큰 불행이 된다. 2억3천만을 손에 쥔 후, 관동군의 판원정사랑, 석원완이등은 9.18사변을 일으킨다. 동북삼성이 함락되자, 민국정부의 공업, 자원기지가 적의 손에 들어가서, 큰 타격을 입는다. 황금10년은 이때부터 속도가 완화된다. 관동군 호전분자는 일본국내에서 로비활동을 벌여, 친화파를 배제하고, 침화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1932년, 일본호전세력은 도쿄의 근위 제1사단을 매수하고 5.15정변을 일으킨다. 친화파인 일본수상 견양의(犬養毅)는 피살당한다. 1936년 다시 2.26정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태도가 강경하지 않았던 내대신 제등실(齊藤實), 교육총감 도변정태랑(渡邊錠太郞)과 대장대신 고교시청(高橋是淸)등이 피살된다. 일본의 정치저울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침화의 잘못된 방향으로 기운다. 일본은 2억3천만의 대부분을 황금으로 녹여만든 후, 국내의 기업에 자금지원하여, 1929년 경제위기때 큰 피해를 입은 기업을 재건한다. 특히 군수공업을 재건한다. 대량의 무기장비를 제조하고, 대중국전쟁에 사용한다. 오늘날, 일본 이두군도(伊豆群島)에 있는 자본가가족인 우대궁(右代宮) 집안은 지금도 소화시애의 이 거액에서 분배박은 일부분 황금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죄악의 <팔척협정>의 증거이다.

 

[부기] 비록 <팔척협정>의 체결이 아주 비밀스러웠지만, 종이로 불을 쌀 수는 없는 일이다. 공산당 사람들 중 상당일부분은 이렇게 돈과 총을 침략자에게 내주고 자신을 치게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왕명(王明)은 모택동을 심하게 질책한다. 코민테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코민테른의 경비를 제3국에 지원하는 것은 중소합작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1935년 장정도중에, 장국도(張國濤)는 홍4방면군과 중앙소비에트지구에서 온 홍1방면군이 회합한 후, 1931년 중앙소비에트지구와 일본이 <팔척협정>을 체결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그 자리에서 모택동과 갈라설 것을 선언한다. 남하하여 별도의 당중앙을 건립하고, 북상하자는 건의에 대하여 조소를 지으며 말한다: "섬북에 가서 뭐하려고? 일본놈들의 앞잡이나 하라고? 항일이라고 말은 하면서 <팔척협정>은 누가 체결했느냐?" 중앙과 결렬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끝난 후 장국도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 1937년 일본의 전면침화가 개시된 후, 장국도는 통심질수하며 마침내 1938년 중화민국정부에 투항한다. 장개석을 만난 후에는 가슴아프게 말한다: "형제는 바깥에서 여러 해를 멍청하게 보냈습니다." 장개석은 그가 잘못을 깨달으면 고칠 줄 아는 용기를 칭찬하며, 장국도를 "공산당내에 몇 안되는 양심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글은 일반블로거가 쓴 글이 아니라, <황화강>잡지에 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중 소련이 2억3천만금루불이라는 거금을 지원할 능력이 있었는지, 모택동이 그런 자금을 혼자서 결정하고 지원할 상황이었는지 등등은 의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