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소강(夏小强)
2012년 12월 4일, 시진핑이 주재한 중앙정치국회의는 업무기풍을 개선하는 8개의 규정을 통과시킨다. 여기에는 "문장을 발표하는 것을 엄격히 한다.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안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은 저작물, 강연단행본을 공개출판하지 아니하고, 축하서신, 축전을 보내지 않으며, 문장을 써주거나 글을 써주지 않는다." 이 조치는 외부에서 보편적으로 후진타오 시진핑이 장쩌민 노인의 정치간여를 끝내기 위하여 취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12월 22일부터 24일까지 3일동안, 장쩌민은 연속 4번이나 글을 써주는 등으로 매체에 모습을 드러냈다.
12월 25일, 남경장강4교가 정식 개통된다. 장쩌민은 글을 써준다. 서하톨게이트진출입로 좌측의 돌맹이에는 장쩌민이 쓴 붉은색의 큰 글자로 "南京長江第四大橋江澤民"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장쩌민은 남경제4대교외에 장강2교 및 장강터널에도 글을 써주었다.
1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이 책제목을 써준 다큐멘터리화책 <황쥐(黃菊)>이 최근 상해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좌담회도 24일 상하이에서 거행되었다.
12월 22일, 장쩌민은 <녹죽신기>에 서문을 써주고 자신의 서예작품을 발표했다. 관영매체인 <인민망>, <신화망>, <중신망>등 대형뉴스웹사이트는 잘 보이는 위치에 이를 보도한다. CCCTV의 <신문연파>에서도 보도했다.
12월 22일, 장쩌민은 "애락지우신년음악회 공익만회>에도 출석하였고, 전 국무원부총리 리란칭을 그를 치켜세워주었다.
후진타오는 깨끗이 물러남으로써 중공의 노인정치간여의 잠규칙을 없앴다. 시진핑은 8개항의 규정으로 장쩌민의 정치간여를 막고자 했다. 이런 전제하에 장쩌민이 드러내놓고 나서는 것은 장쩌민이 아직도 정치에 간여할 큰 영향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첫째,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18대이전에 동맹을 맺는다. 공동으로 군대와 각급부서의 인사배치를 끝냈다. 비록 18대 정치국상임위원에 장쩌민파의 색채가 짙은 인물인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장까오리가 4석을 점하고 있어 표면적으로 볼 때는 장쩌민파가 우세를 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8대이후 1개월여의 중공고위층의 동태를 보면, 시진핑, 리커창 및 왕치산은 그들이 실질적인 실권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활동을 하고 있고, 나머지 4명은 그저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18대이후 중공의 새로운 세대교체과정에서 후진타오 시진핑이 배치는 점점 드러났고, 핵심부서와 지방장관등 실권부서는 공청단파 및 시진핑, 리커창의 인물이 점거했다. 이런 태세는 이전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18대 정치국상임위원의 결과는 대권을 장악한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질실한 목적이 장쩌민계를 서서히 소멸시키는 것이다, 18대는 외부세계에 장쩌민계가 아직은 망하지 않았다는 겉모습을 보여주어 장쩌민파 진영이 저우용캉의 주도하에 벌인 <뉴욕타임즈>사건처럼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위협행동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막아서 중국공산당이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둘째, 18대후, 장쩌민의 진정한 실력을 대표하던 정법위와 중앙선전부의 격이 강등되고 정치국 상임위원에서 빠진다. 중공의 여론은 보시라이가 중형을 받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시진핑이 등장한 후 반부패를 소리높여 외치고, 저우용캉의 심복인 리춘청(李春城)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장쩌민파는 정치국상임위원의 4석을 차지한 휘황함을 보이지만 장쩌민파에 대한 전면적인 청산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태의 발전에 따라, 전화는 장쩌민파의 최후방어선인 쩡칭홍, 장쩌민에게 미칠 것이다. 중공의 실제상황으로 보면, 단순히 권력과 실력으로 보았을 때, 장쩌민파는 이미 실질적인 큰 행동을 할만한 충분한 역량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장쩌민이 중공매체에 요란하게 등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시진핑의 묵인과 타협을 얻은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장쩌민이 몇 번은 더 시끄럽게 굴겠지만, 기실 장쩌민과 장쩌민파의 소수잔여세력의 최후단계에서의 살아남기 위한 보신책과 대항일 뿐이다. 이런 행위는 장쩌민의 허영심과 체면을 만족시키고, 아직도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허상을 보여주는 외에 그다지 큰 실질적인 의의는 없다. 만일 작용을 말하자면 그것은 시진핑에 도전하고 압력을 가하겠다는 신호이고, 시진핑을 난처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시진핑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위신을 수립하고, 약간의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정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쩌민의 잔여세력의 정국교란에 대응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되기 힘든 모순이며, 현재의 고위층이 유지하고자 하는 균형을 타파하게 될 것이다. 장쩌민이 다시 한번 요란하게 등장하면서 시진핑의 8조항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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