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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자동차

비야디의 교훈

by 중은우시 2012. 9. 20.

글: 중국경제와정보화 

 

2012년 3월의 어느 날, 여러날동안 사장의 얼굴을 보지 못한 비야디자동차 품질부총경리 자오젠핑은 왕촨푸(王傳福) 사장의 차량이 비야디 쑤뤼(速銳)로 바뀐 것을 발견한다. 이 모델은 8월 21일에 비로소 전세계에 출시하는 차량모델이었다. 비야디 내부에서는 회심의 역작으로 보고 있다. 그 첫번째 차주는 바로 사장 본인이었다.

 

세상 일은 예측하기 어렵다. 중국에서 가장 돈을 잘버는 민영기업가가 경기장에서 경기를 지휘하는 외에, 친히 응원단의 단장역할까지 해야 한다. 자신의 신제품을 광고하고 응원해야 한다.

 

과거 3년동안, 그가 이끄는 이 회사는 많은 진동이 있었고, 이윤은 90%이상 줄어들었다. 일찌기 비야디를 신단(神壇)에 올려놓았던 전통자동차사업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IT OEM분야도 글로벌 산업배치가 급속히 재조정되면서 하락하고 있다. 널리 선행을 베풀듯이 전국각지의 크고 작은 공업단지에 흩어져 투자한 수백억위안의 투자는 거의 원금을 회수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2010년, 비야디자동차의 판매량은 연속5년 유지하던 100% 성장의 기세가 돌연 꺽인다. 바로 이 해 8월 3일, 왕촨푸는 회사의 그해 자동차판매목표를 25% 하향조정한다. 80만대에서 60만대로. 그랬지만 비야디는 결국 판매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전년동기대비 15.5%의 성장에 그친다. 업계의 평균성장률의 절반에도 못미친 것이다. 2010년, 비야디의 순이익은 전년동기대비 33.48% 하락한다. 그중 자동차사업의 이윤은 2009년의 35억위안에서 2010년에는 17.4억위안으로 하락한다. 하락폭이 50%에 가까웠다. 최근 들어 비야디가 발표한 2012년 상반기 재무제표를 보면, 순이익은 전년동기대비 94.09%가 하락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결손에 따라, 비야디의 경영진의 신념도 동요하기 시작한다. 2011년 8월 6일, 비야디자동차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한 부총재 샤즈빙(夏治氷)이 모든 직무를 사임하고 왕촨푸를 떠난다; 얼마전인 7월에는 비야디의 경영진과 주주가 10일내에 연속 5번이나 회사지분을 팔아지워서 4.22억위안을 현금화한다.

 

이 모든 것은 비야디의 역사상 보기 드문 일들이다. 왕촨푸는 처음으로 실수를 인정했다. 비야디는 현재 변혁중이며 현재 대수술을 겪고 있다.

 

2010년, 왕촨푸는 다시한번 워렌 버핏에게 생산기지를 참관하고, M6 신차발표회에 출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이를 '쇼'라고 보았다. 그는 인기를 많이 얻었지만, 이때 비야디의 숨은 병증상이 점점 폭발하기 시작한다.

 

2010년 비야디자동차는 15.5%의 판매량증가율을 보여 왕촨푸는 방망이로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비야디가 대리점에 대한 장악력을 이미 상실했다는 것이다. 2010년, 비야디의 대리점들은 재고압력, 자금회전문제, 이윤하락 심지어 결손등 문제로 비야디의 대리점을 그만두겠다는 곳이 308개에 달하였고, 전체 판매대리점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2.63%에 이른다.

 

두 주후인 2011년 8월 23일, 비야디는 2011년 반기보고서를 발표한다. 상반기에 비야디는 순이익 2.75억위안을 실현하여 전년동기대비 88.63% 하락한다. 그중 자동차사업은 비야디가 완성차판매 22만대를 실현하여 전년동기대비 23%가 하락했다. 자동차사업은 판매수익 102.8억위안을 실현하여 전년동기대비 25%가 하락한다.

 

골치거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네티즌 '야루장'은 미니블로그에서 감원을 폭로한다. 비야디자동차의 모든 영업무는 즉시 해산하고, 9월 30일까지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감원이 60%에 달한다.

 

여론압력에 왕촨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2011년 9월부터, 비야디의 매체와의 소통을 책임지는 직원은 자주 경영진에 고충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비야디대패국(大敗局)>, <비야디교훈>등 부정적인 보도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왕촨푸는 심지어 처음으로 회사내에 공관총감(公關總監)이라는 직을 설치하기까지 한다.

 

마지막으로 왕촨푸를 머리아프게 한 2011년에 비야디가 판매한 자동차는 43.7만대로 전년대비 13.33% 하락했다. 총이윤은 전년대비 2.06% 하락했고, 순이익은 전년대비 45.13%하락했다.

 

금년, 왕촨푸가 자랑으로 여기던 비야디 전기자동차는 그의 초조해진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5월 26일 아침 4시경, 왕촨푸는 자오젠핑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선전택시시장에 내놓은 비야디순전기자동차 E6가 추돌사고를 당한 후 불이 붙어 사람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선전시가 8월초에 사고조사결과에서 '배터리가 폭발한 흔적이 없다"고 발표하였지만, 이 모든 것은 이 민영자동차대왕으로 하여금 품질이 자동차기업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인터뷰과정에서, 왕촨푸는 과거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했다. "연속 5년간 배로 성장할 대, 6년째 10%만 늘어나고, 7년째 5%만 늘어날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국내시장의 수요는 여전히 존재했고, 우리는 여전히 성장공간이 있었다. 국내는 아직도 20% 심지어 40%가 성장했다. 이는 우리가 당시에 시장에 대하여 한 판단이었다. 여기에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 배로 늘지는 않더라도 60%는 는다고 보았다."

 

이미 문제를 인식하고 있던 왕촨푸는 비야디를 발전의 정확한 궤도로 끌어오고자 했다. 그러나 가슴아픈 일은 자신이 비야디의 실적퇴조세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야디는 소규모공장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었다. 그 동안 많은 경쟁상대방을 무너뜨렸다. 이는 많은 정도에서 왕촨푸가 제창한 수직통합모델의 덕을 보았다. 그는 수직통합모델의 경험과 매커니즘이 자동차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깊이 믿었다. 그는 또한 비야디는 세계에서 선진적인 배터리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일단 배터리와 자동차기술이 연동하면 비야디가 앞으로 나설 수 있다고 믿었다.

 

이상은 풍만했으나 현실은 수척했다. 왕촨푸는 일찌기 그의 대리상들에게 보증한 바 있다. 비야디가 생산한 자동차는 반드시 그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계속 잘팔리게 해주겠다고. 그러나 첫번째 싸움에서 지고 만다.

 

2003년말, 비야디가 첫번째 모델인 316을 내놓는다. 그러나, 비야디자동차 판매상들은 이 차량을 보고 절반이 떠나버린다. 지금까지 파죽지세였던 비야디는 실패의 그늘에 휩싸인다. 비야디자동차 산업군의 수석엔지니어인 롄위보(廉玉波)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한다. 사람들이 이 모델의 차를 보았을 때 모두 눈을 의심했다. 모양이 보기 좋지 않았고, 원가도 싸지 않았으며, 기능도 엉망이었다. 차량은 전체적으로 가격대비 성능에 문제가 있었다. 왕촨푸는 하룻밤만에 이미 2억위안을 들인 프로젝트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그가 보기에, 제품에 특색이 없으면, 높은 가격대비성능이 없으면, 시장에 진입한 후에 잘 팔리지 않아서 그 때 포기하면 손실이 더욱 클 것이기 때문이다.

 

9년후인 오늘 날, 사람들은 비야디 F3의 휘황을 알고 있지, 비야디에게 316의 진통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316이 실패한 후, 왕촨푸는 자신이 자동차연구개발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그 이후 나온 첫번째 모델이 바로 F3이다. 나중에 이 모델은 중국에서 가장 잘팔리는 승용차가 되고, 폴크스바겐의 제다와 토요타의 카롤라등 명품자동차들을 추월하게 된다.

 

타이어와 유리를 제외하고, 비야디자동차는 뭐든지 자체생산이었다. 이는 비야디자동차에 대한 당시의 진실한 모습이다. 왕촨푸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는 자체제작과 이류공급상과 합작하여 자동차를 만들었다. 비야디에서 만명이 넘는 엔지니어, 10여만명의 일반 노동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품, 몰드, 설비, 공장을 설계하고 제조했다. 비야디선전생산기지는 260개의 축구장이 들어갈만큼 크다. 이 생산기지에 비야디의 자도아는 50여개의 생산라인이 있다. 이들 생산라인 가운데, 2000여개의 설비는 비야디 자신이 연구개발한 것이다. 이런 자체제작율이 높은 것은 비야디에게 원가에서의 우세를 보유하게 해주고, 비야디자동차의 산업수직통합을 촉진시켰다.

 

저원가확장시기에 왕촨푸의 이런 전체산업체인배치는 연구개발, 생산등 단계에서 쉽게 시너지효과를 나게 해주었다. 비용통제도 더욱 장점이 있었다. 2002년을 전후하여, 중국자동차시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증가속도가 60%를 넘었다. 그리고 중국자동차산업발전의 황금10년을 형성한다. 왕촨푸가 이끄는 비야디는 연속5년간 배로 늘어나는 성장을 보이며, 자동차기업중 스타기업으로 등극한다. 2008년 9월, 주식투자의 신이라 불리우는 워렌 버핏이 2.3억달러로 비야디의 10%지분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왕촨푸와 그의 비야디를 다시 한번 전세계가 주목하게 만든다. 2009년, 45세의 왕촨푸는 350억위안으로 후룬방에서 중국대륙의 최고부자에 등극한다. 외부에서는 그에게 '자동차광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이 때가 비야디에게는 최고전성기였다. 왕촨푸의 개인부도 최고조에 달한다. 비야디는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거대한 성공에 취해 있었다. 왕촨푸는 상상했다. 비야디는 자동차분야에서 IT부품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골치거리는 생각지도 않게 나타난다. 왕촨푸와 그의 비야디는 전례없이 피동적인 국면에 처하게 되고, 한번 벌어지자 수습불능이 되어 버린다.

 

8월 21일 쑤뤼가 출시되기 전에, 쑤뤼의 첫번째 차주로서 왕촨푸는 반년의 시간을 들여서 시험운행을 하고 100여건의 건의를 내놓는다. 엔진의 성능에서 완성차의 틈에 대한 요구까지, 다시 내부인테리어의 정교화정도, 심지어 '완성차의 천정을 마무리한 후 털이 노출되지는 않는지'까지. 모두가 그의 관심대상이었다. 그는 스스로 쑤뤼의 체험보고서도 쓴다. 그러나 문제점을 지적하기만 했지, 성취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순전히 꼬투리를 잡고, 문제를 찾는 품질감독보고서였다.

 

왕촨푸는 쑤뤼에게 조금의 하자도 없기를 바랬다. 그는 모든 문제. 불유쾌한 체험을 출시전에 모두 시정하려 했다. "일단 문제가 발견되면, 그는 즉시 부하에게 전화를 건다. 시간이 몇 시이건 불문하고. 그는 자주 밤 11시 12시에 퇴근하며, 차를 몰고 집으로 가므로, 이때 우리가 전화를 받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자오젠핑의 말이다.

 

수술은 소리없이 진행되었다. 그는 최초로 문제를 드러낸 판매네트워크부터 정돈하고, 사업부를 조정하고, '사업부회사화'로 자체손익부담을 집행한다. 그후 전통적 자동차사업으로 돌아가서, 전통자동차의 연구개발과 투입등을 새로 살펴본다. 근원을 찾아갔다. 왕촨푸는 문제의 본질을 품질로 보았다. 회의때 마지막에 끝나기전 2분간 품질문제를 얘기하던 습관을 고쳐서, 회의시작하자마자 품질부터 얘기하고 친히 감독하고 이끌었다.

 

비야디는 역으로 진행한다. 대규모로 채널상의 수량을 삭감한다. 1000여개의 판매상이 830개로 줄어든다. 이렇게 하여 대리상의 영리능력을 제고하려 했다.동시에 인재를 최적화한다. 회사사업부를 조정하여 원래의4개 네트워크를 3개 네트워크로 고친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기술을 알고 경영을 아는 인재를 육성한다. 비야디의 브랜드이미지를 되살리기 위하여, 왕촨푸는 파천황적으로 매체와의 접촉을 증가시킨다. "모두 진정한 비야디가 어떤지를 알게 하자"

 

요 이 년동안, 왕촨푸는 제품품질을 제고시키는 것을 변혁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소음을 개선하고, 비가 내리면 깨끗이 닦이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품질제고를 중시한다. "초기에 제품의 이해에 문제가 있었다. 윈도우브러시의 경우, 우리는 일부 국내에서 윈도우브러시를 하는 작은 회사도 서비스가 괜찮고, 제품품질도 괜찮다고 여겼다. 실제로는 깨끗하게 비가 닦이지 않았다. 보쉬의 윈도우브러시를 사도 별로 돈이 들지 않았었다."왕촨푸의 말이다.

 

왕촨푸는 일본의 대형몰드생산기업인 일본오기하라회사의 산하에 있는 오기하라몰드공장을 전부 인수했다. 동시에 주류공장에서 부품을 구입한다. 예를 들어, 벤츠에 공급하는 PBG로부터 페인트를 구입하는 등이다. 이를 통하여 비야디의 품질을 제고시켰다.

 

2012년 4월 10일, 왕촨푸는 베이징에서 "자동차기술품질발표회"를 통해 과거 비야디는 계속하여 고속성장을 해왔고, 성장과정에서 일부 실수가 있었다. 2011년 시장조정기를 빌어, 비야디는 품질을 중시하여 계속 개선하고 최적화했다. "비야디는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라도 자동차품질을 좋게 할 것이다." 7월, 비야디는 다시 대외에 IQS10품질표준을 발표한다. 모든 개별차량이 2년내에 평균 1개의 고장이하로 하여 합자브랜드와 동등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자오젠핑은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트집잡기대회'라고 놀림을 당했다. 지정한 시간내에 개정한 품질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이는 너의 직위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각하면 직접 '사직'시킨다. "최근 몇년, 많은 사업부의 책임자는 시간내에 품질표준에 맞는 품질을 완성하지 못하여, 사직당했다."

 

3년전, 왕촨푸는 자동차품질에 이렇게 힘을 쏟게 될 줄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지금 그는 이미 '자동차는 만들기만 하면 팔린다"는 생각을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반드시 더 많은 전략조정을 해야 한다. 외부에서 비야디가 더 이상 품질은 떨어지고 가격은 비싸다는 대명사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그의 차는 다른 회사것보다 나쁘지 않다고 인식되어야 한다.

 

"과거 우리는 편면적으로 수량과 규모의 확장을 추구했고, 브랜드품질의 제고는 무시했다. 우리는 3가지 방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판매네트워크, 매체관계 및 품질문제." 그는 말한다. 비야디의 판매량이 계속 증가하여 우리는 맹목적, 낙관적으로 현실상황을 평가했다. "매년 배씩 늘어나는 판매증가에 우리는 큰 생산압력을 느꼈고, 모두 팔리지 않게 되어서야 품질문제를 생각했다. 매일 제품이 다 팔릴 때 품질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그다지 중시될 수가 없다. 품질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팔려나갈 것이냐고 생각했다. 어쨌든 물건을 만들어서 공급하는데 바빴으므로 품질문제는 경시하였다."

 

왕촨푸는 고객체험을 비야디품질변혁의 척도로 삼으려 한다. 그가 보기에, 잡스는 무슨 위대한 발명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고객체험을 첫째로 놓고 아주 잘 한 것일 뿐이다. 그는 비야디자동차가 고객으로부터 애플과 같은 체험을 얻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하여, 비야디는 리모트콘트롤기술, 클라우드열쇠, 꼬리발광표시 등 전자화자동차기능을 연구개발한다. 그중 꼬리발광표시는 2011년 총재상을 받고 상금이 30만위안이었다.

 

비야디는 조정기로 부르는 3년의 기간동안 비야디의 모든 신규차량모델이 시험을 거쳐 나온 후, 왕촨푸가 첫번째 차주가 되었다. 자동차업계에서, 토요타 자동차의 토요타 아키오만이 모든 토요타 차량에 그이 성씨가 있으므로 자신이 신차의 첫번째 고객이 되기를 고집하고 있다.

 

"5.26"사건이후, 비야디 전기자동차의 안전성은 의심을 많이 받는다. 그는 굳게 말한다. 자신의 제품을 의심해본 적은 없다. "그저 운이 아주 나빴을 뿐이다." 그는 또한 세계가 깜짝 놀랄 목표를 제시한다. 비야디는 2015년에 중국제일의 자동차생산기업이 되고, 2025년에 세계제일이 되겠다고.

 

왕촨푸가 확정한 비야디의 조정기가 곧 끝난다. 그는 비야디의 제품수준이 이미 합자자동차브랜드에 도달했거나 추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가슴을 치며 미래에 대한 동경을 얘기할 때, 중국자동차공업협회는 상반기 자주브랜드차량판매량을 발표한다. 그의 회사는 처음으로 중국자동차시장의 10대기업에서 밀려났고, 판매량도 전년동기대비 9.3% 감소했다.

 

그의 세계는 그래도 괜찮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