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섭지추(葉之秋)
수경선생 사마휘가 남긴 명언이 영향을 크게 미친다: "와룡, 봉추, 한 명만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臥龍,鳳雛,得一可安天下). 그러나, 인덕의 군주인 유현덕은 제갈량과 방통 두 현인을 얻었는데, 여전히 통일천하의 대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래서 후인들은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은 제갈량이 질투심으로 방통을 일부러 탄압했다고 한다. 그래서 1+1<2 심지어 1+1<1이 되어 촉한은 힘을 쓰지 못하고 겨우 사천에 웅크리고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제갈량과 방통의 관계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관건은 방통이 너무 일찍 죽었다고 한다. 만일 방통이 몇년을 더 살았더라면, 유비의 결말은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방통의 죽음이 촉한집단에 만회할 수 없는 중대한 손실을 끼쳤다고 본다. 가장 실제적인 구상은 바로 방통이 유비를 보좌하여 익주를 평정하고, 제갈량이 형주에 주둔하며 관우가 보좌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였더라면 형주를 잃지 않았을 것이고, 관우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더구나 유비의 이릉지전의 참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문제를 토론할 때, 가급적 역사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 즉, 정사와 연의(소설)에 나오는 방통의 서로 다른 모습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와룡, 봉추, 한명만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연의버전이다. 정사에는 이런 평가가 없다. 나관중은 연의에서 방통을 이렇게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유비가 인덕의 군주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연의에서 방통의 최대공로는 적벽지전때, 조조에게 연환계를 제기하여, 적벽의 화공이 대성공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사에는 적벽지전때 방통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연히, 진정 방통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면 정사에 기반을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정사와 연의에서 방통의 지위가 서로 다르다.
연의에서는 제갈량도 좋고, 방통도 좋고 모두 장량(張良)급의 일류모사이다. 그러나, 정사에서 제갈량에 대하여는 "다스리는 법을 아는 우수한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관, 소에 버금간다." 진수가 보기에 제갈량은 관중과 소하와 같은 일류재상의 재목이다. 존왕양이의 관중이나 흥한4백년의 소하와 비교하면 약간 못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방통에 대하여는 "아호인류(雅好人流), 경학사모(經學思謀). 당시 형,초의 고준(高俊)이다" "위나라의 비유하자면, 방통은 순욱이 베견할 수 있다." 진수가 보기에, 방통은 재주와 학문이 있고, 계책을 잘 낸다. 만일 위나라의 신하들 중에 비유하자면, 방통은 순욱이다(법정은 정욱, 곽가이다). 순욱은 조조에 대한 공로가 아주 크다. 위나라를 흥하게 한 제1공신이다. 촉한은 지역이 협소하여 겨우 1개주의 땅(촉한이 건립된 후 얼마지나지 않아 형주를 잃는다)만 가졌다. 그리고 익주를 탈취하는데 제일공신은 바로 방통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방통은 확실히 위나라의 순욱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진수가 보기에, 방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사는 아니었다. 촉한은 인재가 결핍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법정이 유비의 군사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계책을 내놓는 것은 그가 했다. 정욱, 곽가와 같다.
정사에서 사마휘는 방통에 대하여 "남주사지관면(南州士之冠冕)"이라고 한다. 형주의 여러 인재들 중에서 사마휘는 방통을 가장 높게 본 것이다. 그를 최우수인재로 보았다. 제갈량의 전기에서 <양양기>의 기록을 보면, 유비가 사마휘를 방문했을 때, 천하대사를 묻는다. 사마휘는 자신은 일개 유생이어서 그런 것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이고, 여기에는 복룡, 봉추가 있다"고 한다. 사마휘는 자신을 낮추고 제갈량, 방통을 높여준 것이다.
그러나, 사마휘의 평가는 과장되었다. 사마휘는 원래 다 좋게 말하는 사람이다. 인물평가에서 항상 좋은 점을 얘기했다. 게다가 사마휘는 제갈량, 방통과 망년지교이다. 관계가 막역했다. 방덕공은 형주의 명사인데, 일찌기 사마휘를 수경선생이라고 칭찬한다. 사마휘와 방덕공은 여러해동안 사귄 지기이다. 방덕공의 집을 자기집처럼 드나들었다. 방덕공의 사위가 제갈량이고, 조카가 방통이다
당연히, 정사에서의 사마휘의 평가는 비교적 믿을만하다. 그저 제갈량과 방통을 시무를 아는 준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 방통을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킨다고 큰소리치진 않았다.
둘째, 방통 일생의 주요한 계책은 유비를 위하여 익주를 취하는 상,중,하의 삼책을 제시한 것이다.
익주의 유장은 한중 장로의 침입을 받았다. 그래서 형주의 유비에게 익주로 들어와서 장로를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유장과 유비는 부릉에서 회맹을 한다. 방통은 유비에게 부릉대회때 연회에서 유장을 죽이라고 건의한다. 그러나 유비는 거절한다. "처음에 다른 나라에 들어가서 은혜와 신의를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방통의 이 계책은 보기에는 아주 좋아보인다. "장군은 병력을 쓰지 않고 주 하나를 차지할 수있다" 유비는 병력을 동원할 필요없이 유장을 제거하고 익주를 얻을 수 있을 것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유장부자는 익주를 십여년이나 통치했다. 비록 유장이 무능력하고 약하지만, 인덕으로 백성을 대하여, 백성과 관료들의 마음을 얻었다. 유비가 성도로 대거진격할 때, 무수한 백성과 관리들이 유장을 따르고자 하였고, 유장을 위하여 죽는다. 이처럼 인심을 얻는 것이 우선이다. 연회때, 유장을 죽여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익주 사람들이 반발과 집단적 반항을 불러올 것이다. 익주관리들은 아마도 유장의 아들을 옹립하여, 유비와 끝까지 싸우려 할 것이다. 유비가 이번에 온 것은 1만의 인마만을 데리고 왔다. 강한 용도 지방 뱀을 이길 수 없다. 단기간내에 익주본토세력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방통의 계책은 너무 단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방통의 계책에도 좋은 점은 있다. 나중에, 유장이 성도로 돌아가고 유비는 전진하여 장로를 평정한다. 쌍방은 잠시 평화를 유지한다. 방통은 유비에게 삼책을 제시한다. 상책은 암중으로 정예병사를 선택하여 밤낮으로 행군하여 성도로 진공하는 것이고, 중책은 유장의 수하들 중 가장 중요한 장수는 양회, 고패인데, 수하의 병마가 아주 많다. 그리고 유비를 계속 경계했다. 여러번 유장에게 건의를 올려 유비를 쫓아내라고 하였다. 방통은 유비가 핑계를 찾아 형주에 급한 일이 있어 회군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이를 기화로 인사하겠다고 하면서, 그 기회에 2명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책은 백제성으로 돌아가서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결국, 유비는 방통의 중책을 선택한다.
유비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다.
방통의 상책은 이전의 부릉암살계책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는 유비집단이 치르는 댓가가 가장 적을 것같지만, 후환이 아주 크다. 하책은 스스로 지키는 것일 뿐이다. 유비는 천하를 갖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책은 자연히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중책만이 힘도 가장 적게 들이고, 익주의 관민들이 형주집단의 용맹함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유장을 죽이는 것보다는 유장이 투항하도록 핍박하는 것이 좋다. 유장이 스스로 투항해야만, 익주본토의 세력이 안심하고 복종할 것이다. 유비는 비로소 유장을 대신하여 익주에서 통치할 수 있다.
셋째, 방통은 권모술수에 능통했다. 유비의 내심을 잘 알았다. 그리고 유비에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양회,고패를 죽인 후, 유비는 순조롭게 부릉을 점령한다. 부릉은 익주의 중요도시이다. 그리고 형주로 가는 관문이다. 부릉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형주의 원병이 지속적으로 익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익주를 취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되었다. 유비는 아주 기뻤다. 부릉에서 연회를 열어 손님들을 접대한다. 당시, 일부 유장의 신하로 투항한 사람들이 연회에 있었다. 유비는 술을 마신 후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것을 잊었다. "오늘의 모음은 즐겁다." 방통은 그 말을 듣고는 좋지 않다고 느낀다. 일관되게 인덕을 표방해온 유비가, 어찌 다른 사람의 나라를 점령한 후 자신이 기쁘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방통이 말한다: "다른 사람의 나라를 정벌하고 기뻐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병사가 아니다." 유비는 당시에 이미 대취해 있었다. 방통의 말에서 그에게 그만하라는 뜻을 읽지 못한다.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말한다: 옛날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크게 기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설마 주무왕도 인덕의 군주가 아니란 말인가? 유비는 자신을 주무왕에 비유했다. 유장은 잔혹한 상나라 주왕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유장의 옛신하들은 마음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을 것인가? 유장진영의 장병들이 일단 이 말을 전해듣고 나자, 모두 원한을 품고 유비에 반대하게 된다. 유비는 말한다. "경의 말은 부당하다 일어나서 나가라." 제일공신 방통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버린 것이다. 얼마후, 유비는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여 방통을 다시 불러온다. 유비는 그래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방통에게 묻는다: "금방 있었던 일은 누구의 잘못인가?" 방통이 대답한다: "군신이 모두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크게 웃으며 계속 술을 마신다.
얼마후, 유비군대가 낙성으로 진격한다. 낙성은 익주의 가장 중요한 요새이다. 낙성이 함락되면 직접 성도를 포위할 수 있다. 유장의 부하는 죽어라 저항한다. 유비군대는 낙성을 1년여 포위공격한다. 시간을 너무 끌지 않기 위하여, 방통이 친히 나서서 지휘한다. 아쉽게도 진격할 때 화살에 맞아서 얼마후 죽는다. 나이 겨우 36세였다.
그러나, 방통은 죽었지만, 이미 유비를 위하여 익주를 탈취할 기반은 마련해주었다. 얼마후 낙성을 함락시킨다. 유장은 곧 투항하고 익주는 평정된다. 그러므로, 공신의 공로를 평가하자면, 방통, 법정을 익주탈취의 제일공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이 사천으로 들어온 것은 확실히 방통이 죽은 이후이다. 다만, 정사를 보면 연의에서처럼, 방통의 죽음으로 익주를 점령하기 어려워서,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러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익주의 대세는 이미 정해졌고, 제갈량은 익주로 와서 정사를 관리해야 했다. 제갈량이 가장 잘하는 것은 계획을 세우고 계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안정시키고 다스리는 것이다.
즉, 방통의 죽음은 유비에 있어서, 확실히 중대한 손실이다. 그래서 유비는 통곡을 한다. 다만, 방통은 이미 유비를 도와 익주를 탈취했따. 당시에 이미 제갈량의 융중책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때 방통이 죽었어도, 유비의 미래 계획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후, 법정은 유비를 도와 한중을 탈취한다. 한중전투에서 조위의 대장 하후연을 참살하고, 수십만의 조조군을 격패시킨다. 당시의 촉한은 비록 익주, 형주의 두 주만 보유하고 있지만, 지세가 험준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삼국정립에서 은연중에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비록 나중에 관우가 패배하고, 형주를 동오에 빼앗기지만, 유비가 동오와의 전쟁을 일으켜, 형주의 땅은 금방 유비가 회수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방통의 죽음도 좋고, 관우의 패망도 좋고, 기실 모두 근본적으로 유비집단의 역량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당시, 유비는 동오를 멸망시키고 강남을 통일할만한 기회와 실력이 있었다. 그저 유비가 지나치게 자신하여, 육손을 경시하여 결국 이릉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촉한은 철처히 형주땅을 잃어버린다. 형주를 잃게 되자, 촉한은 반드시 기산으로 나가야 했따. 적이 진공하기는 어렵지만, 출병하는데도 거리가 멀다. 제갈량은 여러번 북벌하지만, 모두 양식이 부족하여 퇴각한다. 형주를 잃은 것과 관계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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