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위(魏)나라에 저항한 주력은 오(吳)나라이지 촉(蜀)나라가 아니다.

중은우시 2013. 4. 13. 20:59

작자: 미상 

 

비록 아래의 수치는 불확실한 곳이나 이견이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최종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1. 도대체 누가 항위(抗魏)의 주력인가?

 

삼국시대, 위나라는 강하고, 오, 촉은 모두 약했다. 그래서 삼국정립의 전제는 오촉이 연합하여 위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촉의 양국중 누구의 공헌이 더욱 큰가. 이하의 사실을 가지고 말해보자:

 

오촉(비록 당시 유비는 아직 서천을 얻지 못했지만)연맹은 208년 적벽대전이전에 형성되었다. 우리는 그 해부더 얘기해보기로 한다.

 

208년: 당시의 유비는 아주 참담했다. 노숙의 말을 빌리면, "전투에서 패배하여 멀리서 왔고, 아무런 자본도 없었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아직도 1만의 인마가 있다고 말했는데, 모두 허풍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취사원등까지 모두 포함시킨 것일 것이다. 더 말할 필요없이, 적벽대전의 주력은 주유가 지휘하는 오군이다. 유비의 군대는 그저 조연이었다. 다행히 손권이 유비를 끌어주었기 때문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유비, 제갈량은 아마도 조조의 대군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209년: 손권이 합비를 포위한다. 주유는 전년부터 조인과 강릉을 놓고 다투었다(소량의 유비군대가 도와주었음). 혈전을 거쳐 마침내 강릉을 함락시켰다. 유비는 무엇을 했는가? 그저 실력을 키우는데 급급했다.

 

210년: 주유가 죽는다. 노숙이 후임을 맡는다. 손권은 강릉을 유비에게 빌려준다. 그러지 않았다면, 유비는 아예 촉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해에, 손권 유비 양측은 모두 조조와 교전하지 않았다.

 

211년: 이 해에 조조의 주의력은 서북을 향했다. 유비는 사천으로 들어가느라 바빴다. 항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212년: 조조는 기본적으로 서북의 전투를 끝낸다. 대군을 옮겨서 강동으로 진격한다. 손권이 조조의 주의력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유비가 사천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213년: 조조는 중병을 유수구로 밀어부친다. 손권은 7만의 병력을 이끌고 막아냈다. 서로 한달여를 대치한다. 당시 유비의 사천공격은 거의 관건적인 시기에 접어든다. 다행히 손권이 조조의 주의력을 동쪽으로 끌어가 주었다.

 

214년: 손권은 완성을 친히 공격하여 격파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해는 동오가 독립적으로 조조의 군대와 싸운 해이다.

 

215년: 손권이 10만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친정한다. 그러나 장료에 격퇴당한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은 손권의 친정으로 조조의 주의력은 다시 동쪽을 향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비는 막 사천을 얻은때였다. 상황은 "촉중일일수십경(蜀中一日數十驚), 수장수참지이부능안야(守將雖斬之而部能安也)"(촉에서는 하루에도 수십번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수비장수들이 비록 참했지만 안정시킬 수 없었다). 손권의 북벌은 유비가 사천에서 자리를 잡는데 고귀한 시간을 벌어준다.

 

216년: 겨울, 십월. 조조는 병력을 보내 손권을 친다. 십일월, 초에 이른다. 이 해에 손권은 독자적으로 조조와 싸웠다.

 

217년: 봄, 정월, 위왕 조조의 군대가 소에 거주한다. 손권은 유수를 지킨다. 이월, 조조가 공격한다. 삼월 조조가 군대를 퇴각시킨다. 복파장군 하후돈, 도독 조인, 장료등 이십육군을 거소에 주둔시킨다. 유비는 계책을 잘 준비하여, 여러 장수를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한다. 장비, 마초, 오란등을 하판에 주둔시킨다. 위왕 조조는 도호장군 조홍을 보내어 막게 한다.

 

이 해에 조조는 다시 한번 중병을 보내 손권을 압박한다. 철군할 때는 하후돈, 도독 이십육군을 거소에 주둔시킨다. 손권이 조조의 대병력을 견제하였으므로 유비는 한중을 공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해에 유비는 마침내 조조와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조는 단지 조홍만을 보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해에 조조에 항거한 상황은 여전히 동오가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218년-217년의 10년동안 손유동맹은 이미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 10년은 유비집단이 성장하는 기간이고, 삼분천하의 하나인 촉을 건립하고 공고히 한 10년이다. 손권이 기본적으로 독자적으로 조조의 강대한 압력을 감당한 10년이다. 조조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유비가 촉국을 건립하러 갔을 때, 조조를 누가 상대했는가? 맹우인 손권이 아니었는가? 이는 손권이 조조에 대항하는 대국을 고려하여 기본적으로 혼자 조조의 압력을 10년이나 버텨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비로소 촉국을 건립할 기회와 시간을 벌었다. 당연히 손권이 이렇게 한 것은 주관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유비집단이 발전하는데 필요조건이었다. 그외에 마초는 서북에서 조조와 투쟁하였고,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객관적으로 유비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218년: 이 해에 유비는 한중으로 대거 진격한다. 조조도 친히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온다. 이 해에 조조에 항거한 주력은 유비였다.

 

219년: 유비는 조조의 대병력을 손권이 견제하는 상황하에서, 주력을 가지고 하후연의 편사를 상대하고, 조조가 온 후에는 굳게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한중을 함락시킨다. 그후에 관우의 소위 "위진화하(威震華夏)"가 있다. 다시 그 후에 관우가 손권에게 생포되어 참수당한다. 유비는 형주를 잃는다. 이 해에 조조에 항거한 주력은 유비였다.

 

단계적 평가: 208년-219년을 보면 오촉 양국의 제1차연합이다. 모두 12년이다. 이 12년간, 조조에 항거한 것을 보면 오나라가 위주로 싸운 것이 8년이고, 촉이 위주로 싸운 것이 2년이다. 쌍방이 모두 싸운 것이 2년이다. 규모로 보자면, 오나라쪽이 더욱 컸다. 전과도 더욱 휘황했다. 비록 한중전투에서, 조조는 처음에 단지 하후연의 편사만을 보냈고, 주력은 동쪽에 두었다. 나중에 조조가 온 후에도 여전히 하후돈 도독26군은 거소에 주둔했다. 대부분의 병력은 여전히 동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중측에서 조조의 병력은 우세를 점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열세에 처했다. 관우는 비록 '위진화하'의 시기가 있었지만, 수엄칠군의 전과와 의의는 적벽대전과 비교할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12년동안 손권집단이 조조에 항거한 공헌이 유비집단보다 훨씬 컸다.

 

220년-222년, 이 시기에 오촉연맹은 결렬된다. 유비는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참패한다. 조비는 대거 동오를 공격한다.

223년: 유비가 사망한다. 오촉양국은 다시 결맹을 맺는다.

224년: 조비는 대거 오나라를 토벌한다. 오촉양국은 이미 다시 결맹을 맺었다. 제갈량은 맹우가 독자적으로 강대한 위군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 촉국은 그럴듯한 동작이 전혀 없었다.

225년: 조비는 다시 오나라를 대거 토벌한다. 오나라는 독자적으로 강대한 위군에 항거한다. 촉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남정을 하고 있었다.

226년: 위국은 황제가 바뀐다. 손권은 위나라를 공격한다. "오왕은 위에 대상(大喪)이 있는 것을 보고, 가을, 팔월, 스스로 강하군을 공격한다. 태수 문빙이 굳게 지킨다." "오나라 좌장군 제갈근등이 양양을 공격한다. 사마의가 이를 격파하고, 부장 장패를 참한다. 조진은 다시 그 별장을 심양에서 격파한다." 이해에 위나라와 싸운 주력은 동오였다.

 

단계적 총평: 오촉양국연맹이 결렬되었던 4년은 빼고, 오촉양국이 다시 결맹을 맺은 223년부터 보자. 이 몇년동안은 기본적으로 위,오 양국이 크게 싸웠고, 촉국은 그저 구경만 했다. 오촉양국은 이미 결맹을 맺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맹우가 독자적으로 강대한 위군을 상대하도록 놔두었고, 촉군은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223년, 비록 삼국간에 전투는 없었지만, 위나라의 세 전선중, 중, 동의 두 전선은 동오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역시 오나라의 압력이 더욱 컸다. 224년-226년, 위오양국이 크게 싸운다. 그래서 223년-226년의 4년은 기본적으로 오나라가 독자적으로 위나라를 상대했다.

 

227년: 이해에 3국가간에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위나라의 3개 방향 배치를 보면 누가 중점인지 알 수 있다. 동쪽은 대사마 조휴이고, 중간은 사마의이다. 이 두 방향은 동오를 향했다. 촉을 상대하는 서쪽은 누가 맡았는가? "겁이 많고 계책이 없다는" 하후무이다.

228년: 제갈량의 제1차북벌이 실패로 끝난다. 동쪽의 육손은 조휴를 대파하고 승리를 거둔다. 이는 제갈량이 부끄러워 죽을 일이다. 제갈량은 위나라의 주력이 동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다시 어부지리를 얻고자 하였으나 진창에서 저지당한다. 20여일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 손실이 얼마일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왕쌍을 죽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북벌은 실패이다. 이해에 위나라를 상대한 주력은 오,촉이 각각 절반씩이라고 할 만하다(비록 오나라의 전과가 촉보다 훨씬 컸지만)

229년: "봄, 촉한 제갈량이 장수 진계를 보내어 무도, 음평 2군을 공격한다. 옹주자사 곽준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한다. 제갈량은 스스로 위력을 보이고, 곽준이 물러난다. 제걀량은 두 군을 얻고 돌아온다" 이해에 위나라와 싸운 주력은 촉이었다.

230년: 조진이 촉을 공격한다. 손권은 위를 공격한다. 합비성까지 갔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간다. 이해에 위나라와 싸운 것은 오촉이 각각 절반이라고 할 만하다.

231년: 제갈량의 제4차북벌이 있었다. 손권도 놀고 있지 않았다. 겨울 십월, 오나라의 왕은 중랑장 손포를 거짓으로 항복하게 한 후, 양주자사 왕준을 유인한다. 오왕은 부릉에 복병을 두어 이를 잡는다" 이해는 촉이 위에 항거한 주력이었다.

232년: 오나라의 육손이 병력을 이끌고 여강으로 향한다. 그러나 만총에게 격퇴당한다. 이 해에 오나라가 혼자서 위나라와 싸웠다.

233년: 서쪽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동쪽에는 있었다. 손권의 북벌은 만총에 격퇴당한다. 다시 이 해도 오나라가 독자적으로 위에 항거했다.

234년: 오촉의 4로대군이 연합하여 위를 공격한다. 손권, 육손, 손소, 제갈량, 오가 3로, 촉이 1로이다. 이를 보면 오군이 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위나라는 어떻게 상대했는가? 제갈량을 상대한 것은 사마의이다. 손권을 상대한 것은 조예가 친히 병력을 이끌고 친정한다. 동시에 동쪽에는 만총등 명장이 있었다. 확실히 위나라는 오나라군을 상대하는데 주력했다. 이해에 위나라를 상대하는데 오나라의 공헌이 촉보다 컸다. 비록 이 해에 제갈량이 촉국 건립이래 최대규모의 북벌을 발동시켰지만. 그러나 손권의 규모보다는 적었다.

 

단계적 총평: 227년-234년, 8년의 기간동안 위나라에 항거한 것을 보면, 오나라가 위주로 한 것이 4년, 촉이 위주로 한 것이 2년, 오촉이 반반으로 항거한 것이 2년이다.

 

235년-240년: 삼국간에 기본적으로 전투가 없었다. 그러나 설명해야할 것은 위나라의 동중,서 3갈래 방어선중, 동, 중 두 개는 동오를 향하고 있었다. 동오의 압력이 훨씬 컸다.

241년: 여름 사월, 오나라의 전종이 회남을 공략하고, 작피를 결한다. 제갈각은 육안을 공격하고, 번성을 포위한다. 제갈근은 상중을 공격한다 정동장군 왕준, 양주자사 손례와 전종은 작피에서 싸운다. 전종은 패주한다. 형주자사 호질은 가벼운 병사를 보내어 번성을 구하려 하나 이렇게 말한다: '적이 많아서, 압박할 수 없습니다', 호질은 말한다: "번성은 병사가 적다. 그래서 진군할 때 밖에서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다." 그리하여 병력이 포위하엿지만, 성안은 평안했다. 오나라병사는 여전히 형주에 있었고, 태부 사마의는 말했다: 사ㅇ중의 백성이 10만이다 물로 남쪽과 분리되어 번성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한달이 되도록 위기를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위험하다." 육월, 태부 사마의는 여러 군을 이끌고 번성을 구한다. 오군이 이를 듣고 밤에 도망친다. 삼주구까지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 이해에 오나라는 큰 행동을 보인다. 촉군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242년: 삼국간에 전투가 없다.

 

243년: 오나라에 동작이 있었다. 오나라의 제갈각이 육안을 기습한다.

 

244년: 조상이 촉을 공격하나 실패한다. 이해에 촉국이 위에 항거한 주력이다.

 

245년: 삼국간에 전투가 없었다.

 

246년: 봄 이월, 오군 거기장군 수연이 상중을 공격한다. 수천명을 죽이고 돌아온다.

 

단계적 총평: 235-246년의 12년간 위에 항거한 것을 보면 오나라가 위주인 해가 11년이고, 촉이 위주인 해가 1년이다.

 

247년: 이해에 옹,경의 강호가 반란을 일으켜 촉한에 투항한다. 촉한의 강유가 병력을 이끌고 농우로 나온다. 옹주자사 곽준, 토촉호군 하후패와 조서에서 전투를 벌인다. 호왕 백호문, 치무재등이 부락을 이끌고 강유에 투항한다. 강유는 이들을 촉으로 들여보낸다. 곽준은 강호의 여당을 공격하고 모두 평정시킨다.

 

248년: 삼국간에 전투는 없었다.

 

249년: 강유는 다시 북벌한다. 곽준에 패배한다.

 

250년: 정남장군 왕창이 글을 올린다: "손권은 좋은 신하를 유배보내고, 적자와 서자간에 분쟁이 있으니 동오를 공격할 만합니다." 조정이 이를 따른다. 신성태수 남양주태를 보내어 무, 자귀를 기습하고, 형주자사 왕기는 이릉으로 향하고, 창은 강릉으로 향한다. 창은 대나무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 격파한다. 오나라 대장 시적은 밤에 강릉으로 도망간다. 창은 평지로 끌고가서 싸우고자 한다. 먼저 한나라의 강유는 다시 서평을 공격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확실히 위나라의 주요역량은 오나라를 향했다.

 

251년: 왕기, 주태가 오나라병력을 공격한다. 모두 격파한다. 투항한 자가 수천이다.

 

252년: 십일월, 왕창등에게 조서를 내려 3도로 오를 공격한다. 십이월, 왕창이 남군을 공격한다. 관구검이 무창으로 향한다. 호준, 제갈연이 칠만을 이끌고 동흥을 공격한다. 갑인, 오나라 태부 제갈각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가서 동흥을 구한다. 호준등은 여러 군에게 부교를 놓아 건너게 한다. 병력을 나누어 두 성을 공격한다. 성은 높은 언덕에 있어서 함락시킬 수 없었다. 제갈각은 관곤장군 정태와 여거, 유찬, 당자를 전부로 하여 산의 서쪽으로 오르게 한다.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여러 군의 행군이 늦어져, 만일 적이 유리한 지역을 점거하면, 싸우기 어렵다. 나는 따르겠다."

 

253년: 이해는 시끄러웠다. 오나라의 제갈각은 20만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한다. 위나라도 20만을 모아서 맞이한다. 강유는 위오 양국이 크게 싸우는 거을 보고 이 기회에 이득을 보고자 한다. 위나라는 여전히 중점을 동쪽에 두었다.

 

254년: 적도장 이간이 밀서를 올려 촉에 투항한다. 육월 강유가 농서를 공격한다. 촉한의 강유는 하간, 임조로 공격한다. 장군 서질은 싸운다. 그리하여 탕구장군 장의를 죽이고, 촉한의 병력은 돌아온다.

 

255년::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킨다. 오나라는 출병하여 맞이한다. 강유는 다시 적도를 나선다. 옹주자사 왕경을 대파한다. 이해에 오촉 양국은 위나라를 상대하는데 모두 공이 있었다. 반반이라 할 만하다.

 

256년: 강유는 등애와 단곡에서 싸운다. 촉장 호제가 시간을 놓쳐 도착하지 못하여, 촉군이 대패한다. 사상자가 많았다.

 

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동오에 연락한다. 오나라는 병력을 보내어 맞이한다. 사마소는 이십육만대군을 출동시킨다. 이번 전투는 삼국시기에 규모가 가장 큰 전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군은 대량의 병력을 동쪽전선을 견제하고 있었고, 강유가 이끈 촉군의 주력은 위군의 편사를 상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258년: 회남지전이 끝난다. 위군이 전승을 거두고 끝난다.

 

259-261년: 삼국간에 전투가 없었다.

 

262년: 겨울 십월, 강유가 조양을 공격한다. 등애는 의화에서 싸우고 격파한다. 강유는 묘중으로 물러난다. 강유는 다시 등애에게 패배한다.

 

단계적 총평: 247년-262년, 모두 16년간, 위나라와 싸운 것으로 보면, 오나라가 위주로 한 것이 10년이고, 촉이 위주로 한 해가 5년이다. 오촉이 반반인 해가 1년이다.

 

(주석) 223-262년까지 위국의 3개 전선중, 동, 중 두 개 전선이 동오를 상대했으므로, 만일 삼국간에 전투가 없었다면, 오나라가 위주로 싸웠다고 계산했다. 어쨌든 오나라가 직면한 위군이 더 많았다. 209년-210년, 손류쌍방은 모두 조조와 교전하지 않는데, 당시는 손류가 모두 조조의 1개 전선만을 상해했다. 그래서 이 두 해는 각각 절반으로 본 것이다.

 

총평: 208년-262년까지(촉이 멸망하기 1년전), 모두 55년간, 220-222년 오촉연맹이 결렬된 것을 제외하면, 양국이 실제로 52년간 연맹을 맺었다. 위와 싸운 것을 보면, 이 52년가운데, 오가 위주인 해가 37년, 촉이 위주인 해가 10년, 오촉이 반반인 해가 5년이다. 이는 시간적으로 규모상으로 촉의 최대규모북벌이 제갈량의 제5차북벌인데 10만대군이었다. 그러나 동오쪽에서는 10만이 넘는 규모의 파병이 여러번이었다. 예를 들어, 215년 손권의 합비공격, 234년 손권의 1로만 10만이다. 253년 제갈각은 20만을 이끌고 위나를 공격한다. 후삼국시기에 들어, 동쪽전선의 전쟁규모는 서쪽전선보다 훨씬 컸다. 예를들어, 회남의 3번반란은 삼국시기 최대규모의 전투라 할 수 있다. 위나라에 대한 타격으로 말하자면, 관우의 수엄칠군은 주유의 화소적벽에 훨씬 못미친다. 육손의 협석에서 조휴를 대패한 것은 제갈량이 평생동안 도달하지 못할 전적이었다. 위나라의 중시정도를 보면, 3개의 전선중 동, 중의 두 전선은 동오를 상대했고, 그리고 매번 동서양쪽에서 전투가 있으면 위나라는 항상 동오를 먼저 상대했다. 예를 들어, 234년, 위나라는 동쪽은 공격하고 서쪽은 지킨다. 조예는 친히 손권을 상대한다. 위나라와 싸운 것을 보면, 전체적으로 분석하면 시간적으로 보면 오나라가 촉보다 많다. 규모로 보면 오나라가 촉보다 크다. 전과로 보면, 오나라가 더 잘 했다. 전과도 더욱 휘황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나라가 위나라와 싸운 공로가 더욱 큰 것이다.

 

2. 왜 많은 사람들은 촉이 위와 싸운 주력이라고 오인하는 것일까?

 

첫째, 삼국연의의 영향이다. 삼국연의는 촉을 정통으로 삼고, 위를 상대방으로 삼았고, 오나라는 주변화되었다.

 

둘째, 219년 관우의 수엄칠군이 발생한다. 소위 '위진화하'이다. 그후 동오가 형주를 기습하여 차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해에 촉국은 확실히 위나라와 싸운 주력이다. 다만 오촉연맹은 50여년에 이르렀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평가할 수 없다.

 

셋째, 조조는 '천하영웅은 오로지 그대와 나 뿐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가소로운 것은 유비를 올리고 조조를 내리는 사람들도 조조의 말을 가지고 유비를 끌어올린다. 역사평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실이다. 누구도 당사자의 말을 참고만 할 수 없다. 그래서, 조조의 말은 촉국이 위와 싸운 주력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하물며 조조가 이 말을 할 때 아직 북방을 통일하지 못했었다. 오촉연맹이 아직 실현되기도 전이다.

 

넷째, 유비는 자칭 한황실의 종친이다. '한실회복'의 기치를 내걸었다. 어떤 사람은 당연히 유비가 건립한 촉국이 위와 싸운 주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손권이 연맹이 형성된 최초 10년동안 거의 독자적으로 조조의 압력을 막아냈다. 유비는 비록 '한적 조조와 세불양립이라고 했지만, 조조와 대규모로 싸운 것으 2년(218,219년)이다.

 

3. 촉국이 위나라와 수십년간 대치한 것은 오촉연맹의 대전제를 벗어날 수 없다.

 

삼국중 위나라는 강하고, 오,촉은 모두 약했다. 삼국정립의 전제는 오촉이 연합하여 위와 싸우는 것이다. 이 점은 유비에 가까운 삼국연의에서도 부인하지 않았다.

 

실제로 오촉 양국간에는 연맹이 결렬괸 기간도 있었다. 그러나 협력이 주류였다. 연맹은 자연히 양국에 모두 좋다. 인구, 군대, 영토, 인재등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오나라는 촉보다 강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오나라가 위나라와 싸운 주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위나라의 방침도 동쪽을 공격하고 서쪽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군대는 오나라를 향했다. 그래서, 위촉대치현상을 보려면 반드시 오촉연맹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위나라는 촉나라보다 훨씬 강했다. 위나라의 대부분 군대는 오나라를 향했다. 서쪽전선은 오랫동안 편사(偏師)를 보내어 촉의 주력을 상대했다. 오촉연맹이라는 대전제를 벗어나서 제갈량, 강유가 강대한 위나라와 수십년을 대치했다고 보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촉국이 위나라와 수십년간 대치한 것은 오촉연맹의 대전제를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