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암북(江巖北)
보시라이의 언변은 중국고관들 중에서 발군이다. 다롄시장을 맡은 후, 그는 항상 매체의 '총아'였다. 관방매체에서는 그의 말은 유머러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말은 뺀질거리는 수준으로 본다.
어떤 기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다롄에서 재직하는 기간동안 보시라이가 기자회견에 나타나면, 회견장은 가득찼다. 여러 나라, 여러 신문매체의 기자들이 내놓은 여러가지 질문에, 보시라이는 항상 적절하게 몬족할만한 대답을 내놓곤 했다.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비꼬는 질문에도 그는 유머스럽게 반격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회피하지도 않았고, 외교적인 언사를 쓰지도 않았다. 기지가 넘치고 멋진 말들을 하곤 하여, 자주 회견장의 폭소와 박수소리로 차게 했다. 왕왕 회견이 끝난 후에도 기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특히 처음 다롄에 온 젊은 기자들은 보시라이를 둘러싸고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곤 했다.
한번은 기자회견때 한 일본기자에게 이에는 이로 반격한 적이 있다. 이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 일본기자의 질문은 사람들이 칭찬해마지않는 다롄을 향하고, 한창 득의양양하고 있는 보시라이를 직접 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 일본의 연해도시와 비교하면, 다롄은 오염이 심각한 도시이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다롄의 상공까지 오면 다롄은 두꺼운 스모그로 쌓여 있다. 시장께서는 보셨는지 모르겠다.
보시라이는 웃으며 대답한다. 공기의 질을 일년내내 검사하는데 그 결과는 다롄이 오염이 적은 도시라고 나타난다. 다롄은 연해도시이다. 봄가을에는 안개가 많다. 그래서 항공편도 자주 정시에 출발하지 못한다. 아마도 기자양반은 안개낀 날에 다롄에 온 모양이다.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 일본기자는 벌떡 일어서서 반박했다. 안개가 아닙니다. 분명히 스모그입니다. 일본에서 날아올 때는 다롄시 동북의 산간으로 옵니다.
보시라이는 손을 흔들어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표정을 엄숙하게 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다롄시는 과거와 비교하면 좋아졌다. 그러나 세계의 선진도시와 비교하면 아직 차이가 있다. 지금 그 차이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것은 최대가 아니라 최고이다. 그런데 아직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최고라는 것은 끝이 없는 목표이다. 몇년동안 도시의 일부 오염공장은 모조리 계획적으로 도시외곽에 새로 만든 공단지구로 내보냈다. 그리고 오염방지조치를 했다. 오염이 없는 공장도 시에서 나가도록 했다. 더 많은 녹지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금방 이 분 선생이 언급한 대련도시 동북산간지방에 스모그가 있다는 것은 아마도 다롄시멘트공장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도 개조를 마쳤고, 매일 내뿜는 수량은 오염이라고 할 수준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 분 선생은 나에게 봤는지 물어보았는데, 진정한 오염을 선기자선생은 보았는지 모르겠다. 매번 내가 비행기를 타고 외지에서 다롄으로 돌아올 때면, 다롄만 상공을 지난다. 그때 대화공장에서 붉은 물, 녹색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것은 50여년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남겨놓은 화근이다. 수십년간 개조를 여러번 했지만, 내가 시장을 맡은 지금까지도 해결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역사의 증인이다. 다롄의 사람이라면 잊어서는 안되는 굴욕의 과거이다.
보시라이의 대답에 그 일본기자는 졸지에 할 말을 잃었다.
보시라이가 기자회견에서 한 답변과 대화는 지금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기자회견때, 어떤 기자가 다롄이 정말 녹색도시라고 칭찬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보시라이는 "우리는 큰 일은 할 줄 모르고 그냥 나무와 풀이나 심을 줄 안다." 기자가 또 다롄이 아주 아름다운 도시라고 칭찬하자, 그는 "그건 말똥이 반짝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기자가 다롄에 새로운 빌딩이 많이 들어섰다고 말하자, 보시라이는 "그건 유모가 아이를 안고 있는 거나 같다. 모두 다른 사람 거다. 외국이나 외성시에서 투자한 것이다." 기자가 시장이 정말 힘들겠다고 말하자, 보시라이는 "괜찮다. 우리 대련 사람들은 잘 먹는다"고 말한다. 어떤 기자는 직접 보시라이가 키 186센티미티로 아주 잘생겼다고 말하자, 보시라이는 말했다: "머리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쉽게 키는 크는 법이다.좋다.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와라. 대련의 바닷바람을 공짜로 맞게 해주겠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가가대소했다. 웃은 것은 아마도 보시라이의 자부심에 가득찬 말 때문이 아니라, 기자들의 아부하는 행태에 대한 것일 것이다.
또 한번은 보시라이가 '캐논배' 일본어말하기대회에 가서 치사를 하는데, 사정으로 인해 늦게 도착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주 미안합니다. 늦었습니다. 기실 제가 일찍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쨌든 일본어를 못알아 듣기 때문입니다. 나는 뤼완산 회장과 장부닝 주임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앉아서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집중하여 듣고 있습니다. 마치 일본어를 잘 알아듣는 것처럼. 일본어 말하기대회를 여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가득 찬 것을 보니 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본어를 배우는데, 일본어가 배우기 쉬운가보다. 나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배우는데 나까지 배워서 뭐하겠는가. 어디를 가든지 통역을 해줄 사람이 있을텐데."
<중국기업보>의 기자 왕스안의 회고에 따르면, "두 가지 일이 아주 인상깊다. 하나는 '반제사(反題詞)'이고 또 하나는 '반야기규(半夜機叫)"이다. 이런 조치는 다른 지도자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반제사'라는 것은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으로 있을 때, 경영을 잘하지 못하는 호텔이 보시라이에게 글을 써달라고 했다. 보시라이는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관리혼란(管理混亂), 매황유하(每況愈下)"(관리가 혼란하며, 갈수록 심해진다)
'반야기규'(한밤중에 전화기가 울리다)는 보시라이는 항상 밤중에 주요간부들에게 업무현황을 물어보곤 했고, 그러다보니 간부들이 밤중에 접대를 받으러 나갈 수가 없었다. 다롄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국장이 밤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보시라이가 다음 날 그 국장을 불러왔다. 그리고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이미 잠들었다고 대답하자, 보시라이는 아직 업무량이 많지 않은 것같으니 임무를 더 주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보시라이를 이렇게 비난한다: "보시라이는 아주 총명하고 아주 유능한 인간이다. 그러나 일처리가 너무 패도적이다." 해외에서도 보편적으로 홍콩 <문회보> 기자 장웨이핑(姜維平)이 그를 비판했다고 6년형을 받았는데, 이것은 보시라이의 패도적인 면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한다.
2001년초, 다롄에서 16년간 일했던 보시라이는 마침내 다롄을 떠난다. 다롄의 좋은 성적표를 내놓는 바람에 그는 랴오닝성 부서기, 대리성장으로 발탁된다.
1월 12일, 다롄시는 영도간부대회를 개최하고, 랴오닝성위 조직부장 뤄린이 중공중앙의 임명결정을 읽는다. 보시라이는 회의에서 고별사를 한다.
그날 신화사는 다롄에서 3줄짜리 단신을 내보낸다: 신임 랴오닝성 대리성장 보시라이가 오늘 오전 다롄시 영도간부회의상에서 고별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 여러분들이 여러해동안 나에게 보내준 지지와 도움에 감사하며, 여러분에게 경례를 바친다."
보시라이는 말했다. "오늘의 마음은 아주 평온하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다롄시 간부대회에서 여러분에게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는 자리이다." 그는 과거 다롄에서의 일들을 회고하였다. 특히 다롄의 간부들과 함께 경제를 발전시키고, 도시를 건설하던 힘든 역정을 얘기했다. 보시라이는 그동안 그는 다롄시의 간부와 군중들과 한마음이 되어 3가지 일을 했다고 하였다: 하나는 경제구조조정으로 100개의 공장을 이전시켰고, 제3산업, 삼자기업, 향진기업과 민영기업등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둘은 다롄에 '환경혁명'을 했다. 다롄을 오래된 중화학공업도시에서 화원도시로 바꾸었다. 땅값이 대폭 오르고, 상업무역, 관광이 발전되어 도시의 전체적인 가치가 상승했다. 셋은 대외개방의 확대에 노력했다. 다롄의 국내외 사업이 발전되고, 친구도 많아지고, 명성도 올라갔다. 자신의 관념도 바뀌었다. 이것은 다롄사람들이 공동으로 창조한 전체 도시의 휘황이다.
보시라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초목이 아니다. 어찌 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는 영원히 다롄과 다롄인민이 그에게 보낸 지지와 도움을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는 다롄이 "나의 대학"이라고 기억하겠다고 하였다.
신화사에서 조용하고 간단하게 짧은 소식을 내보낸 것과든 달리 중신망에서는 그날 "보시라이가 강연을 했고, 깊은 정을 가지고 다롄시와 작별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여기서 보시라이가 다롄과 고별하는 강연의 전문을 실었다. 보시라이의 연설은 그의 말재주를 잘 보여준다.
- 금년에 나는 이미 51살이 넘었다. 7월이면 52살이다. 다롄에서 꼬박 16년간 있었다. 내 생각에, 일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가장 의미있었으며, 가장 감동적인 16년을 바로 다롄에서 보냈다. 이후 어디를 가든 나는 다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일부 동지들에게 말했다. 감정을 중시하라고 지구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중국의 이 판도이다. 중국의 판도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다롄이다. 이후, 나는 랴오닝도 추가할 것이다.
- 나는 자주 외부에서온 동지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를 칭찬하지 말라. 다롄간부들이 일을 잘하면 내가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오늘 나는 떠난다.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여러분의 지지와 도움에 감사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경례를 바친다.
-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동지들과 영원히 동지일 뿐아니라, 영원히 전우이다. 과거에 '정동수족(情同手足)'이라는 말이 있다. 기실 인생을 돌아보면, 진정 업무를 함께 하고 생각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수족보다도 더 깊게 된다. 나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다. 그러나 16년동안 매년 한두번밖에 얼굴을 못본다. 그러나 여기의 동지들은 매주 만나고 심지어 매일 만났다. 같은 목표를 위하여, 같이 책임지고, 같이 열받고 같이 힘쓰고, 같이 문제를 연구했으며, 같이 성취를 이뤄냈다. 그리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즐거워했다.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에 '먼 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기실 가까운 이웃도 동지만은 훨씬 못하다. '동지'라는 말은 아주 잘 만들었다. 바로 같은 뜻을 지니고 같이 일하는 것이며, 일하는 과정에서 우의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관료용어도 아니고 틀에박힌 말도 아니다. 현실생황에서 아주 진실한 감정이다. 우리으 대가정은 많은 소가정보다 낫다. 사실상 다롄인민이 요 몇년동안 구정이 되면 폭죽을 저녁연회에서 터트릴 때면 '소가정'에서 '대가정'으로 온가. '대가정'이 '소가정'보다 낫다. 이것은 다롄에서 아주 기쁘고,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 어렸을 때 바로 인민이 우리를 길러준 모친이라고 알았다. 오늘 나는 특별히 깊은 느낌을 가졌다. 다롄인민의 감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요 몇년, 우리의 간부는 아주 힘들게 일했다. 어떤 동지는 나에게 철석심장이라고 했다. 확실히, 업무의 프로세스에서는 정부, 시위에서 일할 때 세심하게 보살펴서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일을 되돌아보면, 나는 아주 감동하게 된다. 우리의 이들 동지들에게 기꺼이 말한다. 우리는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여러 전선에서 모두 쉬지을 않고, 모두 길을 막지 않고, 모두 소극적이지 않고 함께 노력했다. 각자의 휘황한 업적을 일구어 냈다. 매 전선에서 모두 잘 싸웠다. 이 점은 시위. 시정부를 많이 도와주었다. 많은 작은 성취들이 모여서, 다롄의 오늘날 전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장 총서기가 우리에게 준 글인 "북방명주"의 근거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여러분은 헛되이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다. 비록 몸은 좀 피곤했지만, 머리는 좀 긴장되었지만, 정신은 부유하다.....우리가 다롄의 지난 일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모든 정력을 우리가 사랑하는 다롄에 전부 쏟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1월 17일 오전 9시정각, 보시라이가 다롄시 시위건물을 걸어나올 때, 기관의 거의 모든 간부들은 문앞에 모여서 그를 환송했다. 자리에서 떠날 수 없었던 사람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카메라를 들어서 이 진귀한 순간을 남겼다.
동료등과 악수로 고별한 후, 계단을 내려간 보시라이는 계단위에 서 있는 수백명의 공무원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후, 해군광장의 수천명 다롄백성들에게도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시위건물을 걸어나가자 보시라이는 열정적인 시민들에게 둘러싸인다. 원래 도열했던 줄은 즉시 혼란에 빠진다. 경비들은 손을 들어 보시라이를 감싸려 했다. 열기에 넘친 살마들 무리 속에서 밀려다니지 않도록, 촬영기자들은 '직업적인 편리'를 이용해서 두번째 포위망을 구성한다. 시민들은 곧이어 기자들을 에워쌌다. 무수한 손이 보시라이에게 뻗어나갔고, 보시라이는 발걸음을 한 걸음도 옮기기 힘들었다.
다음 날, <다롄일보> <신상보>등의 다롄매체에는 각각 "'안녕'이라고 말할 때 정말 힘들었다. 다롄의 만명 시민이 보시라이를 환송하다" "다롄의 길거리에는 감동적인 일막이 펼쳐지다. 떠나는 시장 보시라이의 이임에 만명시민이 자발적으로 환송하다."라고 크게 보도했다.
나중에 어떤 네티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시민들의 '자발적 환송' 장면은 장관이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정말로 '자발'일까? 그리고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신격화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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