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극상(周克商)
보시라이는 후진타오/원자바오가 정권을 잡은 후 두번째로 비정상적인 상태로 면직당한 중공중앙정치국위원이다. 중앙정치국은 중앙위원회의 상설기구이고, 중공제차5대회이래 중앙집행위원회를 소련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정치국으로 개조했다. 그후, 역대 중앙정치국은 모두 구성원들이 비정상적으로 면직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전의 중앙집행위원회도 인원교체가 빈번했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공산당 건립이후, 정권을 잡은 전후를 불문하고, 내부 고위층의 정치투쟁은 그친 적이 없었다.
적을 찾고, 투쟁을 숭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공산주의정당에서 계속되는 정치투쟁은 통상적인 상태이다. 매 기 중앙정치국의 교체직전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민감한 시기이다. 중국공산당의 집권이후 소위 3세대를 거쳐 권력이 이양되었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린뱌오의 두 후계자를 제거했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세번째 후계자 화궈펑을 몰아낸 후, 다시 후야오방, 자오쯔양의 두 후계자를 교체했다.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넘겨줄 때만이 평온했다. 그러나, 역시 반만 넘겨준 상태였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집권한 후 육십여년간, 진정 전면적이고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없었다. 17대에 시진핑,리커창을 차세대 지도자로 세운 후, 특별한 문제는 없어보였다. 이번 보시라이사건은 다시 한번 원래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상황에 변수를 던졌다.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부는 궁중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라이사건을 들여다보려면 역시 중국공산당의 정치투쟁의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국이 보시라이사건을 통보한 후, 논자들은 천량위 사건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천량위 사건이나 그 이전의 천시통 사건은 모두 그 성격상 보시라이사건보다 훨씬 가볍다. 천량위, 천시통의 죄명은 모두 부정부패와 경제범죄였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정치투쟁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죄명이다. 천시통, 천량위가 물러난 것은 순전히 이익다툼이지, 노선다툼은 아니었다. 이익다툼은 정치수단으로 해결하면 된다. 노선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생사존망에 관련된다. 돌아보면 왕밍(王明), 보구(博古), 류샤오치, 후야오방, 자오쯔양, 후치리(胡啓立)등은 모두 노선투쟁으로 쫓겨났다.
보이보는 17대 반년전에 사망한다. 사람이 떠나면 차는 식는다(人走茶凉). 보시라이는 17대후 충칭으로 전근된다. 이것은 정치국 위원이 충칭시위 서기를 겸임한 첫번째 케이스이고, 정치국의 역사상 드물게 보는 경우이다. 보시라이는 17기 정치국에서 확실히 고립된 모습을 보인다. 부임후, 창홍타흑을 하면서 '충칭모델'을 내놓는다. 이런 국수적인 방식은 6.4후 첫번째로 나온 것이다. 동작의 폭이 큰 것이나 여론의 선전이 강화된 것도 역시 드물게 보는 예였다.
평상심으로 말하자면, 안정유지와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정치국에서 보시라이는 확실히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마오, 덩시대의 강인정치(强人政治)를 거쳐, 장쩌민시대의 범인정치(凡人政治)로 접어든 후, 후진타오,원자바오시대는 용인정치(庸人政治)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보수적이며 진취심이 없었다. 현재의 국면을 유지하는 것만을 정권의 최고목표로 삼았다. 동시에 중국은 사람들의 마음은 변화를 갈구했다. 니사구하(泥沙俱河, 진흙과 모래가 섞여서 흘러간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함께 섞여 있다는 뜻)가 일담사수(一潭死水, 고여서 썩는 물)보다는 낫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는 그것이 창홍타흑이라고 하더라도 현상유지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충칭모델(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은 원인이다.
충칭모델을 살펴보자. 정좌경우(政左經右, 정치는 좌, 경제는 우)의 실현방식으로 보자면, 충칭모델은 덩샤오핑모델과 다를 바 없다. 충칭의 발전모델은 중국대부분지역(광동을 포함하여)의 발전모델과 같다. 오로지 창홍타흑이 새로운 내용이다. 만일 보시라이가 18대에 시진핑, 리커창과 같이 상임위원에 확실히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는 굳이 힘을 들여가면서 고위층들이 싫어할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보시라이가 이처럼 일을 벌인 것은 그가 18대에 상임위원회에 들어가는데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강력한 동맹군도 없어서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래서 비통상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이데올로기, 국수주의에 기대어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창홍은 중국공산당의 전통이데올로기부분이다. 그러나, 창홍으로 처음 밉보인 사람은 바로 후진타오이다. 이 일은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창홍은 전통 레드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충칭창홍에 대하여 후진타오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따라서 해야할까? 그러면 누가 보스인가? 만일 후진타오가 따라하지 않는다면 좌파인사들은 후진타오가 전통이데올로기를 포기했다고 공격하지 않을까? 창홍의 그 순간, 보시라이는 이미 후진타오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위치에 처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타흑에 관련된 관리는 대부분이 충칭의 전시위서기 허궈창, 왕양의 사람들이다. 전체 정치국내에서, 보시라이는 이미 3사람에게 죄를 지었다. 여기에는 국무위원 멍젠주(孟建柱)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널리 정적을 만드는 것은 생존의 도가 아니다. 그의 중도실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보시라이가 충칭에 있는 근 5년간 후진타오는 충칭에 가보지 않는다. 이를 보면 후진타오의 보시라이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진타오와 정적들에게 일부러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시라이가 이런 하책을 취했을 리가 없다. 그외에 당내투쟁은 통상적으로 문을 걸어잠그고 해걸한다. 보시라이는 민중들에게 호소했고, 당내의 이견을 반공개상태로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이미 고위층의 용인한도를 넘어선 것이다. 원자바오가 전인대에서 기자회견에 답하는 말투를 보면 이미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정치이익다툼이 아니다, 정치노선다툼이다. 보시라이의 정치노선을 문혁노선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당연히, 더욱 중요한 점은 보시라이가 확실히 군대측의 일부 고위층과 긴밀히 연락했다는 점이다. 이것도 상임위원회의 주목을 끌었을 것이고, 그가 병력을 배경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2월 8일, 9일 이틀간, 보시라이는 14집단군의 주둔지인 쿤밍을 시찰간다. 이 부대는 보이보(보시라이의 부친)의 자제병이다. 게다가 이전에 후진타오가 외국순방때 청두군구의 군사열병을 진행한 바 있다. 이것은 모두 금기를 어긴 것이다. 상임위원회에 있어서, 이러한 시기에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보시라이사건이 발생한 후, 해방군보는 반달간 연속하여 9편의 군대고위층이 후진타오를 옹호하는 평론원문장 혹은 서명문장을 실었다. 이를 통하여 보시라이와의 관련은 부인했다. 그리고 '단결일치, 긴밀위요'와 같은 류는 확실히 보시라이와의 선을 긋고 후진타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이다. 보시라이가 정말 군대를 움직일 생각이 있는지 여부는 불문하고, 최소한 상임위원회는 이미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대가 마늘찧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이다. 각 성 서기들도 모두 보시라이를 배척하는 충성심을 나타낸다. 이것도 삼십년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번의 지방과 군대에서 충성을 표시한 것은 덩샤오핑 및 후야오방이 일으킨 진리표준에 대한 대토론때이다. 당시의 목표는 양개범시이다. 이 글에 대하여 충성을 표시하는 것은 덩샤오핑을 지지하고 화궈펑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충성표시는 린뱌오가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 후이다. 보시라이의 이번 사건은 앞의 두 건보다 훨씬 심각하다.
덩샤오핑은 반화궈펑이후 군대를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한다. 화궈펑은 아무런 실권도 없게 된다. 린뱌오의 비행기추락후, 그의 일당은 연약하고 힘이 없었다. 반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부친대로부터 이어온 군대의 배경이 있다. 아래로는 백성들이 성원하고 있다. 게다가 중공의 정통이데올로기로 보자면, 출신, 정치실적, 인망에서 보시라이는 하늘을 덮을 능력이 있다. 그의 세력과 성세는 화궈펑과 린뱌오를 훨씬 넘어선다. 그것이 바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하는 근원적 이유이다.
신화사의 보시라이사건에 대한 원고를 보자. 그 글에서는 보시라이부인이 살인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래서 보시라이사건은 형사사건과 관련된다. 이것은 법률, 당기 및 도덕, 인정에서, 모두 보시라이를 사지로 몰아넣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보시라이의 일당이 아무리 세력이 크더라도, 건어물을 눈뜨게 할 수는 없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보시라이사건은 중공집권 육십년래 최대의 당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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