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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신홍기(新鴻基) 곽씨형제복수기

by 중은우시 2012. 6. 6.

글: 21세기상업평론

 

 

 

5월 20일, 홍콩의 두 랜드마크 건물인 환구무역광장(環球貿易廣場)과 빅토리아항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국제금융중심(國際金融中心)은 돌연히 쏟아지는 폭우를 맞고 있었다. 건설업체인 신홍기지산의 오너인 곽병강(郭炳江), 곽병련(郭炳聯) 형제는 관상결탁의 뇌물풍파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3월 29일, 신홍기의 두 연석주석인 곽병강과 곽병련은 전 홍콩정무사사장 허사인(許仕仁)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염정공서에 체포되었다. 홍콩매체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염정공서에 곽씨형제를 고발한 사람은 아마도 그들과 집안재산을 다투던 친형인 곽병상(郭炳湘)일 것이라고 한다. 이 소식의 충격을 받아, 신홍기의 주가는 30일에 13%나 하락한다. 시가는 하루만에 382억홍콩달러가 날아간다.

 

사건발생후, 신홍기중심로비의 밖에 "홍기영고(鴻基永固)" 편액의 반대편에 수십장의 접이식 의자가 임시매체구역내에 흩어져 있다. 몇명의 기자는 이 곳과 주차장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긴 시간동안, 신홍기 본사의 로비 밖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창업자인 곽덕승(郭德勝)이 1979년에 남긴 "홍기영고"라는 4글자를 남겼다. 그러나 4년전부터, 회사고위층은 이곳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서로 다른 장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장식은 기실 기능이 서로 다른 풍수진(風水陣)이다 4년전에 곽노부인(곽씨형제의 모친인 광초경을 가리킴)은 회사가 구조조정을 거친 후, 풍수진을 펼쳐서 운을 전환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이전에 놓여진 풍수진은 주로 가화(家和)와 왕재(旺財)의 두 가지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때 은화조소진을 놓아서 재물운을 상승시킨 적이 있다." 곽씨집안을 위하여 일을 해온 견명인(甄銘茵)의 말이다.

 

그러나 ,풍수진은 곽씨형제를 더욱 화목하게 만들지 못했고, 갈등은 점점 더 공개화되었다. 일찌기 깡패 장쯔창(張子强)에게 납치당한 곽병상은 둘째 곽병강, 셋째 곽병련에게 조울증을 앓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3월 29일, 둘째동생, 셋째동생이 염정공서로 끌려가서 협조조사를 받을 때, 매체는 사전에 그 소식을 알았던 것같다. 그리고 적시에 가서 대거 사진을 찍었다. 그후 곽병상이 염정공서에 출두할 때는 특별통로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내부인사들은 보편적으로 곽병강, 곽병련이 조사를 받은 것은 곽병상과 분명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곽병상은 왕자복수기를 펼쳤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2008년, 곽씨의 장남인 곽병상은 모친과 두 동생에 의하여 신홍기의 경영진에서 쫓겨났다. 그후 2010년, 곽씨가족신탁기금은 유산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유독 곽병상의 몫이 없었다.

 

현재, 이 시가총액이 2300억홍콩달러를 넘는 홍콩의 대기업 신홍기는 조타수를 잃은 후 어느 방향으로 갈까? 앞으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보기에, 곽노부인이 다시 나서서 동사국주석의 대권을 장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전환을 위하여, 신홍기는 현재 전세계에서 직업경영인을 고르고 있다고 한다.

 

입으로는 가족을 피풍항으로 말하지만, 뒤로는 온갖 수단을 다 쓰는 언행이 불일치하는 곽씨형제에 대하여 투자자들은 이미 신뢰를 다 잃었다.

 

끌려가기 하루전인 3월 28일, '농정가서(濃情家書)' 신홍기글쓰기대회 제막식에서 신홍기 동사국 주석 곽병련은 "집과 가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 피풍항(避風港)이라고 할 수 있다. 매번 바깥에서 어떤 곤란을 겪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 활동이 끝난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그와 신홍기의 또 다른 연석주석인 둘째형 곽병강은 쌍으로 홍콩염정공서에 의하여 뇌물죄로 조사를 받는다. 자가용을 향하는 수십대의 카메라 앞에서 곽병련은 뒷자리에서 두 눈을 감고, 눈썹을 징그리고 오른 손으로 계속 코를 문질렀다.

 

동시에 염정공서에 체포된 사람은 홍콩 전정무사사장인 허사인이 있다. 염정공서의 조사는 주로 두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하나는 공직인원행위실당죄, 즉 허사인이 홍콩적금국행정총감을 맡고 있을 때 그리고 정무사 사장을 맡고 있을 때 장기간 신홍기지산이 제공한 이익과 금전을 받아왔고, 금액은 천만홍콩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사인이 신홍기지산에 토지개발관련 기밀자료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동시에, 허사인은 무상으로 신홍기 산하의 예돈산 호화주택에 입주하여 7천만홍콩달러의 무담보 신용한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일찌기 곽씨집안을 위해서 여러해동안 일했던 견명인은 이렇게 말한다. 곽씨형제가 이번에 조사받은 것은 '유심인사(有心人士)'가 장기간 준비한 결과이다. 시기도 정교하게 골랐다. 사건과 관련된 것은 모두 몇년전의 일이다. 왜 지금에서야 제보하였을까? 체포시간도 마침 양진영이 홍콩특별행정구수반에 당선된 이후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견명인이 지적한 이 '유심인사'는 바로 이미 두 동생과 여러해동안 불화인 장남 곽병상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가족은 어떤 때 곽병련의 '피풍항'이 아닌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금년 년초에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경쟁이 아직 어떻게 결론날지 모르고 있을 때, 곽병강과 곽병련은 모두 공개적으로 개인적 교분이 있는 당영년(唐英年)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큰형 곽병상은 양진영을 지지했다. 그후 양진영은 3월 25일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에 당선된다. 3월 29일, 곽,허 3명은 염정공서에 체포된다.

 

두 동생이 감옥에 갇힌 것을 보고, 큰형 곽병상은 전혀 동생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없다. 5월초 인터뷰를 받으면서 허사인은 두 동생이 데려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와는 무관하다". 그는 자신은 뇌물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한 후 이틀만에, 곽병상도 염정공서에 체포된다. 그러나 염정공서에서 여러해동안 일을 한 이위는 이렇게 말한다. 곽병상이 체포된 것은 두 동생과는 전혀 다르다. "염정공서는 곽병상을 협조조사할 때 특별통로로 들어오게 했다. 어떤 매체도 사진을 찍지 못했다. 현재 염정공서 집행처는 그가 사건과 큰 관ㄹ련이 없다고 믿는다. 그는 특별사면증인이 될 것이다. 그는 기소당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염정공서도 쉽게 대어를 낚게 될 것이다."

 

염정공서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염정공서는 이미 성공적으로 곽병상을 설득하여 이 사건의 '특별사면증인'이 되도록 하게 했다는 것이다. 곽병상은 염정공서에 두 동생이 허사인에게 보낸 이익의 핵심증거를 제공할 것이다. 염정공서는 나중에 이를 이유로 곽병상을 기소하지는 않을 것이고, 곽병상은 기소면제를 받을 것이다.

 

두 동생과 원한이 깊은 곽병상이 만일 특별사면증인이 된다면, 이는 그의 증언은 직접적으로 두 동생을 감옥에 보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도대체 무슨 깊은 원한이 있어, 곽병상은 형제의 정을 전혀 돌보지 않게 된 것일까? 얼음이 세치나 얼게 된 것은 하루이틀 추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형제간의 다툼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허사인뇌물사건은 아마도 곽병상과 곽병강, 곽병련의 수년간에 걸친 원한의 대폭발일 것이다.

 

곽병상과 두 동생이 첫번째로 원한을 맺은 것은 2008년 '정신병'으로 3개월 '휴가'후 신홍기주석의 자리를 두 동생이 대체했다는 것이다.

 

2008년 1월, 곽병련은 곽병상을 한 사교장소에서 스탠포드대학의 의사인 Dr. Jose Maldonado를 만나게 한 후, 의사는 그가 조울증을 않고 있어서, 신홍기의 주석 겸 행정총재를 맡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곽병강과 곽병련 형제는 당시 외부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이유로 곽병상의 파면을 요구한다. 형이 조울증이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곽병상의 아래에서 여려해동안 일해온 유성(劉誠)은 동의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한번 보면 바로 알 것이다. 이것은 지록위마의 모욕이다. 만일 정신병을 앓고 있다면, 이렇게 많은 부동산사업을 해올 수 있었겠는가? 곽병상이 대륙에서 사업을 협상할 때, 정부관리들과 만남을 주선하면 통상 하루에 서너차례를 만난다. 그가 이들 관리들과 만났을 때 정신병이 발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곽씨집안에서 지적한 곽병상의 정신병의 주요근거는 그가 1997년에 깡패 장쯔창에게 납치당했을 때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한 후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쯔창은 지금까지 홍콩부호들이 두려워하는 이름이다. 그는 일찌기 최고부자 리카싱의 장남 빅토르 리를 납치하여 10억홍콩달러를 받은 바 있다. "다만 빅토르 리는 곽병상보다는 운이 좋았다. 이씨집안에서는 돈을 시원스럽게 내놓았다. 빅토르 리는 납치당한 후 48시간도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곽씨집안은 납치범과 6,7일간 협상했고 금액도 10억홍콩달러에서 6억홍콩달러로 깎았다. 그리고 나서야 곽병상이 석방되었다." 유성의 말이다.

 

곽병상이 납치된 일은 곽씨집안에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 금기이다. 그저 극소수인들만이 장쯔창에게 붙잡혀 있을 때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다.

 

전화로 목소리를 변성시키고 인터뷰에 응한 내부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곽병상의 비서는 낮은 목소리로 곽씨집안이 납치에 대응한 세부상황을 얘기해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안에는 수시로 곽병강과 곽병련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비서는 아마도 곽병상에게 두 동생이 납치때 여러가지 거동을 얘기해 주었을 것이다. 곽병상은 다 들은 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얼굴색이 변했다." 그 인사의 말이다.

 

이를 보면, 곽씨형제의 마음 속에 응어리는 아마 외부에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일찍 생겼는지도 모른다.

 

유성의 토로에 따르면, 곽병상이 석방된 후, 확실히 몇년동안 매우 조심하고, 회사업무를 멀리했으며, 아무도 믿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적었으며, 많은 시간을 외부에서 그의 홍안지기로 알려진 기기대왕 당금내의 딸 당금형의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2002년이후, 당금형의 격려하에, 곽병상은 점차 납치의 그림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신홍기로 돌아와서 업무를 주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견명인에 따르면, 당시 신홍기는 홍콩의 많은 업무를 이미 두 동생에게 넘겨서 하고 있었다. 새로 업무를 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곽병상은 당금형의 건의를 받아,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대륙의 부동산시장에 투입한다.

 

곽병상은 정부와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것이 내지시장에 진입하는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일찌기 곽병상 사무실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 이매는 곽병상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말해준다. 2009년 6월, 곽병상은 사무실에서 자신과 중경시서기 보시라이가 공동으로 건배하는 사진을 매체에 싣도록 조치해서, 홍콩의 상계에 자신의 대륙에서의 영향력을 알게 하도록 말한 바 있다.

 

내지에서 한동안 운영한 후, 2003년 3월, 곽병상은 전국정협의 상임위원이 된다. 이 직위는 내지에서 사업을 확장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상임위원에 당선된 후, 그는 즉시 신홍기내부에 "내지투자액은 그룹 총투자액의 10%를 넘지 말 것"이라는 규정을 취소한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신홍기는 일선도시의 중심지역, 상해의 육가취프로젝트, 항저우 만상성, 청두 쌍류열성 및 광저우 주강신성천회광장등 대형프로젝트를 체결한다.

 

그러나, 곽병상의 내지에서의 거대한 청사진은 두 동생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신홍기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들은 이렇게 털어놓는다. "어떤 핵심 고위층은 내지의 프로젝트발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프로잭트의 토지는 다른 업체보다 비싸게 얻었다고 생각했다."

 

2007년, 곽병상은 야심만만하게 발표한다. 회사는 미래에 내지의 투자액이 총자산의 17%에서 30%로 증가시키겠다고. 그후 그가 내부투쟁에서 실패함에 따라, 신홍기는 광저우 서탑프로젝트에서 자본철수하고, 청두 프로젝트는 양도하고, 선전 구도심개조프로젝트에서도 퇴출했다. 견명인은 "비록 내지투자를 축소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것은 이전의 결정을 부정한 것이다."

 

신홍기 내부토쟁이 갈수록 복잡해짐에 따라, 곽병상은 자신의 세력을 늘이기 위하여, 당금형을 동사국에 넣고자 한다. 견명인에 따르면, 이 도화선은 두 동생으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러번 곽노부인에 광초경에게 일러바친다. 모친이 나서서 이 황당한 거동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광초경의 지지하에, 두 동생은 마침내 큰형 곽병상을 신홍기의 의사결정층에서 철저히 몰아낸다.

 

견명인은 "외부에서는 곽노부인이 두 동생에게 편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그녀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남편이 남긴 이 기업을 어떻게 지키느냐는 것이다. 곽노부인은 당금형이 동사회에 들어오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신홍기의 몇년간의 대형프로젝트추진에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2008년,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휴가를 3개월간 보낸 후, 곽병상은 신홍기를 다시 장악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법원에 임시금지령을 신청하여, 동사회에서 그의 직무집행을 정지시키는 투표를 저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법원은 곽병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신홍기최고권좌의 쟁탈전에서 곽병상은 철저히 경영진에서 쫓겨나는 것을 끝난다. 이미 79세가 된 고령의 신홍기 창업자 곽덕승의 미망인 광초경이 신홍기 주석의 자리를 차지한다. 1년반후, 차남과 삼남에게 물려준다.

 

두 동생은 공동으로 신홍기의 연석주석의 자리에 오른 후, 곽씨집안의 장남 곽병상은 '1인자'에서 '비집행동사'의 직함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사정은 곽병상이 신홍기주석에서 물러나는 것을 끝나지 않았다. 2010년 10월 4일, 신홍기의 약 42%지분을 보유한 곽씨가족신탁기금은 셋으로 나뉘어, "곽병상의 가족", "곽병강 및 그 가족" 그리고 "곽병련과 그 가족"으로 나눈다. 신홍기의 주가가 폭락하기는 했어도, 주당 가격은 89홍콩달러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10.9억주의 가족신탁기금의 시가총액은 973억홍콩달러에 달한다. 기금지분의 3분의 1만 해도 시가가 약 292억홍콩달러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곽병상은 유산승계인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여전히 유산을 얻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곽덕승의 장남인 곽병상은 292억홍콩달러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처인 이천영(李天潁)은 하루종일 곽노부인과 얘기를 나누고 손님을 맞이하여 호감을 사서 유산을 받을 수 있었다.

 

기금수익인의 권리를 박탈당한 후, 곽병상은 만회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원래 마음 속에 그늘이 있는 곽병상은 신홍기의 경영진에서 쫓겨난 후, 다시 유산계승권도 박탈당했다. 이것은 그를 분노의 곽병상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형제간에 반목하는 거동을 보인 것이니, 이해를 전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곽씨 삼형제가 연속으로 뇌물풍파에 빠진 후, 회사는 계속하여 운영이 정상적이라고 발표하고, 곽병련이 주말에 본사에서 야근을 하여 직원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지만, 자본시장의 미친듯한 주식매각을 막지는 못했다. 신홍기의 주가는 3월 19일 집행동사 진거원이 염정공서에 체포된 때의 115.8홍콩달러에서 현재 87홍콩달러로 떨어졌다. 낙폭이 25%에 이른다. 시가총액이 700여역위안 날아갔다. 매커리등 여러 대형은행은 사건결과가 분명해지기 전에는 신홍기의 주가가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씨티은행, 바클레이즈를 포함한 여러 투자은행의 연구소는 신홍기지산의 주식등급을 하락시켰다.

 

현재 투자자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태의 발전외에 이 중국계 가족기업이 경영진을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는 것이다. 특히 주석을 누가 맡느냐는 것이다.

 

두 동생이 조사를 받은 후, 곽병상은 자주 신홍기 본사로 돌아가서 일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은 회사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외부에서는 한 때, '왕자'가 돌아올 날이 멀지 않았다고 예측한 바도 있다. 그러나 유성에 다르면, 광초경은 일찌감치 2008년에 곽병상을 물러나게 했을 대 그는 더 이상 주석에 적합하지 않다고 암시한 바 있다고 한다. "주석의 자리를 생각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다 얘기해볼 수 있다."

 

현재, 홍콩의 업계에서는 보편적으로 곽병상이 신홍기의 중심권력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 그 본인도 사건에 연루되었을 뿐아니라, 2008년 두 동생과 결렬한 후, 곽시가종은 이미 곽병상이 핵심위치로 돌아오는 것을 불허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유성은 곽병상은 이미 회사를 떠난지 오래 되었고, 현재 신홍기의 많은 간부들은 두 동생의 심복이다. 게다가 광초경이 저지하므로, 그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본다.

 

그러나 곽씨집안이 홍콩보석상 사서린 부자가 조사를 받은 후 며느리가 회사를 장악한 경우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본다. "곽노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훈을 남겼다. 자신의 처를 제외하고, 신홍기 주석의 자리는 반드시 곽씨사람이 맡아야 한다. 영원히 외성인의 손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곽씨는 너무나 많은 인랑입실(引狼入室)이 있었고, 일찌감치 초목개병이다."

 

제3대 손자대에서 주석을 맡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견명인은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곽씨집안의 제3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이가 모두 너무 젊다. 도저히 맡을 만하지 못하다. 신홍기라는 이런 큰 사업을 대표성이 없는 인물이 맡아서는 끌고갈 수가 없다."

 

견명인이 보기에, 현재 유일한 선택은 광초경이 4년전처럼, 다시 신홍기 주석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 가족기업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그리고 가족신탁기금의 통제자이다. 현재 더 좋은 선택은 없다."

 

얼마전 곽노부인은 신홍기 본사로 가서 인심을 다독거린 바 있다. 신홍기의 여러 고관들과 만나서, 비빌리에 훈화하고 격려했다.

 

골드만 삭스의 대유는 견명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동시에 곽씨집안에서 현재 세계적인 범위에서 덕망있는 직업경영인을 고르고 있다고 말한다. 동사국에 새로운 혈액을 주입시키고,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내부투쟁은 가족기업의 통병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염정공서까지 갔다. 투자자들은 일찌감치 손에 들고 있는 주식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명망있는 사람을 앉히지 않는다면, 아무도 신홍기주식을 사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곽영동 가족형제는 집안재산을 다투기 위하여 소송으로 갔다. 나중에 신홍기 곽씨형제는 염정공서로 갔다. 홍콩마카오의 부호가문의 재산다툼은 이미 통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형제상잔을 포기하고, 신홍기의 경영을 제도화하는 것만이 곽덕승이 예전에 생각했던 "홍기영고"의 바람을 이룰 수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