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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경제대국 송나라는 왜 사방이 적국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정만군(程萬軍)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양식 - 쌀 -을 가지고 있고, 가장 좋은 음료 -차-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좋은 의류 - 면, 비단, 가죽-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한푼의 물건도 구매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영국인 허드가 <중국견문록>에서 기록한 것이다. 만일 시간배경을 보지 않는다면,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분명 번영한 대국의 아름다운 화폭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비참한 세계였다. 그가 말하는 것은 거의 죽어가는 만청(晩淸)이었기 때문이다.

 

백여년전, 여기저기서 당하는 청나라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죽기 직전이지만, 그는 여전히 '중화의 물력'에서는 여전히 '여지'가 있었다. 청나라가 죽어서 땅속에 묻힌 1911년, 경제총량은 여전히 세계3강에 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청나라는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 병들어 죽은 것이다.

 

세계최고부자이면서 마음껏 유린당하고, 허리에 만관의 돈을 차고 있으면서도 약한 타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중원경제대국의 실상이다.

 

세계최고부자인 중원대국을 얘기하자면, 먼저 백년전의 청나라는 해당사항이 없다. 더 멀리 천년전의 송나라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는 이런 내용이 떠돌고 있다: 송나라의 경제가 가장 번성했을 때 세계경제총량의 80%를 차지했다. 중국은 세계15%도 되지 않는 인구로 80%의 경제총량이라는 기적을 창조한 것이다. 북송의 도성 동경(개봉)은 '당시 세계최대의 도시'였다. 총인구가 200만을 넘었다.

 

이들 수치가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만일 상술한 경제총량기록이 사실이라면 아니, 그중 절반이라도 사실이라면, 그 중원국가는 세계제일경제대국이라는 칭호를 붙일 만하다. 중국의 동경(개봉)이 세계최대도시라는 설에 대하여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방증을 제공했다. 일본수도는 원래 경도였다. 에도시대에 동경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에도를 '동경'으로 개명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송나라의 수도 '동경'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중국개봉이 중세기 '세계도성'이라고 할 만하다.

 

GDP가 억냥이 넘는 경제대국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GDP가 수십만냥인 '야만부락'에게는 '천상인간'이다. 이치대로라면, 이런 경제문화대국은 당나라를 넘어서서, "팔방내하(八方來賀)"(사방팔방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다)해야 한다.

그러나, 송나라의 국제지위는 엉망이었다. "팔방내하"가 아니라, "팔국내공(八國來攻)"이었다. 경제대국은 3개의 적국에 포위되었다. 서쪽의 당항, 북쪽의 거란, 동쪽의 여진. 이 삼국은 송나라와 비교하자면 아주 가난하고 아주 작았다. 그러나 감히 송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세상이 모두 아는 것처럼, 북송은 '금전외교'를 숭상했다. 중원왕조중 "가장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 왕조'이다. 이렇게 하면 도처에 선물을 보내는 대국이 왜 '친구나라'들을 만들지 못하고, 사면초가의 상태가 되었을까?

많은 사학애호가들은 북송이 감히 적을 만들지 못한 원인은 경제는 발달하였지만, 군사는 취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숭문억무'의 국책이 군대전투력을 약화시켰다. '숭문억무'의 실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기실, 한 국가의 군대전투력이 어떠한가는 군대의 인원수, 무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기능으로 결정된다. '숭문억무'의 실질은 '중안내경양외(重安內輕攘外)'(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을 중시하고, 대외의 적을 물리치는 것을 경시한다). 백성을 겁주고,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을 주기능으로 하는 군대가 어찌 호랑이 늑대와 같은 병사들의 적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송나라황제는 어떻게 침략자를 대하였는가? 그들은 자신의 계산이 있었다. 적은 돈을 들여서 큰 일을 해낸다. 금전을 주고 평화를 얻는다. '동생' 거란에 대하여 승리를 취득한 상황하에서, 송진종은 통쾌하게 매년 10만냥의 세폐은을 주기로 한다. 즉 10만냥의 세폐은은 기본적으로 송나라의 재정수입의 1%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확실히 '적은 댓가'를 치른 것이다.

 

그러나, 계속 돈으로 계산한 송나라 황제들은 치명적인 유감을 남겼다. 정신이 허약해진 것이다. 경제손실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손실은 컸다. 그들의 금전외교는 주변의 인근국가에 정신이 약하다는 신호를 주었다. 누구든지 와서 치기만 하면, 네가 이기든 지든, 결국 나는 '돈을 주고' 친구로 사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변국가에 있어서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손해보지 않는 장사였던 셈이다. 왜 하지 않겠는가?

 

돈계산만 할 줄알았지, 정신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양송시대의 중국에는 민족정신의 단층이 나타난다. 진,한이래의 "강한 한나라를 건드리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한다."는 오리지날 '한혼(漢魂)'이 소멸한 것이다. 도처에 돈을 주지만, 주변의 소국들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송나라때부터, 나라는 부유하나 백성은 가난하고 싸울줄 모른다는 것이 외국의 중국에 대한 인상이다. 그들이 계속하여 중국을 건드리는 중요한 원인이다. 나중에 일의대수의 일본이 굴기한 후 러시아를 공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가장 공격하기 좋아한 것은 중국이었다. 왜 그런가? 바로 중국은 몸이 약하고 병이 많은 부농이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돈을 마구 보내도 돈이 부족하지 않기 대문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비록 이겼지만,물질적으로 별로 이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은 계속 중국에 전쟁을 일으킨다. 청나라에 대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중화민국에 전면전을 일으킨다. 목적의 하나는 바로 중국에 전승하여 일거에 '세계적 졸부'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