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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홍장)

이홍장과 찹수이(Chop suey)

by 중은우시 2012. 3. 31.

글: 설이(雪珥)

 

 

 

로스앤젤레스에 밤의 장막이 내려왔다.

청결한 리틀도쿄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황혼중에 높이 걸린 글씨가 보인다: Chop Suey

미국전역을 풍미했던 이 이름은 미국 병사들이 전세계로 퍼트렸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서. 이 단어는 기실 광동어인 "잡쇄(雜碎)"를 영어로 부른 말이다. 미국인들이 중국의 정통음식이라고 여기고 중국인들은 그다지 먹지 않는 "중국요리"이다. 필자는 이전에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등지의 차이나타운에서 "찹수이"의 종적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거주지에서 그 흔적을 찾은 것이다.

 

찹수이의 기원은 이홍장의 방미와 관련있다고들 말해진다. 이 점에 관하여 가장 권위있는 견해는 양계초의 것이다. 그는 1903년 <신대륙여행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찹수이관은 이합비(李合肥, 즉 이홍장. 합비출신이어서 이합비라고 부름)가 미국을 방문한 후에 발생했다. 이전까지는 서양인들이 차이나타운에 오지를 않았는데, 이홍장이 미국에 와서 한번 방문한 후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서양인들중 호사가들은 중국인의 생활정도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시아까지 갈 수는없으니, 뉴욕 차이나타운을 한번 가보는 것이다. 이홍장은 미국에 있을 때 중국음식이 생각났고, 차이나타운의 술과 음식을 몇번 가져다 먹었다. 서양인들이 그 이름을 물어봤는데, 중국인들이 그 당시에 제대로 답하기 힘들어 통틀어서, "잡쇄"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찹수이'의 이름은 크게 떨치게 되었다.  뉴욕에만도 "찹수이'점은 삼사백개가 있고, 전체 도시에 퍼져 있다. 전체 미국의 중국인들 중에서 찹수이로 먹고 사는 사람도 삼천여명에 이른다. 매넌 이 업소를 찾는 사람은 수백만이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양계초의 글은 사실 신뢰하기 힘들다. 당시 미국매체는 이홍장에 대하여 거의 파파라치 수준으로 따라다녔다. 이홍장은 고급요리사를 대동하고 다녔고, 모든 요리도구, 쌀, 재료등을 모두 가지고 가서, 이홍장은 연회에 자신이 청한 것이든 요청을 받아 간 것이든, 이홍장의 전용요리사가 해주는 것만 먹었다. 일반 여행객처럼 중국음식이 생각나서 차이나타운의 요리를 몇번 가져다 먹었을 리가 없다. 당시의 신문을 다 뒤져보아도, 이홍장이 '찹수이'를 먹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많은 중영문의 야사에서 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홍장이 뉴욕에서 찹수이를 먹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에서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홍장은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에는 가본 적도 없다.

 

몇십년후인 1924년 11월 9일자 Los Angeles Time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찹수이의 기원이 이홍장이 세계여행했을 때라는 것은 뉴욕에서 거행된 한 만찬때 나온 요리였다. 이홍장은 자신의 요리사를 데리고 다녔는데, 요리는 완전히 중국식이었다. 그중 한 요리를 한 손님의 부인이 특히 좋아했다. 그녀는 이홍장에게 무슨 요리인지를 물었다. 이홍장은 요리사를 불러서 물어보았고, 요리사는 그것은 그 자신이 발명한 것으로 '잡쇄'라고 한다고 했다. 그 뜻은 혼합요리라는 것이다. 이홍장은 영어로 그 부인에게 이 요리는 '찹수이'라고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미국부인이 '찹수이'라는 맛있는 요리가 있다고 전하게 된 것이다."

 

1937년 4월 21일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서는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버전에서 찹수이는 기실 이홍장이 사람을 욕한 말이라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찹수이는 전세계에서 인정된 전형적인 중국요리이다. 중국만 제외하고. 그것은 기실 중국과 관계가 전혀 없다. 이 이야기는 이홍장이 한 것이다. 한번은 연회에서 미국기자가 지금 먹는 요리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는 화가나서 '잡쇄'라고 한 것이다. 요리의 이름이 이렇게 정해진 것이다."

 

중국인들이 광산에서 미국의 각 도시로 이주하면서 그들의 질낮은 '현장음식'이 각지에서 나타나게 된다.

 

양게초가 한 말 중에 한 가지는 맞았다: 찹수이의 유행은 확실히 서양인들의 영웅성과 호기심을 숭배하는데서 나왔다. 그리고 식당을 연 중국이민자들은 이홍장이라는 광고모델을 잘 이용해서 마케팅활동을 벌였다. 근거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나중에는 역사가 되었다. 이것은 뉴욕의 News of the World에서 이홍장을 내세워 광고한 것과 같다. 그들은 이홍장이 매일 그들의 신문을 읽는다고 하였다.

 

골드러시시대에 고증할 수없는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자주 언급된다. 1860년대에 캘리포니아의 몇몇 백인광부들이 밤에 식당을 찾았는데, 마침 중국인이 연 식당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 식당의 중국인주인은 백인손님을 맞이하는 게 처음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요리이 원료도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점포내의 모든 야채를 모아서 한꺼번에 볶았고, 광부들에게 내놓는다. 그런데 광부들이 아주 좋아하며 요리이름을 물었다. 식당주인은 "잡쇄"라고 대답한다.

 

이 이야기는 '이홍장찹수이'와 마찬가지로 믿을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시간, 장소는 더욱 근접했다.

 

가장 믿을만한 추측은 골드러시시대와 대철도시대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중국노동자들이 열악한 공사현장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재료를 모두 모아서 칼질한후 간단하게 한 솥에 넣고 끓여먹었다. 그후 미국의 배화운동이 만연하면서 많은 업종에서 중국노동자를 쓰지 않았다. 중국노동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세탁과 음식점이었다. 중국인들이 광산에서 미국 각 도시로 퍼져가면서 그들의 간단한 현장음식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일찌기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12년전에(1884년), 최초의 중국계기자 황청복이 브루클린이글지에 영문으로 중국요리를 소개하면서, "찹수이는 중국의 국채(國菜)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이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4년후 황청복은 다시 메트로폴리탄 잡지에 영문으로 <뉴욕의 중국인>이라는 글을 발표하는데, "중국인이 가장 자주 먹는 요리는 찹수이이다. 이것은 닭의 간, 닭의 위, 버섯, 죽순, 돼지창자, 콩나물등을 한꺼번에 섞어서 향료를 넣고 삶은 요리이다. 탕즙은 쌀밥에 넣고 다시 장과 기름을 넣으면 사람들이 쌀밥을 먹을 때 가장 좋아하는 맛있는 소스가 된다." 이것이 아마도 찹수이의 세부적인 사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같은 해, Current Literature잡지 10월호에 찹수이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찹수이는 중국인의 일종의 주식이다. 닭의 간, 닭의 위, 버섯류, 죽순, 돼지내장, 콩나물등을 끓여서 만든다." 이 저의는 101년후(1989년) 옥스포드영문사전에 인용된다.

 

이홍장이 방미하는 해에 뉴욕 현지의 Frank Leslie's Illustrated는 이렇게 찹수이의 매력을 소개했다: "찹수이의 매력적인 맛을 본 미국인은 중국인에 대한 시비를 즉시 잊어버린다, 돌연, 일종의 항거할 수 없는 유횩이 솟아오르고, 그의 의지를 꺽어버린다. 자석처럼 그의 발걸음은 Mott Street(차이나타운의 거리)로 향한다" 이 말은 지금 뉴욕의 미국화인박물관(MOCA)에 높이 걸려 있다.

 

비록 찹수이의 초기역사는 각종 거짓으로 가득차 있지만, 이런 허상의 배후에는 기본적인 사실이 있다: 이 "중국인이 먹은 적이 없는 중국요리"는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미국에서 유행했다.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하며 중국붐이 일어났을 때, 차이나타운의 요리사들은 기회를 잡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마침내 양계초가 말한 것처럼 찹수이의 명성이 크게 퍼졌다.

 

양계초가 봤던 찹수이업계이 성황은 아직 전성기가 아니었다.

 

찹수이는 사실상 미국에서 탄생한 중국요리이다. 이는 신속히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된다. 주류사회는 그 지위를 계속하여 상승시켰다.

 

1900년 1월 29일 뉴욕타임즈는 "전체 시의 중국음식점이 폭증하는 것으로 보면, 이 도시는 이미 찹수이에 미쳤다." 1901년 11월 3일 뉴욕타임즈는 주중 샤먼부영사를 지낸 피얼스의 글을 실어 찹수이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소개한다. 피얼스는 "뉴욕인의 중국요리에 대한 흥미가 점점 강해진다. 중국음식점은 전체 도시로 퍼져가고, 모든 음식점에 손님이 가득하다. 특히 밤에는 그렇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요리는 찹수이이다."

 

이때부터 찹수이는 대중매체에서 환영받는 것이 된다. 찹수이점은 차이나타운에서 현지의 고급지역으로 들어가고 환영을 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1904년, 한 미국출생의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샌프란시스코의 중국계 램 선이 법원에 소장을 제기한다. 그는 이홍장이 방미한 기간동안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 요리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찹수이의 특허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법원에서 모든 중국음식점에 허가없이는 찹수이를 요리하거나 판매해서는 안된다는 명을 내려달라고 했다.

 

찹수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주류사회로 퍼진다. 화가인 에드워드 후버는 1929년 유화 <찹수이>를 그린다. 찹수이가 이미 상류사회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차이나타운의 상징이 아니라.

 

이때의 미국인은 이미 중국본토에는 기실 찹수이라는 이 중국요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24년 3월 25일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기자가 광주에서 보고 들은 것을 보도했다. 그는 놀랍게도 중국에서는 유명한 찹수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에는 이런 요리가 없었던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에서는 정종의 중국요리로 대중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있다." 이 보도의 제목은 이렇다: "중국에는 많은 중국의 것들이 있다. 그러나 찹수이는 없다."

 

1940년대, 찹수이는 미군의 요리목록인 <미국군대요리식단>에 들어간다. 그후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그가 소령으로 있을 때, 찹수이의 충실한 팬이었다. 찹수이는 이로 인하여 백악관에까지 들어간다.

 

찹수이는 비록 이홍장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확실히 그의 명성에 의존해서, 이 미국산 중국요리의 마케팅속도를 빠르게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양계초가 "이홍장의 공덕으로 광동백성에게는 이것이 가장 크다"라고 하는 것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홍장의 방미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배화'법안을 폐지하거나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를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명을 완수하는데 실패한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찹수이라는 작은 경제를 형성시킨다.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의 경제상황을 개선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