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인터넷

VALCL(凡客, 판커)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중은우시 2012. 2. 27. 15:14

글: 남방주말

 

 

 

4년의 고속성장기를 거쳐, 판커(凡客, VANCL)라는 평지에서 돌출한 인터넷의류브랜드는 두 가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하나는 계속하여 달려가야 하고 계속하여 규모를 확장해야 하며, 다른 하나는 확장은 높은 비용과 관리상의 난제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판커가 어떻게 자신의 기존 장점을 살려나갈 수 있을까가 사람들이 주목하는 촛점이 되었다.

 

대량감원, 일부경영진의 이직, 상장실패, 결손이 심각하다는 소문....

 

4살된 판커에 있어서, 2011년 하반기에는 거의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었다. 회사창업자인 43세의 CEO 천녠(陳年)은 최근까지도 매체와의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그를 둘러싼 의문과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산시(山西)사람인 천녠은 일찌기 <중국도서상보>의 서평주간편집을 지냈다. 2000년, 인터넷버블이 꺼질 때, 그는 오히려 레이쥔(雷軍)과 함게 인터넷서점인 줘웨왕(卓越網)을 만들고, 이 웹사이트의 집행부총재가 된다. 줘웨왕을 사직하고 사이버상품거래사이트인 워여우왕(我有網)을 창업했다가 실패한 후, 2007년 10월에 이 의류이비지니스웹사이트인 판커를 만들었다.

 

4년동안, 판커는 고속성장의 기적을 창조한다. 판커의 경영진이 제공한 데이타에 따르면 2008년도 세후수입은 1.1억위안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1년에 이르러 세후수입은 33억위안에 이른다. 다른 인터넷쇼핑몰과 구분되는 것은 천녠이 판커에 '인민패션'이라는 이미지를 주입해서, 누구나 다아는 인터넷의류브랜드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역사의 기회가 왔다. 당신이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당신은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2012년 2월 4일, 천녠은 판커본사의 넓은 사무실에서 남방주말의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판커 본사는 북경시 동삼환 쐉징차오(雙井橋)의 곁에 있는 웨청(樂成)빌딩에 위치하며, 그중 4개층이 공간을 차지한다. 천녠 혼자서 1층의 1/7을 차지한다. 벽의 하나 반은 그의 책으로 가득 차있다.

 

천녠의 해명은 메이탄왕(美團網)의 CEO인 왕싱(王興)의 견해와 유사하다. "전통업종의 창업은 등산과 같다. 인터넷창업은 윈드서핑과 같다. 네가 하나의 파도를 올라타서 버티면, 그 높이가 바로 너의 높이를 결정한다." 왕싱은 일찌기 샤오네이왕(校內網), 판퍼우왕(飯否網), 하이네이왕(海內網)등을 창업한 바 있다. 그러나 여러번의 창업에서 모두 버텨내지를 못했고,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천녠이 판커의 고속성장기세를 버텨낼 수 있을지가 현재는 의문이다. 비록 천녠이 상림수(祥林嫂)와 같이 계속 그런 의문의 목소리에 반박하고 있지만,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판커는 확실히 반성할 때가 되었다.

 

판커의 굴기는 이비지니스 붐이 일어난 것의 덕을 본 이외에 선구자인 PPG회사에도 감사해야 한다. 2005년, PPG는 '가벼운 회사'의 모델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신속하게 인터넷의류회사로 급성장한다. 사람들은 그를 '의류업계의 Dell'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남성복만을 했고, 거의 모두 외주를 주었다. 공장, 설비, 점포는 전혀 없었고, 마케팅부, 설계부, 콜센터 및 창고만 있었다.

 

그는 온 세상에 깔린 인터넷광고와 전통광고로 소비자의 이목을 끌었다. 비록 성장속도는 놀랄만했지만, 미래의 큰 우환을 남긴다. 2007년이후, 이 회사는 공급상의 돈을 지급하지 못하여 결국 도산한다. 이 해에 판커가 탄생한다.

 

천녠이 판커를 창업할 때, 최초에는 전화판매로 남성용 와이셔츠를 파는 PPG를 모방했다. 광고투입전략도 PPG와 다를 바 없었다. 2008년 2월이전, 판커의 시장마케팅은 평면매체위주였다. 2008년에서 2009년의 이년간, 판커가 투입한 광고액은 판매액에서 60%의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행운이었던 점은 판커가 2008년 3월부터 인터넷마케팅을 시험해본 것이다. 주문은 급속히 늘었다. 그때 인터넷광고의 효과를 회사들은 좋게 보지 않고 있었고 가격이 아주 쌌다. 포탈사이트는 심지어 무료로 일부광고를 보내주기도 했다. 판커는 인터넷마케팅의 단맛을 보았다. 그리하여 신속히 전화판매모델을 버리고, 인터넷브랜드로 전환한다. 이로 인하여 판커는 PPG처럼 전통매체를 통해서 계속 발전하지 못한 전철을 피할 수 있었다. 판커와 마찬가지로, 마이카오린(麥考林), 멍바사(夢芭莎)등 인터넷의류브랜드도 인터넷광고를 이용하여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외에 판커는 2007년 10월에 최초의 자금조달을 시작한다. 그후 2011년말까지 모두 6차례의 자금모집을 한다. 총자금조달그액은 4억달러(인민폐 약 24억위안)에 달한다. 익명을 요구한 인터넷쇼핑몰의 한 부총재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보면 천녠의 총명함을 알 수 있다. 판커는 자금조달횟수가 많은데, 이는 아마도 정교한 가격산정기교를 부린 것일 것이다. 여러차례의 자금조달로 프리미엄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천녠의 뛰어난 점은 그가 브랜드를 수립하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10년 5월, 판커는 일부 도로광고를 사서, 한한(韓寒)과 왕뤄단(王珞丹)을 모델로 한 판커광고를 준비한다. 그러나, 천녠은 도로광고의 화면에 공백이 넓은 것을 보고는 거기에 고객의 TV각본의 자막을 집어넣었다. 그후 한한과 왕뤄단의 팬들은 이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판커체(凡客體)로 승화시킨다.

 

인터넷에서 인기를 뜬 판커체는 판커를 다시금 정의하게 한다. 판커의 브랜드포지셔닝에 대하여 천녠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세 가지를 강조했다. 무한패션, 높은 성능가격대비효과 그리고 최고의 서비스. 나머지는 고객에게 돌려준다.

 

이제 판커는 스스로 인터넷의류브랜드를 만드는 독특한 길을 걸어나왔다. 이비지니스의 선두기업의 대표인 징동(京東)상성이 걸어온 길은 플랫폼형 이비지니스모델이다. 3C제품에서 먹고 입고 쓰고 움직이는 것에 관련된 모든 상품을 취급한다. 징동의 영리모델은 자신이 공급상으로부터 상품을 구매하여, 인터넷에서 가격을 덧붙여 소비자들에게 팔아서 차액을 남기는 것이다. 이것은 당당왕, 러타오왕등 이비지니스가 걸어왔던 길이다.

 

그러나, 천녠이 고심해서 만든 이 브랜드는 프리미엄효과를 나타내기 힘들다. 그러나 천녠은 생각한다. 브랜드프리미엄은 아마도 중국전통브랜드가 걸어왔던 길이다. 이유는 GAP, ZARA, H&M 및 Uniclo등 국외의류대기업은 모두 평민화의 노선을 걸어왔다. 국내에서 돈을 조금만 벌면 고급노선을 걸은 브랜드는 모두 실패했다.

 

이에 대하여, 또 다른 이비지니스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단가를 끌어올리는 규율을 벗어날 수 없다. 소매에서 최고의 목표는 프리미엄비율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브랜드업체인 바이리(百麗)의 신발판매가격은 일반적으로 원가에 5를 곱한다. 그가 보기에, 천녠은 이 굴레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이는 업계의 규칙에 어긋나게 일을 하는 것이다.

 

판커가 비록 자체브랜드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다른 이비지니스와 마찬가지로, 급속한 발전의 숙명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마지막에 승리하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계속하여 비용을 투입하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규모에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을 높은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

 

천녠은 이런 말을 했다. 그가 현재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신규고객의 증가와 2차구매율이다. 그가 보기에, 이 두개의 수치는 회사가 건강한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전제이다. 그는 PPG가 당초 실패한 주요원인은 바로 충분한 고객량과 성장속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모를 확장하기 위하여, 많은 이비지니스모델이 모방하는 것은 아마존모델이다. 단일제품에서 다르지 않은 것이 없는 백화점으로....그리고 제3자플랫폼도 제공하고, 다른 업체가 자신의 플랫폼에서 자신과 경쟁하도록 허용한다. 동시에 물류배송과 창고 및 후방정보플랫폼에도 투입하여 고객체험과 커버리지를 확대한다.

 

판커도 이러했다. 2010년 5월, 판커는 취급상품류를 크게 확장한다. 남녀의류, 신발, 가정방직품에서 심지어 화장품, 전자밥솥, 대걸레까지 취급한다. 품목황장은 자연히 판매규모를 늘였다. 그러나, 미판매상품의 재고비용도 증가시킨다. T셔츠와 운동화는 판커가 가장 많이 파는 상품이다. 그러나, 전기밥솥과 대걸레는 사는 사람이 드물다.

 

그달에 판커는 V+채널을 시작한다. 플랫폼을 만들어 제3의 협력업체를 끌어들였고, 백화상품을 팔기 시작한다. 경쟁의 창끝은 직접적으로 징동과 당당을 향한다.

그러나, V+는 예견한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1년여동안 5억위안가량의 규모를 나타냈다. 판커이 총판매수입의 10%가량에 불과하다. 원인은 소비자들은 판커자체브랜드의 저가에 익숙해져 있는데, 판커의 V+에 들어간 후, V+제품의 높은 가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릭수를 판매로 전환시키는 비율이 높지 않았다.

 

또한, 공급상들은 판커와의 합작에 우려가 있었다. 인터넷신발판매업체인 러타오는 판커의 V+와 협력을 협상한 바 있다. 판커는 러타오의 신발이 판커의 창고로 들어오도록 요구한다. 러타오는 이에 응할 수가 없었다. 러타오가 판매하는 것은 공급상이 러타오의 창고에서 판매하는 것이고, 러타오는 거기에서 커미션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품이 러타오의 창고에 있으면 십일 반달이면 한 사이클이 돈다. 그러나 판커의 창고에 넣어두면 판커의 처리속도는 빠르지가 못하다. 배송에 판커의 자체브랜드를 붙여야 한다. 한 사이클을 도는데 한달이 걸린다. 고객들이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판커가 자체로 만든 펑다(風達)물류회사는 제3자로부터 돈을 벌어들일만큼 충분한 잉여능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펑다의 총경리인 리홍이(李紅義)가 말했듯이, 앞으로 펑다를 개방할 수 있다. 그러나, 펑다가 현재 받아들이는 일부 외부주문은 관계회사의 주문들이다. 예를 들면, 샤오미(小米) 핸드폰과 같은 것이다.

 

아마존은 초기에 거액을 투자하여 물류와 클라우드컴퓨팅센터를 건설했다. 현재는 이미 중요한 이윤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판커에 있어서 이것을 이루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판커의 골치거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자비지니스의 격렬한 경쟁으로 인터넷광고료가 계속하여 인상되었다. 이는 판커의 비용을 계속 증가시킨다. 한 이비지니즈업계의 인사에 따르면, 2011년 인터넷광고가격은 2010년보다 50%나 올랐다.

 

그러나 천녠은 이렇게 말한다. 광고가격이 50%나 올랐다믄 것은 360등 소수의 몇 개회사의 경우이다. 판커의 광고투입액이 판매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몇년간 계속 하락했다. 2009년의 60%에서, 2011년에는 20%로 줄었다. 그는 2012년에는 이 비중을 계속 줄여서 10%정도로 낮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는 해도, 판커는 여전히 종합비용이 높은 기업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판커의 장쑤 난통에 있는 공급상인 스지랴오위안회사에 다르면 판커의 총이윤은 최소한 20%이상이다. 예를 들어, 판커가 99위안짜리 의류를 판매하면 스지랴오위안의 구매가격은 76위안가량이라는 말이다.

 

한 이비지니스업계의 인사에 따르면, 판커의 총이윤은 아주 높다. 그러나, 판커는 30일 무조건반품을 시행한다. 반품으로 인한 물류, 손실비용이 다른 어느 이비지니스회사보다 높다. 여기에 펑다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고집하고 있다. 판커의 총물류비용을 계산해보면 총수입에서 20%가량을 차지한다. 행정비용이 8-10%이고, 시장비용이 20-30%이다. 이 몇 가지를 합치면 이미 50%가량이 된다. 그래서, 판커는 분명히 손실이다. 그리고 판커의 규모가 커질수록, 결손도 커질 것이다. 당연히 규모의 확대로 물류비용과 시장비용은 하락할 것이다. 판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이에 달렸다.

 

판커는 2010년부터 품목확장을 한 후, 직원수가 최초 창업시의 100여명에서 1만명가량으로 늘었다. 천녠이 처음에 본 수치는 2011년 1월, 판커의 성장이 2010년 동기대비 6배였다. 이는 그로 하여금 2011년의 한해동안 100억위안의 판매액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천녠은 권한을 이양하기 시작한다. 20여세의 직원이 현재 억위안이상의 매출액을 관리한다. 이것은 판커 2008년도 전체 매출액에 해당한다. 그러나, 2011년 6월이 되자, 천녠은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직원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은 아예 한 곳에 모여서 한담을 나눈다. 일부 직원은 출근시간에 땡띵이를 친다. 그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래서 회사내에서 시험을 해본다. 그 결과: 고위층은 마음이 붕 떠있고, 아래 직원들은 교만하고 부패했다.

 

7월이 되자, 판커는 감원을 시작한다. 시용기의 직원은 대량으로 내보내진다. 그 달에, 판커는 지나치게 많은 품목에 대하여 분석을 하고, 잘 안되는 품목을 없애버린다. 동시에, 천녠은 조직구조에 수술을 시작한다. 이전에 판커는 두개의 제품사업부가 ㅇㅆ었다. 현재는 8개 사업부로 갈라놓는다. 5대사업부 이외에 3개의 생산센터를 둔다.

 

이 다섯 개의 사업부의 설립아이디어는 주로 품목에 따른 것이다. 과거 판커의 제품, 프로모션, 마케팅 및 브랜드를 완전히 나누었다. 5개사업부를 만들고 난 후 모든 사업부는 제품, 마케팅 프로모션의 모든 직능을 관장한다. 이전에, 규모가 커진 후, 판커는 전통의류업으 색채가 갈수록 강해졌다. 생산부서가 주도자가 되고, 대걸레, 손톱깍기와 같이 성공하지 못한 제품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현재 판커의  생산센터는 3가지이다. 하나는 의류, 하나는 신발모자, 하나는 기타 잡화류이다.

 

사업부의 권한은 제품기획에서 마케팅까지 모두 관통한다. 그리고 재고에 대하여 책임진다. 과거에는 제품은 제품만 책임지고, 마케팅은 마케팅만 책임졌다. 제품부서에서 제품을 내놓으면, 마케팅부서는 마땅찮아 했다. 제품부서는 매일 마케팅부서가 사진도 하나 제대로 못찍는다고 불평했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했다.

 

앞으로 판커는 더욱 많은 사업부로 세분화할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은 관리자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녠은 직업경영자를 영입할 계획은 없다고 한다. "회사가 커져도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팀의 학습능력과 시정능력이다."

 

그러나, 이 팀이 불안정하다. 2011년 하반기, 판커의 경영진중에는 이직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부총재 우성(吳聲)은 징동상성으로 가버렸고, PR담당부장인 리젠슝(李劍雄)은 쉐얼쓰(學而思)로 가버렸다. 천녠에 있어서, 어떻게 사람을 붙잡느냐도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다.

 

감원과 경영진이직의 풍파가 나오기 전에 천녠은 경영진에게 주식매수권을 부여하지 않았었다. 판커의 현재 경영진중 1/3은 옛 줘웨왕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감정으로 붙잡아둘 수 있다. 그러나 판커에는 80년대생의 젊은 관리직들이 많다. 이들 젊은이들에게 판커에서 돈을 벌 수 없다면 붙잡아두기 힘들 것이다.

 

2012년 2월, 천녠은 고민끝에, 판커의 전체전략에 대하여 새로운 기획을 한다. 그는 판커의 조정은 어느 쪽을 줄이고 어느 쪽을 늘일 것인지는 모조리 데이타센터를 보고 말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미래에 판커의 제품, 고객이후 가장 핵심적인 회사경쟁력이 될 것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한다. 기실 이것은 일찌감치 아마존이 성공한 비결중 하나이다.아마존의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데이타에 기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