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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사기(史記)는 진실한 역사가 아니다.

by 중은우시 2011. 7. 25.

 

 

: 진경원(陳景元)

 

진용관(秦俑館)에 있는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며 한 마디로 보증을 한다. 여산(驪山) 북록(北麓)지역에서 발굴된 것은 모두 진시황릉과 관련있는 배장묘(陪葬墓), 배장갱(陪葬坑)이라고. 그리고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한 것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은 생전에 72만명을 동원하여, 38년의 시간과 전국의 1/3의 자금을 들여서, 자신의 능묘를 미리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진실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만일 사마천이 <사기>에 적은 한마디 한글자가 모두 진실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정확한 것이고 부정하거나 번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그 말만 믿으면 된다. 더 이상 다툴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정확하고 믿을만한 자료를 가지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중 비과학적이고 부정확한 사실을 증명한다면, 아마도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기록은 위대하고, 신성한 저작이므로 거기에 대하여 의문만 제기해도 그들은 즉시 주먹을 들고 일어나 분개한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사기>에는 잘못된 곳이 아주 많다. 그리고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기. 고조본기>에는 유온(유방의 모친)이 대택의 언덕에서 쉬고 있을 때, 꿈에 신과 만났다. 그때 번개와 천둥이 쳤다. 태공(유방의 부친)이 바라보니, 교룡이 그녀의 위에 있었다. 그후 임신하여, 고조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의미는 한고조 유방은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 모친이 용의 씨를 받아서 임신했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괴이소설인가 아니면 진실한 역사인가? 중국역사상 정말로 처럼 사람을 임신시킬 수 있는 생물이 나타난 적이 있단 말인가? 한나라때의 왕충은 <논형>에서 이에 대하여 심하게 비난을 가한다. 그는 말했다: “고조의 모친이 회임할 때, 뇌룡을 만나서 비구름을 싣고 나타나서, 모친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허망한 말이다. 세상에서는 허망한 책을 믿고 있으며 이를 글로 써서 후세에 남기며 모두 성현이 한 말이라고 전한다….세상에 전해지는 제자백가의 말은 모두 기이하고 새로운 설을 내놓으려고 하고, 사람들이 감짝 놀랄 이야기를 해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책에 전해지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이 많다. 세속사람들은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왕충은 감히 진실을 얘기했던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실한 역사가 아니다. 사람들이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기.태사공자저>에는 그가 나이 10살에 고문을 읽고, 이십에 강회(江淮)를 유람하여, 회계에 오르고, 우혈을 조사하고, 구의를 살펴보았으며, 원수, 상수(沅湘)을 가고, 북으로 문수 사수(汶泗)에 갔으며 제로(齊魯)의 땅에서 강학을 하고, 공자의 유풍과 추봉의 예의를 보았고, (), (), 팽성(彭城)에서 곤란을 격교, (), ()를 지나 돌아왔다.” 이를 보면 그는 여행을 하면서 기록을 하고,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었으며, 생동감있고 합리적인 내용이기만 하면 모두 <사기>에 기록하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장은 힘이 넘치고 많은 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송나라때 문호인 소동파는 이렇게 찬탄한 적이 있다: “태사공은 천하를 다니면서 사해의 명산대천을 유람한다. 연나라 조나라의 호걸 준걸과 교유하여, 그의 문장은 호탕하고, 기이한 기운이 넘쳤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국 각지를 유람, 강학, 고찰한 기초 위에서 <사기>라는 거작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관광지역에서 보고 느낀 점을 적은 것이므로, ’여행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고힐강이 말한 바 있다. “중국상고사의 자료에서 가장 골치거리는 바로 전설적인 성분이 너무 많이 섞여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연결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현존하는 고서는 모조리 한인(漢人)이 편찬하고 고쳐서 만든 것이고, 현존하는 이야기는 모조리 한인(漢人)이 심의를 거쳐서 남겨둔 것이다. 한나라때는 통경치용(通經致用)의 시대였다. 그들은 응용의 편리를 위하여 왕왕 고서, 고사를 희생시키고, 그것들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한학(漢學)은 사적을 혼란시킨 총본산이다. 태사공이 <사기>를 쓸 때는 지금으로부터 이천여년 전이다. 이치대로라면 그가 본 진나라이전의 사적이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세본> 한 권을 제외하고, 태사공이 사용한 자료는 <> <> <국어> <국책> <좌전>중의 자료였다.” 저명한 사학자인  양관도 <마왕퇴백서전국종횡가서의 사료가치>라는 글에서, <사기.소진>에서 쓴 것은 거의 모조리 후세인들이 두찬(杜撰)한 장편유세글이다. 사마천은 이를 사실로 믿어서 그대로 옮기고, 소진의 원래 자료는 모조리 버렸다.”

 

곽말약은 <나는 어떻게 당예지화를 썼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기>라는 책은 중국고대사상 아주 빛나는 사적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자체는 적지 않은 하자가 있다. 이들 하자는 사마천이 고의로 윤색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그가 간과한 것도 있다. 전국시대의 사서는 오류가 가장 많다.” 혜환장은 <섬서역사백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기>는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비교적 이르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일찌감치 사마천의 원본은 아니게 되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는 공정하게 썼고, 어떤 측면에서는 과감하게 조정을 비판했다. 조정은 <사기>를 싫어하면서도 중시했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열람범위는 조정의 극소수인으로 제한되었다. 조정은 <사기>의 부분내용을 삭제하거나 보완하도록 조서를 내린 바 있다. <후한서.양종전>에는 양종은 조서를 받아 <태사공서>의 십여만자를 삭제했다고 하였다. 삭제후의 겨우 10여만자의 <사기>는 한나라이후 실전되었는데, 나중에 전해지는 것은 보완을 거친 것이다" 이 내용을 보면, 옛날 사마천이 쓴 <사기>는 일찌감치 명존실망(名存實亡)의 상태에며 후세에 전해지는 <사기>에는 18개의 서로 다른 판본이 있다.

 

등서금은 <중국위서종고>라는 책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사마천은 <사기.태사공자서>에서 이 책은 백삼십편, 합계오십이만육천오백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사기>는 오십오만오천육백자이다. 원저에 비하여 3만자가 늘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사기>는 원래의 모양이 아니다. 이 책은 후인들이 보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심징 선생은 <위서통고>에서 청나라말기 강유위가 <신학위경고>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하고 있다: “<사기>는 유흠(劉歆)의 난에서 몇 년동안 끊이고, 장과 구절이 찢어발기어졌으며, 후대인들이 함부로 추가하였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은, 질실하고 믿을만한 역사 자체는 누구든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고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고대의 일부문인들이 창작해낸 역사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대량의 진위구별이 어렵고 시비가 불명확한 문자가 고서에 끼어들었다. 후세인들은 이를 문헌기록으로 인용하니, 그 신용도가 크게 감퇴된다.

 

장사 마왕퇴에서 <전국종횡가서>가 출토된 후, <사기>와 세밀하게 비교검토해보고서, 학자들이 얻어낸 결론은 이렇다: <사기>의 많은 기록은 과장, 허구일 뿐아니라, 연대가 혼란스럽고, 모순이 백출한다. 그 자료의 원천이 위조되고, 믿을만한 것은 열에 한 둘에 불과하다.” <사기.태사공자서>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백년동안, 천하에 남겨진 글과 옛날 일들을 태사공이 모조리 모았다. 태사공은 부자가 이어서 편찬하고 천하에 흩어지 이야기들을 모았다. 왕의 사적이 흥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고, 흥성에서 쇠퇴하는 것을 살펴보아…’일가지언(一家之言)’을 이루었다.” 여기서 일가지언이라는 네 글자는 <사기>가 지닌 가치의 좌표이다. <사기>는 사학적 가치가 풍부하다. 그러나 유일하고 정확한 사서는 아니다. 사마천이 이야기한 것은 이야기이고, 정치이고, 민생이고, 역사이야기이다. 여월이 <시나블로그>에 쓴 것처럼, “사서와 역사소설을 구분하는 기준은 고의로 스토리를 날조한 것이 역사소설이고, 고의로 내용을 날조한 것이 사서이다.”

 

중국의 역사지리학의 태주이자 섬서사범대학 교수인 사념해 선생은 그가 편찬한 <고고발굴과 역사연구>라는 글에서, 명확히 지적했다: “<사기>라는 책은, 사마담 혹은 사마천이 다른 기록 혹은 전문에 근거하여 첨삭한 것이다. ,한나라때의 일부 소문은 완전히 믿을만하지 않고, 과장이나 허위사실이 많이 포함되었다. 스토리성이 너무 강하다. 어떤 것은 아예 사실이 아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홍문연에 대하여 역사학계의 노선배 여사면 선생이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여러가지 사적은 모두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이다. 한고조와 유방이 만났을 때의 진실한 장면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작자는 완전히 상상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사기>에서 기록한 진시황릉의 규모는 엄청나게 크고 호화스럽다. 이것도 상상에 의존하여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볼 수 있는 진시황릉은 그저 흙언덕이다. 높이도 한나라 당나라의 여러 무덤보다 높지 않다. 그러니 <사기>의 기록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 진시황릉에 관한 문자는 실로 너무 많다. 사람들이 아예 알 수가 없다. 어느 것이 과장된 것이고,어느 것이 허위이며, 어느 것이 진실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어떤 학자는 말한다: 사마천은 자신의 <사기>에서 표면적으로는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고 여산묘공사를 한 것이 호화사치의 극치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는 오히려 이를 통하여 당시 한무제가 삼백리상림원을 짓고 무릉을 건조한 것을 빗댄 것이라고. 그래서 욕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시원스러워하며, 자신이 궁형을 받은 보복을 한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진시황릉의 지궁을 만든 모든 장인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사마천은 무엇을 근거로 은밀힌 지궁건축이 세세한 점까지 모두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적을 수 있었을까? 이는 분명히 <사기>에서 진시황릉에 관하여 특히 지궁에 관하여 쓴 부분은 모두 문학적인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문학창작을 한 것이지, 진시황릉공사의 건축사를 쓴 것이 아니다. 그가 묘사한 진시황릉의 지궁은 전대이건 후대이건 실제의 생활에서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누군가 사마천의 <사기>를 진시황릉의 고고작업을 위한 근거로 활용했다. 1984 9, 진용관 고고학자 섭신민 선생은, <병마용갱은 진시황에 속한다중외관광객에 답한다>라는 글을 통하여, 이렇게 썼다: “만일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배장공사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진릉의 내외성간의 일부 배장갱은 진시황릉으 배장공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여산을 밀어버리지 않는 한,이처럼 거대한 봉토의 아래가 진시황의 능묘가 아니라면진시황릉은 속칭 여산이다. 사마천은 진시황릉에 관하여, 즉 여산공정에 관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의미는 충분한 자료근거를 가지고 있어 진시황릉이 여산에 있지 않다고 증명하면, 진시황이 생전에 만들어둔 능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릉내외성의 배장갱은 진시황릉에 속한 배장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병마용갱도 진시황릉의 배장갱이 아니라는 것이다.

 

섭선생의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여산의 북록. 진시황은 바로 이 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배장묘, 배장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진나라 병마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의 합리성, 신뢰성은 완전히 책에 쓰여있기만 하면 맞는 말이다라는 본본주의(本本主義. 책본위주의)’이다. 모택동은 본본주의의 사회주의연구법은 마찬가지로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고집스러운 심리의 지배를 받아, 외부와는 접촉도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다. 각종 객관적인 실천적 경험도 일률적으로 배척하고 부정한다. 진시활응공정에 있어서, 사마천의 글에 위반되기만 하면 그들은 모조리 부정한다. 그리고 끝까지 싸운다. 왜 많은 학술연구업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대부분은 본본주의때문이다. 우리가 본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본본은 살아있는 학문을 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를 벗어난 본본주의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