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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은 왜 고속도로를 만들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1. 27.

글: 유승(兪勝)

 

 

 

2011년 성탄절 전날, 나는 오르도스(鄂爾多斯)시 진직도기념관(秦直道記念館) 앞에 서 있었다. 이 날, 바람은 많이 불지 않았지만, 기념관의 담장위에 있는 오색깃발은 바람에 펄럭였다. 언덕위의 마른 잡초들도 좌우로 흔들렸다. 날이 저물 때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인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방이 막막한 벌판이고, 언덕과 골짜기가 연이어져 있었다. 친구는 앞쪽의 산등성이를 가리켰는데, 화살처럼 직선이었다. 그는 저것이 바로 "진직도(秦直道)" 유적지라고 했다. 황혼에 나의 눈앞에는 깃발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전마가 목놓아 울부짖고, 어떤 말은 발굽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전차들도 우루루 지나갔다....

 

이것은 어떤 도로인가? 일찌기 2000여년전에, 그것은 30미터 너비였다. 중국의 최초 고속도로인 호곤(상해-곤명)고속도로의 너비가 겨우 45미터인데. 이 도로에서우리는 진왕 영정(진시황)의 "포거우내, 병탄팔황(包擧宇內, 幷呑八荒)"의 웅심을 엿볼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한 후, 대장 몽염으로 하여금 부대를 지휘하여 30만의 군민으로 하여금 한편 국경선을 지키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군사요도(軍事要道)를 닦았다. <사기.진시황본기>에 나오는 군사요도가 바로 나의 눈앞에 있는 이"진직도"이다. 물론, 이 도로는 지금 세월의 먼지 속에 묻혀 있다.

 

진시황은 왜 이런 도로를 만들었을까? 사서를 훑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반격을 빠르게 하고, 북방흉노족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그저 이유중 하나에 불과한 것같다. 비록 이 이유가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기는 하지만. 진왕 영정도 사람이다. 사람은 자연히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자연히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이 가보고 싶어진다. <사기.몽염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시황이 천하를 주유하고 싶어애서, 구원에 길을 만들어, 감천(甘泉)까지 직접 갈 수 있도록 했다." 당연히 황제의 여행은 우리같은 범부속자와 다르다. 황제가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가면, 그 지방에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가져다 주지는 않을 뿐더라,그곳의 백성들과 재산을 해하게 된다. 그러나, 제왕 본인은 자신이 어느 곳에 가튼 것이 그 곳의 인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왕이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경우에 범부속자처럼 '돌아본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가행(駕幸)", "임행(臨幸)" 혹은 "출순(出巡)"과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다.

 

나는 '천하를 여행하고 싶었던' 진시황은 사방을 돌아다녔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같은 범부속자에 있어서, 자신의 집에 어느 정도 예금이 있으면, 1년동안 설사 쓸 곳이 없다고 하더라도, 몇번은 통장을 꺼내서 만져보곤 한다. 자신이 집에 아끼는 보물이 있다면, 1년동안 일이 있든 없는 거내서 몇번 만져보곤 한다. "하늘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 위의 사람들 중에서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 설마 사해를 가진 갑부인 제왕이 범부속자처럼 자신의 재산을 한번 점검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진시황의 강권통치하에 북방의 흉노민족은 이미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하는 실로 너무 넓다. 그런데, 제왕의 수명은 범부속자보다 길지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더욱 짧다. 진시황도 겨우 49년을 살았다. 그 본인은 지방여행중에 죽었다. 그가 창건하고 천추만대에 이어지기를 원했던 대진왕조는 금방 "일부작난이칠묘타(一夫作難而七廟墮), 신사인수(身死人手), 위천하소(爲天下笑)"(<과진론>)되었다.

 

진나라는 진효공이 상앙변법을 채택한 이래, 다른 나라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6대군왕이 현명한 인물을 목마른 듯이 찾고, 현인과 선비들을 예의로 모셔오고,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을 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진시황의 대에 이르러, "분육세지여열(奮六世之餘烈), 진장책이어우내(振長策而御宇內)"(<과진론>), 육국을 합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대진왕조의 극성기는 또한 그 급속쇠망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실로, "하늘이 그것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경우에, 반드시 먼저 그것을 미친듯이 성하게 만든다", "성극이쇠(盛極而衰), 비극태래(否極泰來)"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 진시황은 그렇게 많은 업적을 성취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성격도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이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성격이었다면 아마도 강산을 더 오랫동안 물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단명한 진왕조와 비교하여, 진직도의 영향은 훨씬 오래갔다. 그후 이천여년의 풍우역정에서, 필자의 눈 앞에 있는 이 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극이 펼쳐졌던가? 혹은 장열하고, 혹은 아름답고...천하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삼은 황제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가 힘들여 만들어놓은 일체를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바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눈앞의 이 도로에서 한나라의 깃발이 펄럭이고, 또한, 당나라 이세민이 창을 들고 말을 타서 달려가고, 송나라때, 당항족인 이계천이 이 도로에서 십여년의 전쟁을 치르면서 서하제국의 진정한 창업자가 된다.

 

내 눈앞의 이 도로에는 두 명의 미인이 지나간 적이 있다. 한 명은 왕소군(王昭君)이다. 왕소군이 새외로 나가서(昭君出塞), 흉노에 시집갈 때, 장안에서 출발하여 진직도를 따라 북행했다. 지금도 진직도를 따라 내몽고경내에는 소군묘가 있고, 길가에는 왕소군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들이 많이 전해진다. 다른 한명은 채문희(蔡文姬)이다. 동한말기, 채문희는 전란의 와중에 남흉노의 포로가 된다. 나중에 흉노 우현왕의 알지가 된다. 그때 간 길도 진직도이다. 나중에 채문희는 고향생각이 간절하여 12년후, 조조가 사신을 보내어 채문희를 맞이해온다. 채문희는 남편, 자녀와 이별하고 이 길을 따라 중원으로 돌아온다.

 

이 두 여인은 이 양강(陽剛)의 기운이 충만한 진직도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이 두 여인으로 인하여, 내가 이 길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이 마치 금방 악비(岳飛)의 "삼천공명진여토(三千功名塵與土), 팔천리로운화월(八千里路雲和月). 막등한(莫等閑), 백료소년두(白了少年頭), 공비절(空悲切).."(<만강홍>)을 읽고나서, 바로 그의 "작야한칩부주명(昨夜寒蟄不住鳴), 경회천리몽(驚回千里夢), 이삼경(已三更), 기래독자요계행(起來獨自繞階行), 인초초(人悄悄).염외월롱명(簾外月朧明)..."(<소중산>)을 읽은 것과 같다. 장열하다가 다시 쓸쓸하고 처절한 감정이 한 사람의 몸에서 이렇게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성탄절의 하루 전날, 만일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오르도스의 진직도기념관 앞에 서 있었다면, 그리고 멀리 산천의 기복을 바라보았다면, 바다의 파도와 같았을 것이고, 마음의 울렁거림 같았을 것이다. 창망한 느낌을 가졌을 것이고, 바람과 함께 무거운 역사가 얼굴로 불어왔을 것이다. 당신의 곁에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 순간 시간이 멈추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