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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성공)

정성공(鄭成功) 죽음의 미스테리

by 중은우시 2012. 1. 13.

글: 문재봉(文裁縫)

 

정성공은 복건성 남안 사람이다. 명나라 융무제는 그에게 주(朱)씨성을 하사했으며, 이름은 "성공"이다. 그러므로, 후세인들은 그를 가리커 "국성야(國姓爺)"라고 불렀다. 정성공의 부친인 정지룡(鄭芝龍)은 초기에 무역도 하고 해적질도 했다. 나중에는 관직이 복건총병에까지 이른다. 정지룡이 젊어서 일본의 평호(平戶)에 살 때, 현지 여자인 전천(田川)씨와 결혼하여 정성공을 낳았다. 정성공은 7살때 일본에서 중국으로 돌아와서 유가교육을 받았다. 순치원년(1644년), 남명 영력황제는 정지룡을 남안백(南安伯)에 책봉하고 복건총병으 직을 내려 복건성 전체에서 항청(抗淸)의 군무를 모두 관장하게 한다. 다음 해, 정지룡, 정홍규(鄭鴻逵) 형제는 복주에서 남명 당왕 주율건(朱聿鍵)을 융무제로 모시고, 정지룡은 남안후(南安侯)에 책봉되어, 남명의 모든 군무를 책임진다. 청군이 복건으로 진군할 때,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한다. 융무정권도 이로써 멸망한다. 정성공은 부친이 청나라에 투항하려는 것을 알고는 일찌기 그러지 말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부친은 청나라에 투항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성공은 화가 난 나머지 혼자서 남오도로 간다. 거기서 수천인마를 모아 항청사업을 계속한다. 청왕조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투항을 권유하지만, 정성공은 모두 거절한다.

 

정성공이 강해진 후, 항청장수 장황언(張煌言)과 연합하여 군대를 수륙양로로 나누어 남경으로 진격한다. 파죽지세로 남경성 아래까지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청나라군대의 허위투항계책에 말려들어, 패배한 후 하문으로 돌아온다. 정성공이 하문으로 돌아온 후, 대만을 점령할 준비를 한다. 대만을 반청복명의 근거지로 삼으려 한 것이다. 바로 이때, 네덜란드군대에서 통역을 하던 하정빈(何廷斌)이 하문으로 와서 정성공을 만나길 청한다. 그리고 정성공에게 대만을 수복하도록 권한다. 하정빈은 정성공에게 네덜란드침략군의 군사역량이 배치된 대만지도를 건넨다. 1661년 삼월, 정성공은 아들 정경(鄭經)에게 군대를 일부 이끌고 하문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25000명의 장병을 수백척의 전선에 나누어 태우고, 호호탕탕하게 금문을 출발한다. 대군은 대만해협을 건넌 후, 팽호에서 휴식을 취하며,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마친다.

 

네덜란드침략군은 정성공군대가 대만에 진공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군대를 대만과 적감 두 성에 집결시킨다. 그리고 항구에 배를 침몰시켜, 정성공의 선단이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한다. 정성공은 하정빈이 이끌어주는대로 해수면이 만조에 달했을 때 녹이문으로 몰고 들어간다. 그리고 대만섬에 상륙한다. 격전이 벌어지고 네덜란드군대가 참패한다. 두 성에 웅크리고 들어가서 감히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들은 한편으로 자바섬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성공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의를 하자고 청한다. 십만냥 백은을 줄테니 정성공의 부대에게 대만에서 떠나달라고 한 것이다. 정성공은 네덜란드군대의 요청을 단연 거절한다. 그리고 적감성의 수원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적감에 숨어있던 네덜란드인이 투항하도록 한다. 대만성에 칩거하고 있던 네덜란드군에 대하여 정성공은 장기간 포위해두는 방법으로 그들이 투항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포위 8개월후, 정성공은 대만성에 강공을 명령한다. 네덜란드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투항하게 된다. 1662년초, 정성공은 네덜란드군대를 대만에서 몰아낸다.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연 급병으로 사망한다. 나이 겨우 38세때이다. 정성공의 죽음에 대하여 이런 주장이 있다. 정성공은 대만을 수복하는 동시에, 나쁜 소식을 접한다. 그의 부친을 가노(家奴) 이대기(李大器)의 고발했다는 것이다. 고발내용은 정지룡과 정성공의 사이에 서신이 계속 오가면서 반란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은 분노하여, 정지룡의 일가족을 처형한다. 정성공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가슴을 치고 발을 굴렀다. 그리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만일 내 충고를 들었더라면 어찌 살신지화를 당했을 겁니까?"

 

얼마후 정성공은 또 한 가지 소식을 듣는다. 배신한 장수 황오(黃梧)가 자신의 고향에 있는 정씨조상묘를 파헤쳤다는 것이다. 정성공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하루종일 통곡을 한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맹세했다: "사람이 살아서 맺은 원한이 죽은 사람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만일 내가 병력을 이끌고 치고 들어간다면, 내가 너를 너를 한 토막 한토막 잘라서 죽이지 않는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정성공의 바램은 14년후에 실현된다. 정경이 장주를 함락시켰을 때, 황오의 묘를 파서 시신에 채찍질을 하여 부친의 원한을 푼다.

 

1662년 4월, 남명의 병부사무 임영(林英)이 삭발하고 중이 된다. 그리고 운남에서 대만으로 도망쳐 와서 정성공을 만난다. 그리고 정성공에게 곡을 하며 말한다: "황상(영력제)은 간상 마길상, 역적 이국태의 말을 들어 버마로 피신했습니다. 현재 오삼계가 버마를 공격하고, 버마국왕은 황상을 오삼계에게 이미 바쳤고, 듣기로 이미 오삼계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정성공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통곡한다.

 

누가 알았으랴 한 풍파가 가라앉기도 전데 다른 풍파가 일어났다. 정성공의 부하인 당현열이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유모와 통간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정성공은 졸지에 화가 나서 기가 막혔다. 즉시 사람을 하문으로 보낸다. 정경과 그의 영아 및 유모 진씨를 죽이려 함이다. 그러나 하문을 지키던 여러 장수들은 명령을 집행하지 않는다. 정성공은 매일 높은 곳에 올라서 팽호방향에서 배가 오는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풍한에 걸린다. 8일째 되는 날, 돌연 미친 듯이 소리친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선제를 만난단 말인가?"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그래서, <대만통지>에 정성공은 감기풍한으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정성공의 임종전에 특이한 모습은 정씨집단내부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어떤 사람은 정성공이 독살당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의 주요근거는 정성공이 죽기전의 형상이 중독후에 독성이 발작하는 증상과 아주 유사했다는 것이다. 정성공과 동시대에 살았던 이광지의 <용촌어록속집>, 하림의 <민해기문>, 임시대의 <하갑총잡>에는 각각 정성공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용촌어록속집>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신이 추천한 의사는 더위를 먹었다고 생각하여 양제를 투약했다. 그날 밤에 죽었다." 정성공은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전에 청정부는 확실히 정성공을 모해하려는 생각을 했었다. <대만외지>의 기술에 따르면, 당시 청정부는 한 고위장군을 파견하여, 공작담(孔雀膽)을 가지고 정성공의 군대에 섞여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큰 돈을 들여서 정성공의 요리를 하는 요리사를 매수한다. 그로 하여금 정성공이 연회를 베풀 때, 정성공과 그의 장수들을 독살시키고자 한다. 이 요리사는 비록 돈을 탐내지만, 일이 발각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이러저리 생각해보고나서 손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일을 동생에게 넘겨서 처리하게 한다. 그의 동생이 독약을 넣으려 할 때, "매번 독약을 넣으려 하면, 온 몸에 한기가 느껴지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두려워서 이 일을 부친에게 말한다. 그의 부친은 그 말을 듣고 대경실색한다. 그들 두 사람을 혼내면서 말하기를, "주인을 모해하는 것은 불충이다.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신용이 없는 것이다. 신용없는 사람이 될지언정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족을 멸할 일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빨리 자수하면 아마도 죄를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데리고 정성공이 거주하는 곳으로 가서 자수한다. 정성공은 그들을 처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큰 상을 내린다. 그리고 아주 자신있게 말한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 어찌 범인이 쓰는 독에 달할 것이냐?" 그후 정성공은 보안조치를 강화한다. 이렇게 하여 누군가 '독을 쓰고자 해도, 정성공의 몸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정성공이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정성공의 부장인 마신이 신비스럽게 죽은  것은 정성공이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마신은 청나라에서 투항항 장수이다. 나중에 정성공의 심복이 된다. 정성공이 죽는 날, 바로 그가 추천한 의사가 처방을 내렸고, 밤에 정성공이 죽는다. 그 본인도 돌연 아무런 병도 없이 죽는다. 이광지에 따르면, 마신은 정성공이 죽은 다음 날 죽는다. 강일승의 <대만외기>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그의 죽음은 정성공이 죽은 후 겨우 5일만이다. 그러므로, 마신은 아마도 직접 정성공을 살해하는데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살인멸구 당한 것이다.

 

만일 정성공이 독살당했다면, 누가 살인자인가? 당연히 청정부의 혐의가 가장 크다.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정성공의 형제들인 정태(鄭泰), 정명준(鄭鳴俊), 정습(鄭襲)등이라고 한다. 특히 정태이다.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정성공은 법집행이 엄했다. 정성공의 부하들 중에는 그의 윗사람인 친척을 포함해서 과오로 처형당하거나 극형을 당한 사람이 아주 많다. 그러다보니 장병들이 인심이 흉흉했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청나라조정의 관직과 녹봉의 유혹을 못이겨, 도망치기도 했다. 정씨집단의 내부는 극도로 긴장된다. 정태는 일찌감치 정성공이 군을 이끌고 대만을 정벌할 때 정성공과 갈등이 있었다. 당시 정태는 운량관(運糧官)이었다. 정성공은 군대의 보급이 모자라자, 정성공은 정태의 업무태만에 대하여 극히 불만이었다. 그는 의자의 앞에 다섯 글자를 적는다: "호실선정죄(戶失先定罪)" 그 뜻은 만일 난리가 나면 정태를 먼저 죽인다는 말이다. 정성공이 죽은 후, 정태 등은 정성공의 유언을 위조하여 정경을 토벌한다. 그리고 야심은 있으나 재능은 없는 정습으로 하여금 형의 대통을 잇게 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음노는 정경에 의하여 좌절된다. 정태는 감옥에 들어가서 죽는다. 정명준등은 무리를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한다. 이를 근거로 분석하면, 정성공을 죽이려고 기획하고 모해한 사람은 아마도 정태 등일 것이다.

 

정성공이 죽은 후, 정경은 먼저 정태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빴다. 나중에는 정태가 일본에 예금해둔 거액을 찾으려 한다. 그 본인은 간통죄를 저질러 하마터면 정성공에게 죽을 뻔했다. 그러므로 정성공의 죽음에 대하여 당시에는 그다지 깊이 따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