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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성공)

정성공(鄭成功): 민족영웅? 일본인? 동방악마?

by 중은우시 2009. 3. 4.

 

 

 

글: 대만연합보

 

17세기 대항해시대에 정성공이 이끄는 무장해상집단은 중국연해를 종횡무진했다. 그는 "반청복명"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대만에 첫번째 한족정권을 건립하고, 명나라의 황제성을 사성으로 받아 "국성야(國姓爺)"로 존경받는다. 서양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국성야"의 민남화(복건어) 발음으로 그를 "Koxinga"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일본은 에도시대이래로 문학, 가부키 공연을 통하여 정성공이 나카사키 히라도(長崎平戶)에서 태어나고, 모친이 일본인인 다카와(田川)씨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강점기에 정성공은 일본인들이 대만을 통치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인물로 활용되었다.

 

정성공과 같은 인물은 대만역사상 보기 드물다. 그러므로, 대만박물관의 진관지보인 "정성공화상(鄭成功畵像)"은 최근 고궁박물원의 복구작업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이로 인하여 정성공은 다시 여론의 촛점이 되었다.

 

구전역사에 다르면, 이 화상은 정성공이 생전에 타이난(臺南) 사람을 시켜 그리게 한 것이라고 한다. 대만박물관은 이것을 "가장 정성공의 진실한 모습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서양인, 일본인등이 그린 정성공에 대한 서로 다른 버전의 그림을 비교대조하면서, 정성공의 진실한 용모에 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의문점 하나: 생전에 그린 것인가? 사후에 그린 것인가?

 

정씨자손의 구술에 따라, 대만박물관은 이 그림이 정성공이 서거(1662년)하기 1년전에 그린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문헌자료센터는 정성공화상에 대하여 과학적인 검사를 통하여 이 그림의 안료를 분석했는데, 이 그림은 정성공의 사후에 그린 것이라는 분석결과를 얻었다.

 

문헌자료센터는 이 그림에 사용된 프로이센 남색안료는 18세기에 동방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이런 분석결과가 나온 것이다.

 

다만, 대만박물관의 전장조 조장인 이자녕은 그들이 정성공이 생전에 동남연해에서 활약하던 대상인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같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가지 밀수등의 방법으로 서방물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안료를 획득하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만박물관은 여전히 이 그림은 정성공의 생전에 그린 것이라고 믿는다.

 

의문점 둘: 봉안(鳳眼)인가 대안(大眼)인가?

 

대만박물관판 "정성공화상"의 '국성야'의 얼굴형은 길고, 가는 눈썹에 봉안(鳳眼)이며, 수염이 짧다. 다만 정성공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서양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정성공의 "눈은 크고 검었"고, 그의 행동거지는 난폭했다고 한다. 이는 교과서에 실린 정성공은 가는 봉안을 가지고 위엄있고 단정했다는 민족영웅의 모습과 판이하다.

 

300여년전에 정성공의 포로로 잡혔던 한 네덜란드 토지측량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국성야'를 형용했다: "국성야는 장막의 정중앙에 있는 탁자의 뒤에 앉아 있었다...그의 눈은 크면서 검었다. 그의 눈이 한곳에 멈추어 있는 적이 드물었고, 계속하여 여러 곳을 노려보았다. 수염은 많지 않았는데, 가슴까지 자랐다. 그가 말하는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고, 포효하고 격앙되어 있었다..."

 

또 다른 책에서는 17세기에 네덜란드의 판화에 그려진 정성공이 있다. 홍모번(紅毛番)을 쫓아낸 민족영웅이 마치 오랑캐처럼 그려져 있다. 현지에서 수감된 네덜란드 전도사가 있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열란차(熱蘭遮)성을 죽어라 수성하며 항복하지 않자, 화가나서 그 네덜란드 전도사에게 화냈을 뿐아니라,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서양인의 눈에 "눈이 크고 검은" 정성공은 민간에 전해지는 짙은 눈썹과 큰 눈을 지닌 "소년 정성공"과 약간 닮은 점이 있다. 이는 대만박물관의 정성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대만사를 연구하는 만화가 두복안은 대만박물관의 화상에 대하여 '개성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의문점 셋: 뚱뚱한가 말랐는가?

 

항간에 전해지는 "정성공부부상"은 또 다른 정성공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림 속의 정성공은 퉁퉁한 모습이다. 눈썹도 짙고 눈도 크다. 귀가 어깨까지 늘어진다. 수염은 없다. 학자들이 말하는 "소년 정성공"이다. 

 

 

 

 

가장 주목을 끄는 점은, 정성공은 탑(榻)위에 앉아 있고, 그의 처는 의자위에 앉아있다는 점이다. 이런 '남편이 낮은 곳에 앉고, 부인이 높은 곳에 앉는' 형식은 일반적인 중국전통으로는 맞지 않는다.

 

대만박물관의 위탁을 받아, "정성공화상역사조사연구"를 진행한 타이페이예술대학 전통예술연구센터의 요근애는 문헌에는 정성공이 죽기 전에 "호상(胡床)에 앉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말에서 "호상"이라는 말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그림 속에서 정성공이 앉은 자세와 들어맞는다. 이런 앉은자세는 일본회회사에서 전통인물을 묘사하는 양식이다. 요근애는 이를 아마도 후손들이 "호상"이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혹은 정성공이 일본혈통을 지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일 것으로 본다.

 

이자녕도 이러한 정씨부부화상은 아마도 일본인이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본 정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뚱뚱한 모습의 정성공과는 달리, 대륙의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성공혁기도"에서는 용모가 약간 마른 편이다. 그림 속의 그는 중년문사의 모습이고, 오조룡(五爪龍)무늬의 남색 옷을 입고 있다. 연구팀은 중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정경, 정극상의 화상과 비교한 후에 이 그림속의 정성공은 "그의 가족적 특징"을 보유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가 아마도 "국성야"본인에 더욱 근접한 모습일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