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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정성공)

일본은 왜 정성공(鄭成功)을 민족영웅으로 받드는가?

by 중은우시 2007. 7. 5.

글: 조후(曹煦)

 

명나라말기의 장수인 정성공은 네덜란드의 손에서 대만섬을 수복함으로써 중국에서 "민족영웅"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런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에서도 그를 역시 "민족영웅"으로 모시고 있다. 대만에는 청나라때 건립한 정성공을 모시는 연평군왕사(延平郡王祠)가 있는데, 일본은 대만점령기간중에 옆에 "개산신사(開山神社)"를 지어서, 정성공을 모셨다. 동시에, 일본작가 근송문좌위문(近松門左衛門)은 일찌기 <<국성야합전>>이라는 정유리극을 써서 일세를 풍미한 적이 있다. 일본은 정성공을 "민족영웅"으로 모시게 된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세 가지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 혈맥(血脈)

 

정성공의 부친인 정지룡(鄭芝龍)은 명나라 조정에 귀순하기 전에는 해적수령이었다. 일찌기 일본에 간 적이 있으며, 일본여인인 전천송(田川松)과 결합한 바 있다. 전천송은 명나라 천계4년(1624년, 일본 관영원년) 음력 7월 14일(양력 8월 27일)에 일본 평호(平戶)의 바닷가에서 정성공을 낳았다. 현재 그 곳의 바닷가에는 지금도 "아탄석(兒誕石)"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정성공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정성공의 모친이 일본인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몸에는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다. 그는 7살때 중국의 복건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7살전까지는 모친과 생활하면서 일본문화속에서 살았던 것이며, 그가 처음 접했던 언어도 일어이다.

 

이로 인하여, 혈통상으로 보면, 일본인들은 어느 정도 정성공을 자신들 대화민족의 역사인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적대시(敵對視)

 

당연히, 혈통만으로는 부족하다. 왕왕 이익소재는 항상 큰 힘을 발휘한다. 아주 의미심장한 그림의 하나는 위에 정성공과 호랑이를 한 마리 그린 것이다. 정성공의 손 하나는 호랑이의 몸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동물의 왕인 호랑이는 전혀 위풍당당하지 않고, 그저 말잘듣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의 호랑이는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하고자 했다. 두번에 걸쳐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명나라는 일본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종주국의 지위로써 파병하여 조선을 구해주었다. 같은 명나라때, 일본왜구는 계속하여 중국의 연해를 노략했다. 이것들은 대규모의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면, 청나라말기에 일본은 서방열강과 함께 중국을 침입한 것은 확실한 침략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청나라와 싸웠던 정성공은 당연히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근대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의 연결을 긴밀하게 하였다. 바로 청나라때, 중국은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대한 인식은 "변발의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청나라는 중국의 대명사가 되었다. 일본은 중국을 정벌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먼저 청나라에 대하여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여야 했다. 이 점에서 청나라에 항거했던 정성공은 바로 그들이 중국을 적대시하는 입맛에 맞았던 것이다.

 

셋째, 분열

 

정성공은 오랫동안 명나라를 대체한 청나라에 투항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후손들도 오랫동안 대만에 할거하며, 통합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정도에서 중국의 "민족영웅"이라는 간판을 내거는데 약점이 된다. 그러나, 정성공의 이 행위는 일본의 입맛에는 딱 들어맞았다.

 

유구는 일찌기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명나라말기에 일본이 병사를 보내서 점령했고, 일본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정성공의 부친인 정지룡은 당시 일본정부와 관계가 비교적 좋았으므로, 나중에 대만을 할거한 후, 일본막부는 비록 군대를 보내서 실질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정성공을 성원하기는 했다.

 

유구를 일본본토에 편입시킨 후, 일본은 오랫동안 대만을 중국에서 분리시켜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성공이 대륙에 편입을 거부한 것은 일본의 야심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들이 보기에, 정성공은 대만을 경영한 첫번째 일본계 후손이었다. 대만독립분자들은 정성공을 한인으로써 중국통치에서 벗어나 대만으로 이민하여 신천지를 건립한 전형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보면, 정성공을 '민족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일본이 오랫동안 대만을 중국에서 분열시키려는 내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역사는 유일하다. 정성공은 일본막부와 연합하여 청나라에 대항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중국인이라는 신분을 선택한 것이고, 그가 대항한 것은 외래민족정권이지, 중국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