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백수흑(知白守黑)
세계의 국가원수는 대통령, 주석, 국왕으로 칭한다. 오로지 일본에서만 '천황'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천황'이라는 두 글자를 들으면, 바로 일본을 생각한다. 사실, 천황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중국역사상에도 여러 천황이 있다. 이들 천황의 칭호는 어떤 경우는 전설상의 인물이고, 어떤 것은 스스로 자칭한 것이며, 어떤 것은 사후에 추존한 것이다. 역사는 말해준다. 천황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통적인 Made in China라는 것을.
중국의 천황이라는 단어를 얘기하자면, 부득이 원고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삼황중에 천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기. 시황본기>>에는 이사(李斯)의 주청글이 실려 있는데, "고대에 천황이 있고, 지황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다.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고대서적에서 가장 처음 나타나는 천황이라는 단어에 대한 기록이다. 이 천황은 도대체 누구인가? <<사기>>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후인들은 점점 더 구체화하게 된다. 비록 삼황중의 천황은 복희씨인지 수인씨인지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지만, 두 사람중 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것이 중국 최초의 천황이다. 그들은 하나는 불을 발명했고, 다른 하나는 그물을 엮어서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발명했다. 이는 사전문명시기에 모두 대단한 발명들이다.
진시황이 황제로 칭하게 된 후, 이후의 황제들은 대부분 분수를 지켜, 여전히 황제라는 구칭호를 사용했다. 남북조때, 북주의 제4대황제 주선제 우문빈은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천황"에 흥미가 있었다. 그는 황음무도하고 포악한 군주였다. 선정원년(578년), 부친이 죽자, 그가 황제위에 오른다. 첫번째로 한 일은 부친의 내궁비빈을 모조리 불러모은 후 용모가 괜찮은 자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황제에 오른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했는지, 7살된 아들 우문연에게 황제위를 선양하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 칭한다.
우문빈이 2선으로 물러난 후에 거주하는 곳을 '천대(天臺)"라고 불렀고, 신하들에 대하여 자신을 "천(天)"이라 챙했다. "제(制)"는 "천제(天制)"로 "칙(勅)"은 "천칙(天勅)"으로 고쳐불렀다. 대신들이 그를 만나려면, 반드시 사전에 3일을 흘재(吃齋)하고 1일을 정신(淨身)해야했다. '천'자가 들어가는 것은 그가 모조리 다 차지했다. 사람에게 120대의 곤장을 때리는 것마저도 '천장(天杖)'이라 불렀다. 그는 비록 직접 자신을 "천황"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책립한 다섯명의 황후는 "천황후(天皇后)"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그가 말한 "천원황제"가 바로 "천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천황이 없다면 천황후는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당나라가 되어, 또 분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무측천이다. <<신당서.고종>>의 기록에 따르면, 영휘6년(655년), "겨울 10월 기유일, 황후 왕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소의 무씨를 황후로 하였으며,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당고종 이치가 황후를 바꾼 것이다. 무측천이 황후가 되었다. 여기서는 천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원원년(674년)이 되어,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팔월 임신일, 황제는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는 천후라 칭한다." 이치의 황제가 천황으로 바뀌고, 무측천의 황후는 천후로 바뀐다.
황제와 천황은 그저 칭호가 다를 뿐이고, 본질은 차이가 없다. 모두 국가의 최고지도자를 가리킨다. 이치는 왜 굳이 칭호를 바꾸었을까? <<자치통감>>에는 "황제는 천황으로 칭하고, 황후는 천후로 칭했다. 이는 선제, 선후의 칭호를 피한 것이다" 송원시기의 사학자인 호삼성은 그 비밀을 이렇게 파헤쳤다: "실제로는 스스로를 높이기 위하여, 선제,선후의 피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했다. 이는 무후의 뜻이다." 이를 보면, 이치가 스스로 천황이라 칭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무측천이 실제 정무를 통괄하게 된 후에 이치의 사후에 계속 대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이를 보면, 무측천의 천후때문에 이치의 천황이 나온 것이다. 무측천은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베갯머리송사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룬 후에, 과연 무대의 전면으로 나섰고, 천후에서 황제로 된다.
당고종 이치와 오대때의 남한 개국황제 유척은 인연이 있다. 그들은 비록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비슷하다. 비록 같은 왕조는 아니지만, "한"이라고 이름한 유척의 집정책략은 당나라의 모델이었다. 그리고 사후의 시호도 같다. 모두 '천황대제(天皇大帝)'이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이치는 생전에 천황이 되었고, 처는 천후가 되었지만, 유척은 사후에 비로소 '천황'칭호를 얻었다는 점이다. 황제위도 마누라가 아니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시(諡)는 행지적(行之迹)이오, 호(號)는 표지공(表之功)이다" 고대제왕,제후는 죽은 이후에 조정에서 그들의 평생행적에 따라 칭호를 부여하여 선악포폄을 나타낸다. 이를 시호라고 한다. 유척도 '천황대제'였으므로, 분명히 천황의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 원래, 917년 유척이 광주에서 남한정권을 건립한 후, 학교를 세우고 과거를 열고, 모조리 당나라제도를 따랐다" 그는 개명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원래의 이름이 척(陟)인데, 황제에 오른 후에 "암(巖)"이라 한다. 다시 공(龔)으로 바꾼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고종의 처인 무측천의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주역>>의 "비룡재천"이라는 의미를 지닌 새로운 글자(발음은 엄)를 만든다. 이 글자에 그는 아주 만족하여 더 이상 바꾸지 않았다. 후진천복7년(942년) 4월, 그는 광주에서 죽는다. 이때 나이 54세이다. 아마도 후대에서는 그의 '비룡재천'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하여 그에게 '천황대제'라는 시호를 만들어줬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동시에, 북방의 거란부락수령인 야율아보기는 정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란의 각 부락을 통일한 후, 중국고대북방의 천황이 탄생한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등극하면서 '천황왕(天皇王)'으로 받들어지고, 국호를 거란(나중에 요로 개칭함)라 하며, 연호를 신책이라 한다. <<요사>>에 나오는 '천황제', <<거란국지>>의 '천황왕'은 당연히 천황칸(天皇可汗)일 것이다. 천황은 칸의 칭호가 된다. 요나라 천현원년(926년) 야율아보기는 부여성(지금의 길림 사평 서쪽)에서 죽는다. 사후에 시호를 '천황제'라 한다. 그후 황후 술율권이 국사를 결정하는데, 그녀는 둘째아들을 편애하여, 천현2년(927년) 십일월, 둘째아들 야율덕광을 천황왕에 올린다. 천황왕은 술율황후를 태후로 모시고, 국사는 모두 태후가 결정한다.
이후의 사료에서, 다시는 중국황제가 '천황' '천황대제', '천황제'와 같은 류의 칭호로 스스로 칭하거나, 추존되는 경우는 없는 것같다. 손가락을 꼽아보면, 중국역사상 천황은 북주선제 우문빈, 당고종 이치, 오대때 남한의 개국황제 유척,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요나라 태종 야율덕광이 있다. 만일 전설상의 '삼황오제'중의 천황까지 포함한다면, 중국역사상 최소한 6명이 생전 혹은 사후에 '천황'이라는 칭호를 가졌었다. 시간으로 보면 원고에서 요나라때까지 상하 수천년에 걸친다.
역사상 6명의 천황칭호의 유래를 살펴보면, 정치적수단, 후인들의 숭배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한 가지 관점을 나타낸다: 권력이 하늘보다 크다. 이는 황제라는 칭호와 비교하여 무슨 신비한 것은 없다. 후대의 중국황제가 더 이상 '천황'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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