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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십삼태보(十三太保)는 어떤 사람인가?

by 중은우시 2008. 7. 19.

글: 주문정(周文鼎)

 

태자태보(太子太保)는 원래 태자를 보좌하는 관직이다. "십삼태보"는 무협에서 주군을 호위하는 무공이 비범한 강호를 횡행하는 협사를 가르킨다. 가장 유명한 자는 진왕(晋王) 이극용(李克用)의 의자(義子)인 이존효(李存孝)이다.

 

이존효는 진왕 이극용의 휘하에 있는 용장이다. 그리고 이극용의 여러 "의자"들 중에 한명인데 열세째이기 때문에 그를 "십삼태보"라고 불렀다. 그는 십삼태보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존효는 가장 세고, 용감하며, 백전백승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호장군에 오른다. 그러다보니 민간에는 "왕이라면 패왕이 최고이고, 무라면 존효가 최고이다"

 

이존효라는 인물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정사에는 그다지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연의소설이나 민간전설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이들 전설은 빼고, 역사의 각도에서만 본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주 용감하고 싸움을 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오대사. 당서열전5. 이존효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래의 성은 안(安)씨이고, 이름은 경사(敬思)이다. 어려서 포로로 잡혀 죄수였다....튼튼하고 말을 잘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가장 용맹하였다. 자주 말을 타고 선봉에 섰는데, 진 적이 없다; 무황이 진,허를 구하는데서부터 황구를 쫓아내는데 및 상원에서 곤란을 당할 때까지 싸울 때마다 이기지 않은 경우가 없다...존효는 매번 큰 적을 맞이할 때면 중무장을 하고 활과 삭을 들고, 따르는 자에게 말 두 마리를 데리고 따르게 하여, 진중에서 말을 갈아탔는데, 날렵하기가 날아다니는 것같았고, 홀로 철과를 휘두르고, 몸을 빼내어 진을 무너뜨리니, 만명이 당할 수 없었다. 모두 장료, 감녕에 비교했다"

 

<<신오대사. 의아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존효, 대주 비호사람이다. 원래 성은 안이고 이름은 경사이다. 태조가 대의 북쪽의 땅을 노략할 때 얻었다...성명을 내리고 아들로 삼았다. 항상 말을 타고 싸웠다...존효는 활을 잘 쏘았고, 몸에 중무장을 하고, 궁과 삭을 들었으며, 손에는 철과를 들고 진중을 드나들었다. 두마리의 말이 따르게 해서 전쟁이 한창 무르익으면 말을 갈아탔는데, 아래위로 날아다니는 것같았다."

 

두 책에서 모두 이존효는 용맹하고 과감하였다는 것을 적고 있다. 그는 자주 기병을 이끌고 이극용의 선봉이 되었으며, 천하무적이었다. 그는 몸에 중무장을 하고, 허리에는 활과 긴창(삭)을 차고, 손에는 철과를 휘두르며 적진을 유린했다. 수천수만이 그의 앞에서 놀라서 도망갔다. 가장 놀라운 일은 그가 자주 두마리의 말을 가지고 작전에 임하여, 타던 말이 힘들어하면 전투중에 다른 말로 갈아타는데, 아주 민첩하였다고 한다.

 

이극용의 부대에 있는 장수들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 나중에 같은 '의자'인 이존신(李存信)은 질투로 인하여 그를 종용하여, 그는 이극용을 배반한다. 그러나 그는 용맹한 싸움꾼이어서, 계책에 능한 이극용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이극용이 약간의 수단을 써서 유주에서 그를 잡아 태원으로 데려온 후 오마분시(혹은 오우분시)의 혹형으로 이존효는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이에 대하여, <<신오대사. 의아전>>에서는 '묶어서 마차에 싣고 태원으로 와서 차열(車裂)로 죽는다"고 적고 있다.

 

비록 그러했지만, 이존효가 죽은 후에, 이극용은 매번 여러 장수들과 도박할 때면 이존효를 얘기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건녕원년 10월, 소의절도사 강군립이 진양으로 와서 이극용을 만난다. 기미(30일)일에 이극용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는데, 한창 술에 취하자, 이극용은 이존효를 얘기하며, 눈물을 계속 흘렸다고 한다.

 

십삼태보의 기원에 대하여, 또 한가지 주장은 <<설당전전>>에 있는 양림(楊林, 양소의 동생)에게 13명의 양자가 있는데, 이들을 십삼태보로 불렀다는 것이다.

 

태보는 사람의 칭호로 원래는 높임말고 낮춤말도 아니었지만, 점차 낮춤말로 되어 버렸다. 주요한 이유는 하나의 명사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개세태보(蓋世太保, 케쉬타포의 중국식 표현)"이다. '개세태보'는 독일 나치의 파시스트조직이다. 국가비밀경찰의 약칭이다. 비밀경찰에게는 '예방적 체포권'이 있는데, 나치독일시기에 수천수만의 유태인, 공산당, 좌파인사, 저항전사등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세태보에 의하여 수용소에 갇혔다. 제2차세계대전기간동안 개세태보는 특별행동대에 참가하여, 정규군을 따라 폴란드와 소련에 들어가서 잔혹하게 나치점령지역의 인민과 전쟁포로를 학살했다.

 

중국어에서 태보에 대한 해석은 모두 네가지인데, 나머지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 송원시기의 무사(巫師)를 태보라고 불렀다.

- 녹림호한(綠林好漢)을 태보라고 불렀다 : 녹림은 도적을 의미하고, 호한은 사나이를 의미한다.

-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칭

 

황포십삼태보(黃埔十三太保)

 

1932년, 장개석은 그의 심복이자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하충한(賀衷寒), 등문의(鄧文儀), 강택(康澤), 계영청(桂永淸)등으로 하여금 특무조직 "중화민족부흥사(中華民族復興社. 파시스트조직 이탈리아의 黑衫黨, 독일의 褐衫黨을 본떠서 藍衣社라고도 불렀다)"를 만들게 하며, 장개석은 13명을 핵심인물로 하여 조직의 골간으로 삼는데, 이들을 "십삼태보"라고 불렀다.

 

구성원은 위의 네명 외에 유건군(劉建群), 풍제(悌), 정개민(鄭介民), 증확정(曾擴情), 양간교(梁干喬), 초찬육(肖贊育), 등걸(杰), 대립(戴笠), 호종남(胡宗南)을 말한다.

 

후당태조 이극용의 십삼태보

 

중국역사사전에서 십삼태보의 해석은 후당태조 이극용의 열세명의 의자(義子, 양아들)를 십삼태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극용에게는 13명의 양자가 있었는데, 모두 태보(太保)의 관직을 받았다(태보는 관명이기는 하지만 실직-실제 업무가 부여되는 직위-은 아니었다).

 

대태보 이사원, 이태보 이사소, 삼태보 이존훈, 사태보 이존신, 오태보 이존진, 육태보 이사본, 칠태보 이사은, 팔태보 이존장, 구태보 이존심, 십태보 이존현, 십일태보 사경사, 십이태보 강군립, 십삼태보 이존효.

 

이존효에 대한 이야기는 원나라때 가장 유행하였다. 희곡가인 관한경은 <<곡존효>>라는 희곡을 썼고, 무명씨의 <<존효타호>>라는 희곡도 있다. 관한경의 극에서 이존효는 "본래 성이 안이고 이름이 사경(思敬)이다...양부 이극용이 모가 호랑이를 때려잡는 힘이 있는 것을 알고는 불러서 양자로 삼았고, 나를 십삼태보 비호장군 이존효로 삼았다" 이존훈은 바로 나중에 후당의 장종이다. 즉위한 후 후량, 거란, 그리고 유주의 유수광을 평정해서 천하를 풍미했다. 이사원은 바로 후당의 명종이다.

 

왕양림의 십삼태보

 

수나라말기에 고산왕(山王) 왕양림(王楊林)에게도 십삼태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공들은 모두 별로여서, 가장 뛰어난 진경(秦瓊)이 수당에서 13번째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풍옥상의 십삼태보

 

풍옥상(馮玉祥)의 수하에도 십삼태보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르키는지에 대하여는 서로 설이 다른데,

 

하나는 한복거, 석우삼, 손연중, 손양성, 장유새, 유여명, 동린각, 과지강, 갈금장, 문승열, 정희현, 한다봉, 한점원을 가리킨다고 하고,

 

다른 일설에는 부작의, 장자충, 송철원, 풍치안, 조석빙등을 앞에서 뒤에 언급된 사람들을 대체하여 말하기도 한다.

 

풍옥상의 십삼태보에는 용사(龍蛇,. 용과 뱀)가 섞여 있다. 항전순국한 영웅으로는 장자충과 동린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