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어 관리가 되는 것은 중국고대선비들의 이상이었으며, 각 시대의 통치자들은 지식인의 역할을 중시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일찌기 관리가 되려는 모든 자들은 거세를 하여 환관이 되도록 한 적이 있다. 이 기괴한 왕조는 바로 오대십국(五代十國)중의 남한(南漢)이었다.
남한은 중국의 남방에 위치하고 있다. 국왕 유성(劉晟)이 단약(丹藥)을 먹다가 목숨을 잃은 후, 새 국왕 유계흥(劉繼興)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환관인 공징추(龔澄樞)를 매우 신임했고, 국가의 모든 정책은 공징구에게 맡겨버렸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은 재능이 있는 자나 글을 읽어 진사, 장원에 합격한 자는 모두 거세하여 환관이 되도록 한 후에, 관리로 임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화상이나 도사가 유계흥과 선이나 도에대하여 논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먼저 거세를 한 후에만 만날 수 있었다.
유계흥이 보기에, 관리들이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처자가 있으면, 황상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부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이 거세를 한 후에 관직을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한은 거의 환관의 나라로 되어 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아직 거세하지 않은 사람은 문외인(門外人), 이미 거세를 한 사람은 문내인(門內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계흥이 환관을 중용하고, 모든 일에서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그 때 환관중에 진연수(陳延壽)라는 자가 있었는데, 아주 무뢰한이었고, 부녀를 간음하다가 거세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위복으로 궁중의 내시가 되었다. 그는 아부를 잘하고, 눈치가 빨랐으므로 서서히 유계흥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진연수는 유계흥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여자무당인 번호자(樊胡子)를 추천해서 궁내로 들어오게 하였다. 번호자는 신선을 강림하게 하거나 부적을 만들어서 벌어먹고 사는 여자였다. 그녀는 스스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유계흥을 보좌하여 사해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하여 내려왔다고 말했다. 유계흥은 반신반의했다. 번호자는 머리에 원유관을 쓰고, 몸에는 자하거를 입고, 허리에는 금군을 매구, 발에는 주홍리를 신고,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게 차려입고 옥황상제가 몸에 강림한 것처럼 하여 유계흥은 원래 옥황상제의 태자인데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고,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옥황상제가 반호자, 노경선(盧瓊仙), 공징추, 진연수등을 인간세상에 강림하게 하여 태자황제를 보필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네 사람도 모두 천상의 신선이며, 우연히 죄를 범하여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고 말하였다. 유계흥은 급히 땅바닥에 엎드려 하늘에 큰 절을 하였다. 이후에 궁중에서는 유계흥은 태자황제라고 부르게 된다.
유계흥도 스스로 옥황상제의 태자로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더이상 두려움이 없이 더욱 포악해졌다. 그는 소, 주, 검, 척, 검수, 도산등 각종 잔혹한 형벌을 만들었다. 신하나 백성들에게 약간의 잘못이라도 있으면 독형으로 처리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심지어 잘 아는 사람들이 길가다가 만나도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말은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후원에 호랑이 표범과 같은 맹수들을 길렀고, 범죄를 저지르면 옷을 벗겨서 맹수들의 틈으로 넣어서 맨몸으로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와 싸우도록 하였다. 유계흥은 후궁시첩들을 데리고 누상에서 이를 보았으며, 참혹한 비명을 들을 때마가 박장대소를 하였고, 이를 즐겼다.
내시인 이탁(李托)에게는 양녀가 둘이 있었는데, 모두 예뻤다. 궁중에 들어온 후, 큰 딸은 귀비(貴妃)가 되고 작은 딸은 재인(才人)이 되었다. 유계흥은 그 둘을 매우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밤 이씨자매와 술을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 술을 마신후에는 죄를 범한 자를 맹수에 물어뜯기게 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유계흥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평소에 싫어하던 대신을 붙잡아와서, 삷거나 피부를 벗기거나, 검수에 오르게 하거나 도산으로 가도록 했다. 문무대신들은 모두 전정긍긍하고, 유계흥을 만나는 것을 무슨 염라대왕을 만나듯이 하였다.
유계흥은 자주 바깥으로 미행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한 두명의 내시만 데리고 갔다. 어떤 때는 혼자서 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주점, 식당, 화류계등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운나쁜 백성이 그와 맞부닥쳐서 한두마디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바로 그에게 찍혀서 병사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혹형을 당하여 죽게 되었다. 당시 남한의 백성들은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황제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바로 입을 닫고 말조차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계흥은 성격이 포악하였지만, 그의 손재주는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자주 진주를 엮어서 구슬을 가지고 노는 용의 모습을 만들었는데,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시켜서 진주를 캐게 하였는데, 많을 때는 3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궁중에 일이 없으면, 물고기머리뼈로 탁자를 만들고, 누야자로 주전자를 만들었는데,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아주 뛰어난 장인들도 유계흥이 만든 것을 보고는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고 한다. 유계흥은 진주로 궁전을 장식하고, 호화롭기가 극에 달하였다. 합포에 미천도를 두어, 병사 8천으로 하여금 전문적으로 진주를 캐도록 하였다. 진주를 캘 때는 돌맹이를 백성의 발에 묶어서 바라 칠백척의 깊이로 들어가게 하여 익사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남한은 땅이 좁고 척박하여, 유계흥이 사치를 하게 되자 국고가 금방 비어버렸다. 유계흥은 더욱 세금을 늘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돈을 납부하게 하였고, 쌀에도 세금을 붙였다. 매년 수입은 모두 궁전을 짓거나 노는데 썼다. 환관 진연수는 각종 명목을 만들어 매일 수만금을 낭비했다. 진연수는 유계흥으로 하여금 여러 왕족을 없애서 후환을 없게 하자고 건의하여 유씨종족을 모두 죽여버린다. 옛날의 신하나 장군들도 죽지 않으면 도망쳤다. 그리하여 조정에 신하들이 거의 없게 되었고, 그저 이탁, 공징추, 진연수와 환관들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군대가 토벌하러 왔을때도 유계흥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송나라의 병사들이 하주에서 30여리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야 유계흥이 소식을 들었다. 이 때 남한의 병사를 쥐고 있던 것은 모두 환관이고, 여기에 궁전을 지으면서 아무런 방비조치를 해놓지 않아서, 유계흥은 속수무책이었다. 당히 궁녀중에 양난진이 곽숭악을 부르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곽숭악은 원래 미신을 믿고 날로 귀신에게 기도하는 자였다. 그리하여 천병을 불러 송나라군대를 물리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곽숭악이 매일 기도를 해도 아무런 효험이 보이지 않았다. 송나라병사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고, 유계흥은 급히 십여척의 배를 구해서 금은보화와 후궁을 싣고 도망치고자 한다. 그러나, 도망도 치기 전에 환관인 악범이 배를 훔쳐 달아나고 만다. 유계흥은 어쩔 수 없이 송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남한은 성립부터 멸망까지 65년간 존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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