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사마천(司馬遷)의 부인 유천낭(柳倩娘) 이야기

중은우시 2010. 12. 13. 15:53

글: 소안남비(蘇雁南飛)

 

 

 

 

오늘 사마천의 <<염포인상여열전>>에 대하여 강의를 하면서, 사마천을 소개하는데, 어떤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사마천이 부인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가지고 아래에 기록하니, 잘못된 점은 전문가들이 지적해주기 바란다.

 

민간전설과 관련자료에 따르면, 사마천의 처인 유천낭은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진안현 북쪽) 사람이다. 그리고 서한의 명장 이광(李廣)의 외손녀이며, 부친인 유진정(柳振庭)은 시서화에 뛰어났던 독서인이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유천낭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5살에 부친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벽에 작은 동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10살때 산수, 인물, 화훼, 새, 나무를 그려서 동네사람들이 소화가라고 불렀다. 15살에는 <<육경>>을 통독하고, <<장자>> <<이소>>등 명저를 읽었다.

 

15세때 모친을 따라 장안으로 외조부 이광을 보러 갔는데, 사마천의 글을 보고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사촌오빠인 이릉(李陵)의 도움을 받아 몰래 사마천의 얼굴을 살펴보고,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미모는 선녀같고 몸매는 제비와 같았던 유천낭을 이광리(李廣利)가 보고는 반해버려,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한다. 유천낭은 죽어도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고, 이광리의 강압을 피해서 태사부 사마천의 집으로 도망친다. 이때부터 박학다식한 사마천과 서로 알게 되고,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광리는 이릉, 사마천과 원수지간이 된다.

 

유천낭은 사마천을 따라서, 명산대천과 역사명승을 돌아다닌다. 강회, 여산, 구의산, 장사등지를 가보고, 그곳에서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지도도 그리면서 풍찬노숙하며 사마천이 <<사기>>를 쓰는데 필요한 상세하고 가치있는 사료를 모아준다.

 

사마천이 유천낭과 결혼한 후, 사마천이 부친과 장강남북을 돌아다니고, 서남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황제를 모시고 전국을 순유할 때 얻은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 유천낭은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자료의 고증을 도운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후에도 사마천이 부친의 유지를 이어 <<사기>>를 완성하도록 격려한다.

 

사마천이 다시 감옥에 갇힐 때, 유천낭은 대의를 깨달아 <<사기>>정본을 가지고 암자로 들어가서, 성과 이름을 숨기고,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사기>>를 세상에 내놓을 날을 기다렸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고상한 것은 사마천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중화문명의 사책에 새겨져 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사마천의 사당을 세울 때, 그리고 사당 안에 사마천의 조각상을 세울 때, 그에게는 수염을 지닌 늠름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310년 사마사(司馬祠)를 건립할 때는 사마천의 조각상이 없었다. 1125년, 한성현령 윤양은 현지의 선비들과 사마씨집안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사사마천사(太史司馬遷祠)를 건립한다. 사당안에는 사마천의 화상이 걸려 있었다. 윤현령은 송나라때의 전적에 나오는 사마천의 화상을 모두 모았다. 그것들은 모두 궁형을 당한 후에 수염이 없는 '부인모습'의 인물상이었다. 사마씨 들은 이런 화상을 거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사마씨문중에 따르면, 사마천이 감옥에 갇힌 후, 유천낭은 <<태사공서>>를 감추기 위하여 남편과 이별하고, 이름과 성을 바꾸어, 사마천의 고향인 한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사마천이 죽은 후, 그녀와 아들 사마림(司馬臨), 사마관(司馬觀)은 사위인 양창(楊敞), 외손자인 양운(楊惲)을 통하여 사마천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셔와서 안장한다. 그리고 측백나무를 심어서 표시하고, 아침 저녁으로 돌봐준다. 유천낭은 사마천이 20세때부터 55세까지, 매년 사마천을 위하여 1장씩 년도별 화상을 그렸다. 모두 35폭을 그린 것이다. 사마천의 48세 이전의 화상에는 모두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휘날린다. 그러나, 이 화상은 사마씨가족이 전란을 피하다가 잃어버렸다고 한다.

 

윤현령은 사마천의 고향에는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사방으로 알아본다. 마침내 지천의 어느 곳에서 사마천의 장년의 화상 하나를 찾아내고 만다. 화상의 선은 정교하고, 용모도 진짜와 같았다. 윤현령은 사마씨 집안 사람들에게 확인받았다. 화상을 보자마자 사마씨 집안사람들은 바닥에 꿇어앉아 절을 하며 통곡했다. 이 화상에 근거하여 윤현령은 공자 조각상을 만든 바 있는 대가에게 사마천의 조각상을 만들게 한다.

 

민간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사마천이 수염을 달고 있는지 아닌지가 왜 이렇게 중요했을까? 거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후, 생리변화로 목소리와 행동이 여자처럼 바뀌었다. 수염은 점점 떨어져 나갔다. 사마천의 부인 유천낭은 화가로서 남편의 일생의 각 시기에 용모를 모두 그림으로 남겼다.

 

한 해는 그녀의 아들 사마강(司馬江)이 돌연 지수암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태행산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그는 혼나서 수도 장안으로 숨어들어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고, 유골을 고향으로 가지고 왔으며, 새로 이전한 마을의 노우파에 매장했다. 그가 암자로 찾아가서, 모친에게 함께 태행산으로 가자고 권한 것이다.

 

헤어질 때, 유천낭은 상자에서 오랫동안 보관해왔던 남편의 화상을 꺼내들고, "아들아. 이것이 네 부친의 유용(遺容) 30폭이나. 이것을 집안대대로 전해야 한다. 기회가 있어 부친의 상을 만들 때가 되면, 절대로 궁형을 받은 후의 수염이 없는 모습이 아니라, 궁형을 받기 전의 수염이 있는 모습으로 만들도록 해라."

 

사마강이 물었다: "상은 후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인데, 왜 그러지 않고 전기의 모습을 따르려고 합니까?" 그러자, 유천낭이 통곡을 하며 말했다: "아들아. 혼군이 충신을 해한 것인데, 네 부친에게 궁형을 내린 것은 악독한 음모가 숨어있다. 그들은 네 부친이 비록 사내대장부이지만 실제로는 아녀자처럼 아무 쓸모없다고 모욕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우리 집안의 큰 수치이다. 너희들은 자손으로서, 그의 상을 남길 때 그의 대장부로서의 진면목을 남겨야 한다. 만일 수염이 없는 아녀자얼굴같은 것을 남기게 되면 스스로 쓸모없는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현재 사람들이 보는 사마천의 조각상은 수염이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