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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궈메이 황광위 사건

황광위주변의 3여인간 권력각축

by 중은우시 2010. 11. 14.

 

: 왕명용(王明勇)

 

황광위-천샤오의 싸움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 싸움을 되돌아보면, 황광위와 가장 가까운 3명의 여인이 가족내부의 권력투쟁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결국 황광위-천샤오 싸움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같다.

 

궈메이의 창업자인 황광위의 사건이 터진 후, 그의 두 여동생인 황슈홍, 황얜홍이 떠밀려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거기에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된 황광위의 처 두줸까지 가담하여, 세 여인이 포스크황광위시대의 황씨가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가족기업의 최대장점은 태생적인 신뢰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씨집안에서는 이런 태생적인 신뢰조차도 계속하여 도전을 받아왔다. 3 여인간의 권력투쟁은 일찌감치 궈메이가 잘 나갈 때도 막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황광위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이 재벌가문의 내부투쟁은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고, 궈메이제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좌우하게 되었다.

 

1997, 황광위의 사업이 급속히 발전할 때, 큰여동생 황슈홍과 남편간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갈등의 초점은 작은여동생 황얜홍과 서로 사랑하던 장즈밍(張志銘)에 집중되었다. 여러해 후, 황씨집안을 취재한 적이 있는 장샤오핑은 그간의 은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황슈홍의 당시 남편은 같은 고향사람으로 제1차로 궈메이에 직원으로 들어온 사람이다. 1991 21살이던 황슈홍은 회사재무부서에 들어갔고, 이때 남편은 이미 궈메이의 재무경리였다. 두 사람은 업무접촉과정에서 호감을 가졌고, 1994년 결혼을 하고, 금방 딸까지 하나 낳는다.

 

황슈홍이 결혼하는 해에 나이 19살인 황얜홍이 궈메이에 입사한다. 처음에는 출납담당이었지만, 1996년에는 본사의 재무경리가 된다. 1997년에는 궈메이의 고위행정관리직을 맡기도 했다. 그후에는 재무부총경리를 지낸다. 장샤오핑의 회고에 따르면, 황얜홍은 형제자매중 막내였고, 약간 버릇이 없었다. 자신의 이익과 자기 남편의 이익에 아주 민감했다. 그런데, 황광위는 이 막내여동생이 그렇게 하는 것을 용납해주었다 장즈밍은 원래 황광위의 운전기사였다. 황얜홍과 서로 사랑에 빠진 후, 궈메이에서의 지위가 급격히 올라간다. 1997년에는 궈메이의 상무부총재까지 오른다. 이때부터 궈메이전기의 업무에 전면적으로 관여한다. 같은 해, 궈메이계의 핵심기업인 펑룬(鵬潤)투자가 설립된다. 황광위가 80% 지분을 보유하고, 나머지 20%를 황얜홍이 가진다. 황슈홍 부부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장샤오핑은 장즈밍이 황슈홍의 남편보다 젊고, 더 늦게 궈메이에 들어왔는데, 장즈밍의 승진이 더 빨랐다. 그러다보니, 황슈홍의 남편은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황슈홍은 전남편과의 갈등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주 나에게 불평했다. 너는 왜 네 동생처럼 남편을 도와주지 않느냐 그는 내 마음이 그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큰여동생의 결혼을 유지시켜주기 위하여, 황광위는 한 때 큰매부를 풍룬지산의 부총재라는 위치로 끌어올린 적도 있다. 그러나 장즈밍이 더 잘나갔다. 1998년 황얜홍과 정식 결혼한 후, 황광위에게서 궈메이전기의 총경리 직을 넘겨받는다.

 

장즈밍이 잘나가는 것이 황슈홍가정갈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그의 불만은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에서 점차 가정폭력으로까지 바뀌어갔다 그 사이에서 황슈홍은 오빠의 편에 서고, 2001년 전남편과 이혼한다. 그녀의 혼인은 가정투쟁의 희생양이 된다.

 

같은 자매이지만, 큰집안작은집안을 선택하는 문제에서, 황얜홍은 황슈홍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황얜홍의 남편 장즈밍은 궈메이 발전사상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궈메이의 여러가지 중대한 의사결정은 그의 손을 거쳤다. 궈메이전기의 성장이든 아니면 2004년 궈메이의 우회상장 성공이든, 모두 그가 관여했다. 그는 심지어 한때 궈메이의 상징이 된다.

 

공로가 너무 높아서 주군을 누르면 안된다. 장샤오핑의 회고에 따르면, 한번은 황광위와 장즈밍이 텐진에 시찰을 가게 되었는데, 직원들이 모두 장총만 찾고, 황광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황광위는 본사로 돌아오자마자 회의를 열어서 분노하여 말했다: 내가 황광위다. 모두 나를 알고 있지 않느냐. 궈메이는 내 거다. 내가 바로 궈메이전기의 오너이다

 

2004, 장즈밍은 펑룬지산의 총경리를 맡기 시작한다. 궈메이제일성을 개발하고, 황광위의 자금지원이 없는 상황하에서, 일관된 저가전략으로 일거에 북경에서 판매금액이 가장 많은 단일 프로젝트가 된다. 그후, 황광위는 펑룬지산의 지배권을 회수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황광위에게 고개를 숙이고 따르던 장즈밍이 처음으로 강경함을 나타내어 황광위와 한바탕 싸우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결렬된다. 2005년 하반기, 장즈밍은 북경명천부동산개발유한공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펑룬지산의 명칭과 브랜드는 황광위에게 돌려준다. 황광위는 여전히 명천지산의 60%지분을 가지고 있지만, 장즈밍과 황얜홍이 각각 20%씩을 보유하고 있다. 황광위에게 수억위안의 이윤을 분배해준 후에 명천지산은 장즈밍과 황얜홍이 100% 보유하게 된다.

 

황광위, 장즈밍의 갈등에서, 황얜홍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궈메이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에 따르면, 황얜홍이 지원해주거나 최소한 허락하지 않고서는 장즈밍이 감히 공공연히 황광위에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 황얜홍은 당시 젊고 기가 셌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녀와 장즈밍은 누가 누구를 선택하고,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지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일찍이 궈메이전기 결책위원회 발전전략연구실 주임을 지낸 후강(胡剛)은 이렇게 분석한다. 황얜홍이 한 모든 것은 사랑때문일 것이다. 당시 황얜홍은 남편을 돌봐주고 자식을 기르느라 바빴다. 아무 직위도 없었다. 일부러 자신이 세상과 담쌓고 지낸 것이다

 

그러나, 궈에이의 한 고위직을 지낸 인물은 다르게 해석한다. 장즈밍에 대한 사랑이외에, 황얜홍이 남편을 따라 떠난 것은 그녀의 올케인 두줸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황광위와 결혼한 후, 두줸은 중국은행에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자금조달분야에서 황광위를 위하여 길을 닦아주었다. 2002 8, 두줸은 궈메이전기 집행동사를 맡는다. 한때는 황광위의 두뇌라고도 일컬어졌다. 두 사람의 업무분장은 황광위가 전략방향을 맡고, 두줸이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었다.

 

황광위의 두 여동생과 비교하자면, 두줸의 개인능력이 더 뛰어났다 후강의 말이다. 회사에서, 두줸은 주로 투자관계의 건립유지와 구체적인 투자업무를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황광위는 당시 해야할 일이 많았고, 정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영어도 못한다. 많은 경우에 대외교섭능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할 줄아는 두줸이 맡았다. 그러다보니 두줸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또 다른 당시 궈메이 고위직은 더욱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회사내에서 두줸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세 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인정받는 여자였다. 황씨자매는 이에 대하여 분명히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장샤오핑은 한가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황슈홍과 두줸은 사이가 아주 좋다. 혼인중의 문제에 대하여 황광위에게는 말을 못해도, 두줸에게는 말을 했다. 두 사람은 한때 같은 단지에 살았고, 자주 왕래했다. 이에 대하여는 황얜홍이 어느 정도 배척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미묘한 심리적 영향때문인지, 장즈밍과 황광위의 갈등이 폭발하자, 황얜홍은 남편의 편에 선다. 그들이 독립을 하기로 했을 때, 황광위는 취재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한마디로 설명한 바 있다: 그녀는 이미 회사에 없다. 남편을 따라서 회사를 차렸다.

 

황얜홍이 떠난 후, 궈메이의 내부인원중 황광위를 제외하고는 황씨집안에서 황슈홍과 두줸만 남았다. 두줸은 황광위를 대신하여 궈메이 홍콩업무를 담당해왔다. 황슈홍은 궈메이의 권력핵심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2005, 황광위는 황슈홍은 상해로 파견보낸다. 거기서 궈메이의 화동지역을 책임진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임무였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중국가전소매업의 3위업체인 용러전기가 터를 잡고 있었고, 그 오너는 바로 황씨가족과 은원관계가 있는 천샤오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때 용러의 점포에 허실을 탐지하러 갔던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 용러의 직원들에게 발견되어 포위를 당하기는 했지만, 당시 상해궈메이전기 총경리 송린린이 나서서 그녀를 구해내기도 했다. 2006년 궈메이전기가 용러전기를 인수하는데 성공한 후, 천샤오는 단기필마오 궈메이본사에 부임했고, 황슈홍은 궈메이상해지구 총경리를 지냈다. 그녀가 관리한 점포는 110개에 이르렀고, 상해가전소매시장의 77%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다.

 

바로 상해에 있던 3년의 기간동안, 황슈홍은 궈메이의 권력핵심에 다가가게 된다. 내부인사에 따르면, 궈메이는 산동, 하문, 동북등지에도 점포를 냈지만, 많은 기업의 법인대표는 황슈홍이 맡았다고 한다.

 

2009 2 18, 상해는 비가 내렸다. 궈메이상해지구는 성장유지, 내수확대대회를 열었는데, 황슈홍의 고별연이었다. 둘째오빠 황광위, 첫째오빠 황쥔신, 둘째형수 두줸이 차례로 체포된 후, 황슈홍이 펑룬투자의 동사장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황광위가 창업한 백억위안짜리 금전제국의 대문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는 여전히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방대한 회의장에서 대회가 끝났을 때, 황슈홍은 만면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러해동안 그녀는 막냇동생에게 치이고, 그녀는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혼인생활도 포기했다. 그녀는 묵묵히 오빠의 곁에서, 아무 소리소문없이 권력핵심에 다가갔다. 그러나, 의외로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황씨집안의 권력최고봉에 오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황슈홍은 잘 알고 있었다. 둘째오빠 황광위가 그녀를 황씨가족을 대표하는 자리에 앉게 한 것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천샤오를 견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궈메이에 대한 지배권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것만이 그녀가 가족내에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천샤오가 내부인사변혁을 추진할 때, 황슈홍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대국을 장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녀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궈메이집단 내부인사에 따르면, 베인캐피탈이 진입한 것은 황슈홍과 궈메이경영진간의 힘겨루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궈메이의 자금줄은 당시에 아주 불안했다. 자금조달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천샤오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원했다. 30억위안의 자금이 확정되었다. 이는 황씨가족의 대주주지위를 유지하는 선이다. 이전에 돌던 소문에 따르면, 사모펀드인 KKR은 베인캐피탈과 공동으로 궈메이에 진입하기로 했었다고 하는데, 고문의 자격으로 나타난 베인캐피탈이 따낸 것이다. 이것은 황슈홍이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번의 부주의한 결정이 궈메이의 내분의 문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외에 황슈홍은 그녀가 바라던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황광위가 2008 11월에 체포된 후, 궈메이는 천샤오, 왕쥔저우, 웨이츄리등 3인으로 구성된 결책위원회를 둔다. 이 위원회는 궈메이의 권력중추가 된다; 황슈홍은 부총재인 리쥔타오, 모구이센, 순이딩등 11인과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본사와 전국각지의 일상경영과 관리를 책임진다. 이런 조직구조하에서, 황씨가족이 궈메이를 지배하려면, 반드시 결책위원회에 진입하여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했어야 한다. 황슈홍은 펑룬투자의 동사장을 맡은 후, 대주주대표의 자격으로 결책위원회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궈메이가 집행위원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할 때도, 그녀는 바램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황씨가족이 주도권을 잃게되는 원인이 된다.

 

황슈홍의 연이은 실수는 쫓겨난지 여러해인 황얜홍에게 기회를 주었다. 한편으로는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씨집안 내부권력재편의 핵심시기였기 때문이다.

 

2010 8, 황광위가족은 궈메이 대주주로서 5가지 결의를 내놓는다. 그중 하나는 바로 저우샤오춘과 황얜홍을 회사집행동사로 선임하는 것이었다. 이는 명확히 보여준다. 어떤 방식이든 간에, 궈메이를 6년이나 떠나 있었던 황얜홍이 다시 황광위의 신임과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고, 황씨집안의 권력핵심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동의 적은 천샤오이다. 황씨자매는 서로간의 은원은 잠시 접어두고 황씨권력을 보위하는데 힘을 합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대외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황씨집안 대변인이 매체와 만날 때, 자주 사용한 말이 황슈홍이 어떻고, 황얜홍이 어떻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황얜홍의 말이다. 이것은 황슈홍의 말이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

 

<<황광위진상>>의 작자인 리더린은 이렇게 분석한다. 과거의 행태로 보면, 황씨자매간에는 확실히 내부권력투쟁의 조짐이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저우샤오춘이 기용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황씨집안이 믿을 수 있는 전문경영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숨은 신호는 황씨자매 두 사람이 누구도 상대방이 올라가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저우샤오춘은 그 균형점을 딛고 낙점받은 것이다.

 

황광위 부인 두줸은 이런 교착상태에서, 황씨권력중심으로 되돌아온다. 8 30, 두줸은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2억위안의 벌금을 납부한 후, 석방되었다.

 

두줸의 인맥, 개인능력, 황씨가족에 대한 영향력의 면에서 모두 황씨자매보다 훨씬 나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조기석방은 궈메이쟁탈전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는 황광위에게 좋은 카드였다. 두줸이 석방되는 날에 궈메이는 돌연 탈황광위화는 매체가 잘못 보도한 것이라고 이전의 강경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두줸이 다시 나온 후, 1달여간은 무슨 실효성있는 거동을 보이지 않았다. 외부의 예상과는 차이가 컸다. 이는 황씨집안의 또 다른 막후역량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바로 한 여인인데, 황광위의 모친인 증찬정(曾嬋貞)이다.

 

9 10, 황씨집안과 관계가 밀접한 한 인사에 따르면, 현재 황씨집안의 갈등이 많고, 서로 싸우고 있는데, 황씨자매뿐만이 아니라고 한다. 황광위 모친과 황광위의 처도 있다고 한다. 황광위 모친과 두줸의 불화는 오래된 일이다. 이전에 황광위가 있을 때는 중간에서 조정을 했지만, 모친은 두줸을 항상 경계했다. 두줸이 이번 일을 주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황광위모친은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이 포스트황광위시대의 대표인물이 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에 비하여 두줸은 그다지 가깝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두줸이 법정에서 석방된 후 집안으로 돌아왔다. 황슈홍은 잠시 만나고 떠났고, 황얜홍은 아예 찾아오지 않았다. 황씨자매중에서, 황슈홍은 두줸과 한편이다. 그러나 황얜홍의 배후에는 장즈밍이 있어, 미묘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전에 황광위는 황얜홍을 집행동사로 지명했는데, 여러 기관에서는 장즈밍이 막후에서 조종했을 것으로 보았다. 장샤오핑에 따르면, 황씨집안에는 지금 경력있고, 능력도 갖추어 천샤오에 대응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궈메이의 경영권을 넘겨받을만한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기관으로부터 인정받고, 지도력도 갖추어 궈메이 직원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장즈밍도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나설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쌍방이 아직도 구원을 해소하지 못했고, 다른 한편으로 장즈밍이 황씨가족일에 너무 간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 두줸의 처지는 장즈밍과 비슷하다.

 

10 28, 두줸은 강경하게 카드를 던졌다. 두 가지 명확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특별주주총회이후, 창업대주주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합리적인 기간내에 협상의 전진이 없으면, 창업대주주는 비상장업무의 위탁관리를 종료하고, 다시 특별주주총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9 28일의 궈메이전기 특별주주총회가 종료된 후, 황광위가족, 베인캐피탈 및 천샤오를 대표로 한 궈메이전기경영진은 계속하여 접촉했다. 10 20, 두줸은 일거해결방안을 내놓았다. 궈메이의 향후 경영발전전략, 창업대주주의 동사회에서의 합리적인 의석수, 비상장점포의 통일경영등 여러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씨가족에 땨르면 현재 협상이 그다지 순조롭지 못하다고 한다.

 

포스트황광위 시대의 황씨집안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누가 황광위를 대표하여 궈메이를 지배할 것인가? 현재, 공동의 적이 있어 두줸과 황씨자매은 같은 편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전투의 결과가 나오고 나면, 궈메이의 권력을 놓고 혹은 가족재산의 지배권을 놓고 내부투쟁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