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나라말기의 "입헌"과 "혁명"

중은우시 2011. 6. 11. 23:49

글: 뇌이(雷)

 

청나라말기에 '입헌(立憲)'과 '혁명(革命)'의 시합에서 전자는 후자에 패배한다. 이는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후에 이어진 것이 재화가 끊이지 않는 사회의 대혼란이었기 때문이다. 소건(邵建)의 <혁명이 입헌을 억제하다>와 <입헌파의 민주노선도>는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얻는 것이 많게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는 남는다. 입헌은 왜 혁명에 억제당하였는가? 아름다운 '노선도'가 왜 실현되지 못했는가?

 

아무도 생각지 못했지만, 무창의거에서의 두 발의 총성은 대청왕조를 돌연 무너뜨려 버린다. 머리 미국 콜로라도에 있던 손중산은 다음날에야 비로소 신문을 보고 이 일을 알게 된다. 우연한 두 발의 총성이 왕조의 멸망을 가져왔다. 이를 보면 청왕조의 통치기반은 이미 근본적으로 동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여름, 손중산은 이홍장에게 서신을 써서, 개혁개념을 적어보내지만 거절당한 후, 즉시 급진적인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1895년말 그는 광주의거를 발동하나 실패한다. 1900년말, 그는 다시 혜주의거를 발동시킨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저번에는, 온 나라의 여론이 저주하고 욕을 해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5년이후에는 이미 일반인들이 나쁜 소리하는 것을 거의 들을 수 없고, 의식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성사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한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5년동안 청나라정부는 갈수록 개화되고 관용적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수록 우매하고, 전제적이 되었다. 먼저 피로 온화한 유신변법을 진압했고, 다시 서태후의 이익을 위하여 전민족의 재난을 댓가로 하여 만국에 선전포고한다.

 

거대한 압력하에, 청나라조정은 마침내 1906년 9월, 예비입헌단계로 접어든다. 이처럼 때늦게 민심에 순응한 조치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일부 대도시에서는 오색등을 내걸고 북과 징을 쳤으며, 학생, 시민, 상인들이 집회와 시위, 강연을 통하여 축하를 표시했다. 이는 많은 민중들, 특히 지식인 상인계층에서는 혁명은 좋아하지 않고 입헌을 지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민심을 중시하지 않았다. 입헌원칙에서, 청나라조정은 권력독점의 정도가 일본의 메이지헌법보다 더욱 심했다. 그 결과 온화한 입한파까지도 모두 반대의견을 표시한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1장의 텅빈 글은 줄지언정, 인민들에게 1치의 실제 일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민들이 이를 다투는 자들은 실제 일을 다투어야 하고 텅빈 글을 다투어서는 안된다" 1910년 1월부터 11월까지, 1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지방의 선비들을 위주로한 입헌파는 4차에 걸친 대규모 국회청원운동을 벌인다. 그 기세는 대단했고, 전국에 미쳤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전혀 타협하지 않는다. 약간의 권력도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국회소집개최를 거절한다. 오히려 갈수록 격렬한 수단으로 입헌운동을 진압한다.

 

이렇게 하여, 입헌과 혁명의 경기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 원래 순수히 이론적으로 보면 입헌파가 훨씬 이치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의 이론전제는 청나라정부가 압력을 받아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고, 입헌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이론이 아무리 이치에 맞더라고,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점을 혁명에 반대하는 양계초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본 것은 많은 일본유학생들이 청나라조정의 '가짜입헌'으로 인하여 입헌을 지지하던 태도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확실히, 청나라정부의 행위는 청년들로 하여금 혁명파의 선전을 믿게 하였다. 그래서 1907년초 그는 <현정부와 혁명당>이라는 글에서, "혁명당이라는 것은 현정부를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이다. 그리고 현정부는 혁명당을 만들어내는 큰 공장이다." 이 말은 정곡을 찔렀다.

 

신해혁명 전야인 1911년 5월초, 청나라조정은 권력을 독점하는 '황족내각'을 출범시킨다. 실제로 세상사람들에게 청나라조정은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 결과 통치기초인 선비계층이 신속히 멀어진다. 마지막에는 버리고 떠난다. 청나라정부는 정치적으로 변혁을 거부하고, 경제정책에서도 역행한다. 바로 1911년 5월에 '황족내각'을 내놓을 때, 청나라조정은 원래 주식제인 민영철도를 국유화하겠다고 한다. 자신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하여, 상안, 지식인을 위주로 한 몇 개성의 주주들은 '보로운동'을 벌인다. 사천의 보로운동의 풍조는 상대적으로 격렬했다. 이는 결국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그러나, 사천의 보로운동의 지식인 상인 우두머리는 처음에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문명적인 방식을 견지한다. 그들은 광서의 신위와 이전에 내린 유지중 '서정공제여론(庶政共濟諸輿論)', '처로준귀상판(川路準歸商辦)'이라는 두 구절을 집집마다 붙이게 하고, 향안을 만들어 향불을 사른다. 이런 여러가지는 문명적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고, 온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이성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며, 절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청정부는 9월초에 보로운동을 지도한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곧이어 성도에서 총을 쏘아 30여명의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평화적인 청원자들을 죽인다. 이런 상황하에서, 입헌파는 혁명에 기울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혁명은 바로 숙명이 된 것이다.

 

'입헌'이 '혁명'에게 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서는 안된다.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보아야 한다. 입헌파의 '노선도'는 확실히 완벽하다. 그러나 청나라정부의 행위는 이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결국, 입헌은 청나라정부가 억제한 것이다. 근대중국의 급진은 청나라정부의 극단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혁명파를 급진적이라고 질책하기 보다는, 통치자들의 완고한 극단을 비판하는 것이 옳다. 민중들에게 급진적인 혁명에 빠지지 말라고 호소하기보다는, 통치자들에게 극단적인 완고함을 버리고, 개혁을 하도록 호소하는 것이 낫다. 그럿이야 말로 '급진'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