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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장지동(張之洞): 청나라말기의 풍운인물

by 중은우시 2011. 2. 28.

 

: 월초(越楚)

 

 

 

청나라말기 정계의 풍운인물을 꼽자면, 장지동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장지동이 청나라말기의 관료사회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평보청운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시대를 앞선 생각, 남다른 정치적 업적때문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는 정계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청나라말기의 실질적인 일인자였던 서태후가 중시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장지동이 관직에 나가는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렇지만 관직에 나가기 전에 이미 서태후에게 이름을 알려놓았다. 이것은 서태후에게 남긴 아주 중요한 첫인상이다.

기연은 바로 장지동의 같은 일족의 형이 되는 장지만(張之萬)이 서태후에게 그에 대하여 얘기를 해놓은 것이다. 장지만은 장지동보다 27살이 많고, 도광27년 정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며 나중에 대학사에까지 오른다. 그러므로, 장지동은 조정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장지만은 장지동이 청나라정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조정의 아는 사람때문에 오히려 그는 청나라의 공무원이 되는데 늦어지게 된다.

장지동은 천성이 총명하여, 16세때 순천향시에서 1등을 하여, 소년 해원(解元)’이 된다. 원래 한꺼번에 진사급제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11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장지동이 거인이 된 후에 귀주지부를 하고 있던 부친을 도와 군무를 처리하고, 다시 처를 맞이하고 자식을 낳는다. 게다가 부친이 임지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정우(丁憂)로 삼년상을 치른다. 그러다보니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

 

23세가 되어 회시(會試)에 참가하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족형인 장지만이 시험관이 된다. 청나라의 과거시험에서는 순례회피(循例回避)”의 규정이 있었다. , 시험관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떤 것이다. 그리하여 장지동은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잃는다.

다음 해 은과회시가 열리는데, 시험관이 또 장지만이었다. 장지동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순례회피해야 했다.

동치원년(1862), 장지동은 비로소 회시에 참가한다. 시험관인 범학생(范鶴生)이 그를 적극 밀었지만, 결국은 낙방하고 만다.

 

장지동이 진사급제(進士及第)한 것은 동치2(1863)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해에 서태후는 원래 장지만을 회시총재로 삼으려 했다. 하루는 아무 생각없이 소보(小報)에 실린, “장해원유혜교대(張解元幼慧巧對, 장해원 즉 장지동이 어려서 총명하여 대련을 교묘하게 답했다)”라는 내용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평소에 대련(對聯)에 흥미가 있었던 서태후는 글에 나오는 16살에 향시에서 1등을 한 신동 장지동에 대하여 흥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장지만도 같은 지방사람인 것을 알고는 장지만을 불러서 장지동에 대하여 물어본다. 그리하여, 장지만이 시험관을 맡는 바람에 두 번이나 회시를 놓쳤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서태후는 만주족 보균(寶鈞)을 회시총재로 앉혔다고 한다. 장지만은 장지동이 시험을 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시험관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 소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장지동이 진사급제하기 전에 이미 서태후는 그가 얻기힘든 기재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후의 회시에서 장지동은 순조롭게 141명의 공사(貢士)에 들고, 여전히 시험관을 맡고 있던 범학생은 이를 제목으로 시를 지었으며, 장지동도 시를 지어 화답하여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이를 보면, 장씨집안과 범학생간에는 집안간의 교분이 있었던 것같다.

장지동은 복시(覆試)에서 1갑제일명(一甲第一名)을 한다. 그런데 전시(殿試)의 책론에서 당시의 폐해를 정곡을 찔러 지적하는데 너무나 날카로왔다. 그리하여 시험지를 채점하는 대신은 그가 지나치게 광망하다고 생각하여 1갑제일(一甲第一)에서 3(三甲)의 꼴찌로 내려보낸다.

 

이때, 보균이 나서서, 장지동을 2갑제1(二甲第一名)으로 한다. 명단이 서태후의 수중에 들어가자, 장지동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장지동은 1갑제삼명(一甲第三名)으로 올려준다. , 속칭 탐화(探花)”에 오른 것이다.

청나라때 진사는 3(三等)으로 나누는데, 1(一甲) 3명 즉 장원, 방안, 탐화를 진사급제(進士及第)”라고 부르고, 이갑(二甲) 7명을 진사출신(進士出身)”이라고 부르며, 3(三甲) 약간명을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라고 불렀다.

 

당시 서태후가 친히 정한 장원은 옹증원(翁曾源)이었는데, 상숙사람 옹동서(翁同書)의 아들이고, 그의 넷째숙부인 옹동화(翁同龢)는 함풍6년의 장원이었고, 일찍이 광서제의 스승을 맡았던 인물이다.

방원은 만숭후(萬崇后)인데, 아마도 이름이 만사람이 태후를 존경한다는 뜻이라는데서 도움을 받지 않았나 싶다.

 

전설에 따르면, 신과진사수여의식이 끝난 후, 서태후는 옹증원, 만숭후, 장지동 3 명을 남게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련(上聯)을 내주고, 대련을 잘 만들면 자신의 제자로 삼겠다고 말한다

서태후가 내놓은 상련은 다음과 같았다:

낙수영귀헌후(洛水靈龜獻壽), 천수오(天數五), 지수오(地數五), 오오환귀이십오(五五還歸二十五), 수수정원시천존(數數定元始天尊), 일성유감(一誠有感)

 

장지동은 재능이 민첩했다. 차반잔을 마실 시간내에 서태후가 만족스려워할 하련(下聯)을 만들어냈다.

단산채봉정상(丹山彩鳳呈祥), 웅성육(雄聲六), 자성육(雌聲六).

육육총성삼십육(六六總成三十六), 성성축자희태후(聲聲祝慈禧太后), 만수무강(萬壽無疆)

 

장지동의 이 뛰어난 아부로 서태후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리고 장지동의 앞날은 탄탄대로가 된다. 그는 서태후의 제자가 되어, 한림원편수의 직을 받는다.

그후, 장지동을 명성을 크게 날리고, 관운도 형통하여, 계속하여 승진한다. 절강향시의 주시험관, 호북학정, 산서순무, 양광총독, 호광총독(그동안 두번이나 양광총독을 잠시 맡는다)에서 군기대신, 체인각대학사, 태자태보까지 오른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양무파의 대표인물이 된다.

장지동이 청나라의 풍운이 교차하는 정계에서 반석처럼 안정되고, 승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본인의 뛰어난 능력, 둘째는 장지만과 같은 조정의 아는 사람이 도운 것, 셋째는 서태후가 그를 특별히 아꼈다는 것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