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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의 기교: 황제의 자리에 어떻게 오르는가

by 중은우시 2010. 7. 15.

글: 왕립군(王立群)

 

한5년(기원전202년), 초왕한신(楚王韓信), 한왕신(韓王信), 회남왕영포(淮南王英布), 양왕팽월(梁王彭越), 조왕장오(趙王張敖), 형산왕오예(衡山王吳芮), 연왕장도(燕王臧)등 일곱명의 이성제후(異姓諸侯)는 공동명의로 상소를 올려,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칭호를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초왕한신을 위시한 일곱명의 이성제후가 왜 유방에게 존호(尊號)를 바쳤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왜 일곱명의 이성제후가 유방에게 '황제'라는 존호를 바쳤느냐는 것이다.

 

첫번째 문제는 이해하기 비교적 쉽다. 유방은 한신을 초왕에 봉하고, 팽월을 양왕에 봉한 후, 유방은 한왕(漢王)이었다. 한신은 초왕이고, 한왕신은 한왕이고, 영포는 회남왕이며, 팽월은 양왕, 오예는 형산왕, 장오는 조왕이었다. 모두 '왕(王)'으로 존비(尊卑, 위아래)가 정해지지 않았다. 일곱명의 이성제후는 한왕 유방과 대등하게 자리했다. 일곱명의 이성왕중에서 한신, 팽월, 영포, 한왕신, 장오등 5명은 유방이 봉한 것이고, 한왕 유방, 형산왕 오예, 연왕 장도는 항우(項羽)가 봉한 것이다. 천하에 이 여덟명의 왕이 있는데 존비가 확실히 문란했다. 한왕 유방의 지위는 다른 일곱명의 이성제후보다 확실히 높았다. 그러나 칭호상으로는 모두 '왕'이다. 이는 아래위가 없는 꼴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왕' 유방을 다시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존비고하가 일목요연하게 된다.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존호를 바치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조금 미묘하다. 일곱명의 이성제후가 공동으로 올려서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렸다. 왜 다른 존호를 올리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정치제도를 선택하는 것은 왕왕 역사에서 답을 찾게 된다. 유방의 앞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정치제도가 있었다. 하나는 상,주의 왕국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진나라의 제국제도이다. 항우가 선택한 것은 패왕(覇王)이었다. 패왕은 특정시기의 산물이다. 본질적으로는 왕국제도이다. 왕국제도의 중후기에, 천자는 진정한 지배자가 아니었고, 제후중 강한 자가 패왕이 되었다. 그래서 패왕은 본질적으로 왕국제도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일곱명의 제후가 굳이 '황제'라는 존호를 선택하고, 패왕같은 다른 존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사기>>, <<한서>>에는 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다. 유방에게 존호를 올리는 이런 큰 문제에 대하여, 일곱명의 이성제후는 분명히 서로 연락하고, 협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일체 기록이 없다. 사서에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사서에 기재되지 않은 것들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일들은 수도없이 많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내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공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 이후에 어떤 존호를 원하는지를 얘기한 바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유방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첫째, 유방의 목표는 천하를 얻는 것이었다. 무섭(武涉)이 한신에게 유세할 때 유방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뜻은 천하를 다 삼키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데 있다" 이것은 항우집단이 유방이 함곡관을 나선데 대한 해석이었다. 이 점에 대하여 일곱명의 이성제후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천하를 다 삼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존호는 무엇인가? '황제'뿐이다.

 

둘째, 유방의 행정건제는 군현제였다. 유방이 관중으로 돌아간 후 삼진왕(三秦王)을 폐하고, 관중에 '농서, 북지, 상군, 위남, 하상, 중지군'을 설치한다. 관외에는 '하남군'을 둔다. 이는 진제국의 군현제를 그대로 승계한 것이다. 한신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위의 땅에 '하동군'을 둔다. 유방은 진나라의 군현제를 승계했다. 이것은 결국 유방이 항우의 뒤를 이어 제국제도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셋째, 유방은 제후들의 공동명의상소에 대하여 묵인하는 태도를 취한다.

 

초왕한신을 위시한 일곱명의 연명상소후 한왕 유방은 이를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방과 같은 '대왕'이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추측하여 그를 위하여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제후왕들은 한왕 유방에게 존호를 올리는 3가지 이유를 내놓았다. 첫째는 공대(功大), 즉 공로가 크다는 것이다. 둘째는 덕후(德厚). 덕이 두텁다는 것이다. 셋째는 상하불분(上下不分). 즉 같은 왕의 칭호로는 상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한왕 유방은 공로도 많고 덕도 큰데, 다른 제후왕들과 상하구분이 되지 않으니 존호를 덧붙여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 이유는 바로 '사다리'이다. 유방을 위로 올라가게 하려면, 사다리를 준비해주어야 한다. 사다리가 있어야 사람은 위로 올라가기가 좋은 것이다.

 

유방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황제는 반드시 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내가 현명한 자가 아니라면, 존호를 덧붙이게 되면 명실상부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인가.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나를 높은 자리로 밀어올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유방의 이런 의사표시는 세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황제를 칭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둘째,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간 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 우려했다. 유방은 제후들이 권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격이 모자랄까 걱정된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유방의 의사표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는 것은 묵인이다.

 

만일 유방이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면, 그는 직접적으로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도 있었다. 다만, 유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우황들은 이 소식을 듣고는 바보라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한왕에게 '황제'라는 존호를 올리는 방법 자체는 맞는 것이었다. 다음에 할 일은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윗사람'이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제후왕들은 모두 한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감각이 뛰어났다. 유방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제후왕들은 두번째로 집단상소를 올리는데, 한왕에게는 3가지 큰 공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멸난진(滅亂秦)"이고, 둘째는 주불의(誅不義, 항우를 베다)의고, 셋째는 "공신이 모두 식읍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왕으로 칭하는 것만으로는 공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니, 황제의 지위에 올라가는 것만이 명실상부하게 되는 것이고 천하백성들의 행운이라고 하였다.

 

이번 상소는 유방이 진을 멸하고, 항우를 꺽고, 제후를 봉한 삼대공덕이 있으므로, 황제에 오르는 것만이 천하백성들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유방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인 사다리이다. 이 사다리를 가져다주었는데,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하백성을 실망시키는 일이다.

 

유방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는다. 그저 너희들이 나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리는 것이 천하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좋다라고 한다.

 

유방이 동의하자, 일곱명의 제후왕 및 태위 장안후 신관등 삼백명과 박사 직사군 숙손통은 길일을 정해서, '이월 갑오, 한왕에게 존호를 올린다" 유방은 정식으로 황제에 오르고, 왕후는 황후가 되며, 태자는 황태자가 된다. 자신의 생모는 '소령부인'으로 추존하여, 한왕에서 서한의 개국황제로의 변신을 완성한다.

 

이를 보면,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위로 올라가게 하는데  적합한 사다리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내려오게 할 때도 적당한 사다리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이를 넓혀서 보면, 다른 사람이 체면을 유지하면서 이를 하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한제국은 제후들이 적당한 사다리를 찾아내면서 탄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