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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역대제왕중 가장 멋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0. 6. 16.

글: 정계진(丁啓陣)

 

어떤 사람이 물어보았다: "역대제왕중 누가 가장 멋있나요?"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는 답했다: "역대제왕중 유방(劉邦)이 가장 멋쟁이지요"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받았기 때문에, 유씨집안에 대하여 원한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사기>>를 쓸 때, 혹은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유씨를 폄하했다. 당사자인 제왕 한무제 유철은 웅재대략를 지닌 인물로 중국역사상 일류의 제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붓끝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하루종일 그리고 평생동안 제사, 봉선등 미신활동에 바빴던 멍청한 군주처럼 그려졌다. <<사기. 효무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무제가 무슨 문무방면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부분은 모조리 사마천을 베꼈던 반고(班固)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무제기>>를 쓸 때는 자신이 새로 썼고, 사마천이 쓴 글을 베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한서. 무제기>>와 <<사기. 효무본기>>는 사뭇 다르다. 한무제의 문화건설의 업적을 기록했을 뿐아니라, <<찬>>에서도 높이 평가했다. 사마천의 <<태사공왈>>에는 한무제 유철에 대하여 좋게 말한 것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유철의 조상인 한나라 개국황제 유방에 대하여도, 사마천은 여러 곳에서 춘추필법을 사용하여 은근히 소인배로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기.고조본기>>를 통하여 유방이 얼마나 멋있는 인물인지를 알아볼 수가 있다.

 

첫째, 유방은 용모가 비범했다. "고조의 사람됨은 융준(隆準)하며 용안(龍顔)이었고, 미수염(美鬚髥)을 지니고, 왼쪽 넙적다리에 72개의 점이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코가 높고, 얼굴은 용의 모양이었으며, 멋있는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명천자를 나타내는 용안을 빼고 보더라도, 콧대가 높고, 수염이 아름다웠다면 멋있다는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것이다. <<사기>>에는 유방의 키가 얼마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하도>>에는 "칠척육촌"이었다고 적고 있다. 서한때의 도량형으로 보면 1미터77센티미터이다. 한나라때이건 지금이건, 받아들일만한 수치이다. 유방의 용모가 비범했다는데는 또 다른 유력한 방증이 있다. 여치의 부친인 여공이 그를 잘 보고 귀한 딸을 그에게 주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용모때문이었다. <<사기. 고조본기>>에는 관상을 좋아하는 여공이 '고조의 용모를 보고, 그를 존중해주었다"

 

둘째, 유방은 의복과 모자를 중시했다. 유방은 비록 하층출신이지만, 성년이 된 후에 오늘날로 말하자면 파출소장인 정장의 직을 맡게 된다. 농번기에는 집으로 휴가를 내서 식구들과 같이 농사를 짓는 그런 직위였다. 유방은 절반은 농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은 정장의 권력을 이용하여 단 두 명밖에 없는 부하중 하나인 설씨성의 병졸에게 대나무껍질을 이용하여 모자를 하나 만들게 한다. 유방은 자주 이 모자를 쓰고 다녔다. 황제가 된 후에도 자주 이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유씨관(劉氏冠)"이라고 불렀다. 존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는 명령을 하나 내린다: 제후, 공작이하는 이런 죽피모(竹皮帽)를 쓸 수 없다. 그가 이렇게 특별히 만든 대나무모자를 쓰기 좋아했다는 것을 보면, 유방은 입고 쓰는 것을 아주 따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유방은 성격이 솔직하다. 젊었을 때는 술을 잘 마시고, 여자를 좋아했다. 사람됨은 거침이 없었다. 그가 사수정장으로 있을 때, 조정관리에 대하여도 그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리고 큰소리를 잘 쳤다. 소하에 따르면 '유계(유방)는 큰 소리는 많이 하고,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은 드물었다' 유생들의 난체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유생의 모자를 빼앗아서 오줌을 싸기도 하였다. 항우가 그의 부친을 붙잡아서 그의 부친을 삶겠다고 협박할 때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시원하게 말했다: "내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다. 네가 굳이 네 아버지를 삶겠다면 나에게 살과 탕을 남겨서 맛좀 볼 수 있게 해달라." 황제가 된 후에 화려한 황궁을 보고는 득의만면하여 옛날에 자신을 자주 형보다 못하다고 욕했던 부친에게 말했다: "이제 내 재산을 형과 비교하면 누가 더 많으냐?" 이같은 사례는 아주 많다. 역대제왕중에서, 유방은 자신의 희노애락을 전혀 감출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넷째, 유방은 문예를 좋아했다. 당나라때의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시인 장갈(章碣)의 시 한 구절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유항원래부독서(劉項原來不讀書, 유방과 항우는 원래 글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유방에게는 약간 억울하다. 유방은 비록 박사는 아니고, 학자도 아니지만, 시를 쓰는 것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의 시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두 수이다. <<대풍가>>와 <<홍곡가>>이다. 이 두 수는 모두 우수한 시들이다. 그중 <<대풍가>>는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시를 썼을 뿐아니라, 유방은 노래도 잘했고, 악기연주도 잘했다. 그는 만년에 척부인과 함께 있을 때, 금슬화명(琴瑟和鳴), 재가재무(載歌載舞)했다는 기록이 많다. 유방의 문예쪽의 재능은 역대제왕중 일류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명신 위징의 유명한 말이 있다: "망국의 군주중에는 예술에 재능이 뛰어난 자가 많다." 유방은 개국군주로서 예술에 재능이 있었으니, 이는 아주 보기드문 경우이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 유방은 중국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강성했던 왕조를 개창했다. 서한왕조는 비록 2백년밖에 안되지만, 유씨의 후손인 유수가 건립한 동한왕조까지 합치면 근 4백년이 된다. 한왕조가 존재했던 시간이 가장 긴 것은 아니다(주나라가 더 길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가장 깊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성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당왕조는 모든 면에서 한왕조를 모범으로 삼아서, 그 길을 따라갔다. 당고조 이연부터, 당나라의 역대통치자들은 모두 한왕조를 숭상했고, 한나라때의 역사이야기를 하기를 즐겼다. 이연이 재위했을 때, 일찌기 묘우(廟宇)를 건립한 적이 있다. 이때 한고조와 주무왕을 함께 모셨다.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때 가장 걸출한 황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한왕조를 아주 숭상했다. 그가 내린 조서에는 한나라를 찬양하는 내용이 많고 한나라때의 일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나라의 사대부들은 입만 열면 한나라가 어떻고 저떻고 ,한나라사람들은 어떠 어떠했고를 애기했다. 두보를 예로 들자면, 그의 시가에서 한왕조를 가지고 당왕조를 빗대고, 한나아황제의 이름을 가지고 당나라황제를 비유하며, 한나라때의 인물을 끄집어내어 당대인물을 비유하는 일이 많았다. 조금만 깊이 연구해보면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한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청렴하고 가장 민주적이며, 가장 학문이 있던 왕조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나라의 강산은 바로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역대제왕중에서 유방보다 못한 자들은 수도없이 많다. 그러나 유방보다 멋있는 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