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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무림의 4대창법

by 중은우시 2009. 8. 20.

작자: 미상

 

명나라 가정36년(1557), 일대명장 유대유(兪大猷)의 절세작품으로 무술경전이라 불리우는 <<검경(劍經)>>을 정식으로 간행했다. 청나라 강희17년(1678), 저명한 무술가 오수(吳殳)가 쓰고 후세에 창법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수비록(手譬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사이의 120년간은 냉병기의 최고봉이었으며, 동시에 군대무예와 민간무예가 서로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시기로서 상호 보완해주면서 공동으로 발전하던 역사시기였다. 바로 이 특수한 역사조건하에서 유대유, 척계광, 당형천, 홍전, 정충두, 석전, 오수등을 대표로 하는 무술가와 창술가가 나타났다. 그들이 독자적으로 닦은 무공기예와 대량의 무공저술은 중국무술의 기술체계와 이론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무술문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창은 백병(百兵)의 주인이다. 창술의 발전사중에서 이 시기의 발전이 특히 돋보인다. 무림의 사대명창이라고 불리우는 양가창(楊家槍), 소림창(少林槍), 아미창(峨嵋槍), 오가창(吳家槍)이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하고 확립되었다.

 

첫째, 양가창

 

양가창은 창을 휘두를 때 이화꽃이 휘날리는 것같다고 하여, "양가이화창(楊家梨花槍)"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이화창(梨花槍)이라고도 부른다. 명나라때는 최상승의 창법으로 받들어졌다. 고대의 병법서인 <<진기>>, <<검경>>, <<무편>>, <<기효신서>>등에도 모두 기록이 되어 있다.

 

대중들이 양가창에 대하여 받는 인상은 대부분 양가장(楊家將)으로 인한 것이다. 이외에 <<사조영웅전>>등 소설의 영향도 있다. 양가창은 그리하여 무림에서 공인된 제1명창이 된 것은 송나라때부터라고 한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설이 없고, 고증이 필요하다.

 

일설에는 남송말기 홍요군(紅袄軍)의 수령인 이전(李全)의 처인 양묘진(楊妙眞)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송사. 이전전>>에 나온다. 다만, 양가창은 명청시기에 가장 널리 전파되고, 영향이 가장 큰 무술유파가 되었으므로 이 설이 근거가 있는지는 좀더 조사해봐야 한다. 척계광은 <<기효신서. 장병단용설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가창은 변화막측하고, 조화무궁하며, 천하가 모두 숭상한다." 유대유는 <<검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동, 하남의 각 처의 무술교사는 양가창법을 전했다" 오수도 <<수비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청양대에 이미 무림에 이름이 높고 존중받았다. 양가청이 고금에 이름을 날린 것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것이 비교적 일찍 계통적으로 완비된 창법이론과 정묘한 실용창법체계를 형성했다는 것때문이다."

 

양가창의 기격전술의 특징은 "빠름"을 위주로 하는 것에 있다. 허실을 겸비하고, 강유를 갖추었다. 초식을 펼칠 때 날카로움을 막을 수가 없고, 허실이 함께 들어있고, 물러날 때도 바람과 같고, 무게가 있고 기세가 크다. 양가창에는 뛰어난 점이 하나 있는데, 일단 성공한 후, 기세를 틈타서 공격하면, 적은 다시는 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승승추격(乘勝追擊)"을 잘 발휘한 것이다.

 

둘째, 소림창법

 

소림사는 곤법(棍法)의 기초 위에, 각 창법의 정화를 흡수하여 하나로 모았다. 그리하여 창을 위주로 하고, 곤법을 겸용하는 창곤합일을 이룬다. 힘이 장점이고 대봉대벽(大封大劈)과 맹붕경찰(猛崩硬擦), 강유겸시(剛柔兼施), 풍격독특(風格獨特)의 소림창법이 만들어졌다. 소림창법은 계통이 합리적이고, 정묘함과 실용성을 갖추고, 이치가 밝고 법도가 갖추어져 있어 무림인사들이 좋아했고, 빠른 시간내에 대강남북과 황하양안에 퍼져갔다.

 

소림창은 주로 홍전몽록당창법(洪轉夢綠堂槍法)과 정충두창법(程沖斗槍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몽록당창법은 소림사 제1대창법이다. 그것은 소림사의 무승인 홍전(洪轉)이 창안한 것이다. 오수는 <<무승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소림사 승려 홍전은 그쪽의 우두머리이다. 그가 저술한 <<몽록당창서>>에는 팔모, 육묘, 오요, 삼기의 법이 담겨 있다." "팔모는 근본이고, 육묘는 운용이고, 오요는 변화이고, 삼기는 기교이다. 이 모든 법을 다 쓰면 창은 모든 무예를 관통할 수 있다."

 

정충두(1561-?)는 소림사에서 무예를 십여년간 익혔다. 먼저 고승 홍전, 혼기의 진전을 얻고, 나중에 하남 이극복의 창기술을 배웠다. 정충두는 양자를 합하여 소림창법을 개혁했고, 새로운 소림창법을 창조해냈다. 그의 창법은 국내에 성행하고 명성을 얻는다. 명나라 천계원년(1621) 그는 60세때 <<경여잉기(耕餘剩技)>>라는 책을 완성한다. 이것은 척계광의 <<기효신서>>이후 또 하나의 완비된 무술전문저작이다. 후세의 무술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충두는 소림창법의 반도로 취급된다. 원인은 그가 "붕창법(崩槍法)"을 극력 제창했기 때문이다. 현대무술에서는 어느 창술유파이든 '붕창'은 반드시 들어가는 기술이다. 그러나 당시에 정충두는 이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 청나라때의 창술가 오수는 <<수비록>>에서 '붕"의 창법은 창법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정충두의 개혁을 부정하고, 그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비난했다.

 

셋째, 아미창법

 

'아미'라는 두 글자는 실제로는 고대의 '파촉(巴蜀)'의 대명사이다. 아미무술은 '파촉무술'이라고 해도 된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촉산(蜀山), 청성(靑城)등의 문파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문파는 주로 무협소설에나 나오는 것이지, 역사적으로는 상세한 기술이 없다. 왜냐하면 아미산이 불교성지인 관계로, 아미무술은 불교사상예술과의 연결을 벗어날 수 없다. 소림과 비교하자면, 아미창법은 초식이 우아하며 아름답고, 힘이 넘치며, 보법과 신법이 민첩하고, 창술이 종횡으로 갈리고, 변화무궁하다. 소위 "창이 마치 노는 용처럼 움직이고 춤추면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교묘하고 변화무궁하다"  우아하고 표일하다는 것이 일반 대중들이 아미창법에 대하여 가지는 인상이다.

 

아미창법은 명청의 창법유파중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 창시자는 사천 아미산의 보은선사(普恩禪師)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보은은 기인을 만나서 독특한 창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는 2년동안 밀실에서 연습하여 창법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창은 무림에 당할 자가 없고, 세상에 이름을 날린다. 나중에 휘주의 정진여(程眞如)와 월공행자(月空行者)에게 전수해준다. 두 사람은 이 기예를 가지고 중원으로 가서 전파한다. 나중에 정진여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책으로 써서 <<아미창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주웅점(朱熊占)에게 전한다. 주웅점은 1662년에 녹성 성신오의 집에서 강소 태창사람 오수를 만난다. 주웅점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문무를 겸비하고 나이가 이미 51세인 오수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미창법을 친히 전해주고 그 책을 선물한다. 오수는 1678년에 <<아미창법>>을 그의 명저 <<수비록>>에 수록하여 후세에 널리 정한다. 이리하여 아미창법은 무림명창중 하나가 된다.

 

아미창법은 현대에 이르러 크게 성행한다. 사천의 무림인인 이의립, 임강, 팽항등이 이를 널리 퍼트렸따. 각자가 익힌 창법을 전국일류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전국 및 아시아 무술경기에서 금메달을 연속으로 차지했다.

 

넷째, 오가창법

 

오수의 창법에 대한 공헌은 그가 '보법(步法)'을 중시하였다는데 있다. <<아미창법>>에서는 "보법을 얘기하지 않고 입세(立勢)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취한다. 양가창에도 "손을 내밀어 죽이도 발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대한 결함이었다. 생각해보라, 창은 나가는데 발걸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진공이 제대로 되겠는가? 그리하여, 오수는 "발을 풀어놓아서는 안된다. 그 오묘함은 민첩함에 있다. 물러날 때는 긴 것으로 짧은 것을 제압하고, 나아갈 때는 짧은 것으로 긴 것을 제압한다." 그는 15가지의 보법을 창법기술규범에 집어넣었따. 이리하여 창법기술체계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창법의 기격위력과 창술의 실용기격가치가 증가된다. 이렇게 하여 '공격을 위주'로 하는 무술기격사상이 나타난다.

 

오가창은 <<수비록>>의 핵심이다. 다른 저명한 창법 예를 들어, 석가창, 마가창, 사가창, 양가창, 소림창, 아미창등은 모두 오가창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집어넣은 것이다. 책에서 각 창법을 상세히 해석하고 분석한 후, 그것의 장점과 차이점을 밝혔다. 먼저 석가창법부서 시작하여 나중에 아미창법에 이르기까지 계통이 완벽하고 독특한 견해를 나타낸다. 고인들의 창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오가창법은 명청 창술발전의 산물이다. 중국창술발전사상의 이정표이다. 후세의 창술발전과 완비에 중요한 역사적 작용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