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헌실(孟憲實)
민간에 이런 말이 있다: '배를 잘못고르더라도, 이름은 잘못 짓지 말라." 이것은 이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름을 짓는 것에는 부모의 바램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름이 과연 앞날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건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이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진목후(晋穆侯)의 부인은 제(齊)나라 출신이다. 그가 즉위한지 7년이 되던 해에, 부인이 첫번째 아들을 낳는다. 당시, 진나라는 막 출병하여 조(條)라는 곳을 토벌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진목후는 자신의 아들에게 "구(仇, 원수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태자로 삼는다. 3년후, 진나라는 천무(千畝)라는 곳을 공격하여 역시 승리를 거둔다. 부인이 또 한 아들을 나았는데, 진목후는 이름을 "성사(成師)"라고 붙인다. 당시에 사복(師服)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는 탄식했다고 한다. 우리의 군주는 이름을 참 이상하게도 지슨다. 태자는 '구'라고 하더니, 어린아들은 '성사'라고 짓는구나. 성패가 거꾸로 되었으니, 이후 진나라가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겠는가?
사복의 예언은 결국 들어맞게 된다.
진목후가 죽고, 태자인 구가 즉위하기도 전에, 숙부인 상숙(殤叔)이 권력을 빼앗아버린다. 태자는 할 수 없이 도망치게 된다. 4년째 되던 해, 태자 구가 반격을 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가 바로 진문후(晋文侯)이다. 이것은 기원전 780년에 일어난 일이다. 진문후는 35년간 재위하고, 그의 아들인 진소후(晋昭侯)가 즉위한다. 소후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숙부인 '성사'를 곡옥(曲沃)이라는 지방으로 보낸다. 그런데, 곡옥은 진나라의 수도가 있던 익(翼)보다 땅이 넓었다. 성사는 환숙(桓叔)으로 불리며, 당시 이미 58세였다. 그는 베풀기를 좋아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예절도 바르기 때문에, 진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예언을 한다: 진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근원은 분명이 곡옥일 것이다. 본말의 실력이 전도되어 있고, 인심까지 얻고 있는데, 어지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총명한 사람들은 아마도 일찌감치 이런 추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소후가 재위 7년만에 대신 반부(潘夫)에게 피살당한다. 반부가 곧이어 한 조치는 바로 곡옥으로 가서 환숙을 모시러 갔다. 환숙은 반부를 따라 국군(國君)이 됨으로써 좋은 명성은 모조리 날아가버린다. 그런데, 진나라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고, 환숙에 항거하여 승리를 거둔다. 환숙의 작전은 실패하고, 할 수 없이 곡옥으로 되돌아간다. 진나라사람들은 소후의 아들이 평(平)을 국군으로 올리니 그가 진효후(晋孝侯)이다. 그리고 군주를 살해했던 반부는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다.
환숙은 진효후가 즉위한 8년째 사망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의 후계자가 있었다. 바로 곡옥장백(曲沃庄伯)이다. 곡옥장백은 부친의 유지를 잊지 않고, 다시 7년이 지난 후, 기회를 잡아서, 진효후를 죽여버린다. 이제 곡옥의 주인은 진나라의 국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진나라사람들이 다시 단결하여 곡옥의 주인에게 반항한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고 진나라사람들이 승리를 거둔다. 곡옥장백은 할 수 없이 곡옥으로 물러났다. 진나라사람들은 진효후의 아들을 국군으로 모시니 그가 진악후(晋鄂侯)이다.
진악후는 6년간 재위하다가 사망한다. 곡옥장백도 6년간 실력을 키웠다. 기회는 다시 무르익었다. 곡옥주인은 병력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한다. 이것은 주평왕(周平王)때의 일이다. 주나라천자는 진나라의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주평왕은 진나라의 상황을 잘 알았고,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곡옥장백을 토벌한다. 장백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다시 곡옥으로 물러난다. 곡옥과 진나라는 마치 서로 적대적인 두 나라와 같았다. 진나라는 진악후의 아들인 광(光)을 국군으로 모신다. 그가 바로 진애후(晋哀侯)이다.
진애후가 즉위한지 둘째해에, 곡옥장백이 죽는다. 그의 아들 대(代)가 그를 대신하니, 바로 곡옥무공(曲沃武公)이다. 곡옥의 주인도 이미 3대째에 이른다. 곡옥이 진나라를 차지하겠다는 꿈은 아직도 꿈에 머물러 있었다. 진애후 9년, 진나라는 곡옥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진애후는 곡옥무공의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진나라는 굴복하지 않았다. 진나라사람들은 계속하여 곡옥에 반항했다. 그리고 진애후의 어린아들을 국군으로 올리니, 그가 진소자후(晋小子侯)이다. 곡옥은 여전히 진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진소자후가 즉위한 해에, 곡옥무공은 진애후를 죽여버린다.
이 당시, 곡옥은 더욱 강해졌고, 진나라는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이런 배경하에, 진소자후는 평화협상을 하려고 생각하게 된다. 재위4년째 되는 해에 곡옥무공도 평화회담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리하여, 진소자후는 친히 나서서 곡옥무공과 평화협상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다. 이것은 곡옥무공의 음모였던 것이다. 진소자후가 도착하자마자 곡옥무공은 그를 죽여버린다. 주나라의 천자 환왕(桓王)은 다시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하여, 병력을 보내어 곡옥을 공격한다. 곡옥무공은 곡옥을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진나라사람들은 다시 진애후의 동생인 민(緡)을 국군으로 올린다. 그가 진후(晋侯)이다.
곡옥무공은 비록 진나라의 군주를 죽였지만, 진나라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진나라사람들의 그에 대한 반감은 약화되었다. 문제는 주나라 천자의 강력한 견제였다. 그로 인하여 곡옥의 무공은 자신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곡옥무공이 그렇다고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 노력한다. 진후는 아마도 재위기간이 가장 긴 국군중 하나일 것이다. 진후가 즉위한지 28년째 되는 해에, 곡옥무공은 다시한번 전쟁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철저한 승리를 거두고, 진나라는 완전히 패망한다. <<사기>>에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곡옥무공이 진후민(晋侯緡)을 공격하여 멸했다(滅之)". '멸했다'라는 말은 좀 이상하다. 진나라를 멸한 것인가? 아니면 진후민을 멸한 것인가? 만일, 후자라면, 왜 시(弑)와 같은 류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일까?
곡옥무공은 아랫사람으로써 윗사람을 죽였다. 이는 당연히 주나라천자의 분노를 사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곡옥무공이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었다. 주나라 천자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나라천자에게 대량의 선물을 보낸다. 이때의 주나라천자는 주리왕(周釐王)이었다. 그는 곡옥무공의 선물을 기꺼이 받았고, 그를 정식으로 진나라의 국군에 임명한다. 원래 진나라의 국군은 후(侯)였는데, 공(公)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한다. 이리하여 곡옥무공은 정식으로 진무공(晋武公)에 오른다. 주나라 천자가 뇌물을 받고 이렇게 하였으니, 천하의 도리가 없어졌다고 할 것이다.
환숙이 곡옥을 분봉받은 때로부터 곡옥무공이 성공적으로 진나라를 차지할 때까지, 꼬박 67년이 걸렸다. 3대의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하였으니, 그 야심은 칭찬할 만하다. 진무공이 진나라의 국군이 된 다음 해에 사망한다. 진무공의 아들은 진헌공(晋獻公)이다. 진헌공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가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다. 바로 진문공(晋文公)이다. 이것은 춘추시대를 여는 서막이다. 무질서와 혼란. 전쟁과 살륙.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한 가지가 존재한다. 끝까지 싸우는 정신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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