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UFO

1626년, 외계인이 북경을 방문했는가?

중은우시 2010. 4. 22. 13:41

글: 흥안(興安)

 

1626년 5월 30일, 즉, 명나라 천계6년 오월 초엿새, 오전 9시쯤, 북경 구성 서남모서리, 즉 현재의 선무문 북쪽이며, 서단 서쪽이며, 부흥문의 동쪽인 지역에서 전 도시를 뒤흔드는 신비한 대폭발이 일어났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평민백성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재난을 입었다. 이번이 가장 심각한 재난을 입은 지역은 면적이 약 3평방킬로미터였다. 북경에서 수십리 떨어져 있는 창평과 밀운 그리고 북경동쪽의 통현에서까지 이번 재난의 강렬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이 재난을 취재하고 공개적으로 보도한 것은 당시의 관청신문에 해당하는 <<저보(邸報)>>였다. 저보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전달하고 특별히 <<저보.호외>>를 발간했는데 ,제목이 <천변저초(天變邸抄)>>였다

 

<<천변저초>>의 <<병인오월초육기이(丙寅五月初六紀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천계 병인오월 초엿새 사시, 하늘 색은 하얗고 맑았는데, 돌연 고함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동북쪽에서 점차 경성 서남쪽모서리까지 회색기운이 솟아오르고, 집들이 흔들렸다. 곧, 큰 소리가 진동하더니, 흔들리고 쓰러지는 것이 더 심해졌다. 시신이 층을 이루었고, 역겨운 냄새가 하늘을 뒤덮였으며, 기왓장과 벽돌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저보>>는 재난이 북경주민들에게 미친 파괴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고 아주 처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관직에 있던 사람의 집에서는 탁자와 의자가 뒤집어졌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고 땅이 흔들렸으며, 처첩과 시녀들이 서로 부딪쳐 땅에 혼절해 쓰러졌다고 한다. 소흥에 사는 주씨성의 관리는 북경에 도착하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서 난을 당했다. 거대한 폭발음과 무서운 기류와 함께, 그의 머리는 목에서 분리되어 뽑혀나갔고, 담에 쳐박혔다. 건축공사현장의 비계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격렬한 흔들림과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이 이천여명인데 모조리 피범벅이 되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장안가에는 몸통은 없이 머리, 팔, 다리가 속속 하늘에서 떨어졌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석부마가에는 5천근이나 되는 돌사자가 있는데, 수백명이 들어도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돌사자도 공중으로 말려올라가서, 성밖으로 날아갔다. 사건이 발생한 중심지역인 왕공창부근의 20여그루의 큰나무는 뿌리까지 모조리 뽑혔다. 어떤 큰 나무는 심지어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밀운경내까지 날아갔다.

 

이같은 사상유례없는 재난의 앞에,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황제인 명희종 주유교는 마침 건청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돌연 대전이 흔들렸다. 명희종은 황급히 머리를 감싸고 교태전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은 아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건청궁이 어좌, 어안도 모조리 뒤집혀졌고, 대전의 기와도 속속 떨어졌다. 한 시위는 머리가 깨졌다...유사한 기록은 더 있다. 그중 명나라의 학자 황욱이 쓴 <<벽혈록.천변잡기>>, 명나라 환관 유약우의 <<취중지>>, 그리고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오행지>>가 있고, 청나라초기의 학자 주이존의 <<일하구문>>도 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이번 대재난에서 당사자들이 모조리 순식간에 옷이 벗겨지고 알몸이 되고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항씨성의 남자는 다리 하나를 다쳐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많은 나체의 남녀들이 소리지르며 길거리를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중에 한 젊은 여자는 깨진 기왓장으로 치부를 가렸고, 또 어떤 사람은 이불, 요를 둘렀다. 어떤 사람은 아예 손으로 가렸다. 더욱 기괴한 것은 원홍사가의 한 여자는 화교(花轎)를 타고 있었는데, 길중간으로 가고 있었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가마의 덮개가 날아가 버렸다. 여자가 입고 있던 의복과 악세사리도 모조리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이 여자는 할 수 없이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가마 안에 앉아서 감히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를 못했다. <<저보>>의 보도에 따르면, 재난이 지나간 후, 북경성의 의복들은 모조리 서산(西山)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대부분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창평주의 교육장에는 의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악세사리와 은 돈 식기등 없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 보도에 대하여, 호부의 관리 장봉달이 사람을 현장에 보내어 조사하게 했는데,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벽혈록>>에는 두 가지 이해되지 않은 일을 언급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월서회관 길입구에 학당이 있는데, 학생 32명이 있었다. 대폭발이 일어난 후 선생과 학생이 모조리 실종되었다; 둘째는 선부의 신추총병이 원굉사로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사건이 벌어진 후 총병과 그가 타고 가던 말 그리고 그를 뒤따르던 7명의 병졸들도 모조리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번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북경성안에는 여라가지 기괴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산동성 제남지부가 북경성으로 와서 성황묘에서 향을 올리는데, 향에 막 불을 붙아지마자, 지부는 시종과 함께 기절해서 깨어나질 못했다. 고루대가의 서쪽에 있는 후재문 화신묘의 문지기는 사건이 일어난 아침에, 돌연 묘안에서 음악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다. 음악성은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했는데, 세번을 울렸다. 문지기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동료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홍색의 원형물체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묘안에서 회전함 날아올랐고, 금방, 대재난이 일어났다. 북경찰원의 관리는 그날 아침에 말을 타고 막 찰원대문을 들어서는 중이었다. 돌연 미리위에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모자를 쓴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손에는 보검을 들고, 괴수를 타고 있었다. 이 관리는 대경실색하여,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아문은 난리가 났는데, 바로 이 순간에 폭발이 발생한다.

 

이같은 신비하면서도 사상유례없는 대재난은 많은 사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여러가지 해석을 내놓았고, 이번 재난의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했다.

 

첫째는 지진설이다. 청나라말기에 편찬된 <<창평주지>>에는 이 재난을 대지진이라고 불렀다. 이는 성립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소위 지진은 대폭발로 인하여 일어난 진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중국지진자료연표>>에도 지진이 당시에 발생했다는 기록은 없다.

 

둘째는 화약폭발이라는 설이다(명사.오행지). 왜냐하면 많은 당사자들이 폭발음 가운데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약으로 인한 거대한 충격파 및 이로 인한 피와 살이 튀는 참혹한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지점인 왕공창은 돈과 곡식을 두는 곳이지만, 소량의 병기와 화약도 생산했다. 이것은 바로 화약폭발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다만, 화약폭발의 위력이 이처럼 강력할 수 있는지에도 의문이 있고, 화약폭발시에는 주변으로 연소물이 튈텐데, 왜 성안의 목재건물중 불에 탄 것이 전혀 없는지도 문제이다. 이와 반대로, 모든 불은 신기하게도 스스로 꺼졌다. 하물며 재난이 발생하기 전후하여 일어난 여러가지 신기한 현상은 화약폭발설에 설득력을 실어주지 못한다.

 

셋째는 UFO폭파설이다. 이것은 최신의 가설이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공포스러운 해석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언급했다. 대폭발전에 확실히 누군가가 UFO를 보았다는 것을. 예를 들어, 화신묘에서 날아오른 시니스러운 '홍색원형체'가 있다. 홍콩 명천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UFO사건>>이라는 책에서는 이것을 UFO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문지기가 들었다는 음악은 아마도 UFO의 엔진에서 나는 소리였을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당시 북성찰원관리가 보았다는 홍발신인이 아마도 우리 인류를 지구로 방문한 '외계인'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전문가들의 추론에 따르면, 대폭발은 UFO조종시스템이 고장나서 추락하면서 일어난 결과라고 본다. 또 어떤 사람은 나아가서 더욱 두려운 결론을 내린다. 이 댓가가 참혹한 대폭발이 바로 당시의 북경사람들을 살렸다는 것이다. 재난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비롭게 실종되었고, 죽은 자와 산자들이 모조리 의복이 벗겨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면,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 온갖 방법을 써서 연락하고자 하는 우리보다 지능이 뛰어난 외계인들이 벌인 장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적지 않은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을 납치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납치된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에게 실험을 당한 후에 석방되었다.어떤 사람은 영원히 종적을 모른다. 육백여년전에 북경을 방문한 외계인은 아마도 대규모의 지구인에 대한 납치와 사냥을 진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류문명을 상징하는 의복을 벗기고, 사람을 자신보다 지능이 모자라는 원숭이, 유인원처럼 취급하고 인류를 노예처럼 부린 것이다. 다행이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외계인이 몰던 비행접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추락하고 만다. 이리하여 인류가 지구통치자라는 자존심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북경 내지 인류에게 닥쳐왔을지도 모를 진정한 대재난을 피한 것이다.

 

세계역사상, 북경대재난과 가장 유사한 것은 금세기초에 일어난 퉁구스의 대폭발이다. 두번의 대폭발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보면 아마도 우리가 북경대재난의 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1908년 6월 30일 새벽, 러시아제국의 시베리아중부 퉁구스강가의 주민은 돌연 공중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빛나는 것을 보게 된다. 삽시간에 대지는 진동했고, 천둥같은 소리가 났다. 원형의 버섯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강대한 열류가 대지를 석권한다. 전문가의 감정에 따르면, 이번 대폭발의 위력은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탄폭발의 1000배였다고 한다. 지진은 전 세계로 퍼져갔다. 방원5720평방킬로미터의 수목은 모조리 폐허로 된다. 이 지역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류에 특별히 큰 재난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번 대폭발이 거대한 운석이 낙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여러번에 걸친 현장조사와 발굴에 따르면, 운석물질성분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50년후, 소련의 저명한 학자인 카자체프는 <<퉁구스폭발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써서, 외계인이 우주비행선을 지구에 착륙시키다 고장이 일어키고 이로 인하여 핵연료의 포갈이 일어났다는 견해를 제기하여,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이 연구조사를 거쳐, 핵동력폭발설은 이 사건을 해석하는 주류가 된다. 그들은 외계의 우주비행선이 이 지역에 접근한 것은 주로 담수(淡水)가 필요해서일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고지점의 이남에 있는 바이칼호는 지구상 최대의 담수호이다. 또한 다른 학자들은 외계인이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지구생물실험기지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이 장래 이주하고 지구를 통치할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원인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비행선에 폭발이 일어나고, 그들은 타향에서 객사하게 된다. 과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대폭발후 이 지역에는 상당히 심각한 유전적 변화가 발생했다고 한다. 식물뿐아니라, 곤충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이 지역에는 세계기타지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각종 꿀벌과 곤충이 있다. 이외에 일부 수목과 식물은 생장을 정지하고, 또 다른 수목과 식물은 몇배의 비율로 생장한다.

 

운석설과 우주비행선폭발설이외에, 과학자들의 혜성설, 반물질설 및 하늘 밖에서 날아온 거대한 눈덩이설도 제출한다.

 

두번의 대폭발의 과정을 보자면, 비록 북경의 폭발은 퉁구스에 비하여 훨씬 작기는 하지만, 두 지역에서 사건발생전에 모두 불덩이가 나타났고, 모두 거대한 소리를 들었으며, 그 후에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대폭발이 같은 원인에 의하여 일어났다고 보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북경대폭발은 더욱 신기한 점이 많다. 다만, 우리의 과학자들은 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하여 더 깊이있는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인류의 우주탐사와 관련되고, 자신의 생존에 관한 대명제와 관련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360여년전의 수수께끼사건을 그저 재미있는 역사의 추억으로만 생각한다면, 재난이 진정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저 운명에 맡기고 죽을 때만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주의 재난은 지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