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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역사상 진실한 왕중양(王重陽)

by 중은우시 2010. 4. 18.

글: 유계흥(劉繼興)

 

무협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중 제1차 화산논검때 황약사(黃藥師, 東邪), 구양봉(歐陽鋒, 西毒), 단지흥(段智興, 南帝), 홍칠공(洪七公, 北丐), 왕중양(王重陽, 中神通)의 5명이 화산의 정상에서 칠일 밤낮을 싸우면서, <<구음진경(九陰眞經)>>을 다툰다. 결국 왕중양이 4명을 패배시키고 승리를 거두어, <<구음진경>>을 차지한다. 왕중양이 죽은 후, 각 고수들이 그가 남긴 <<구음진경>>을 놓고 다투는 것이 소설의 주요한 줄거리이다.

 

역사상 확실히 왕중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중부(中孚)이고, 자는 윤경(允卿)이며, 세웅(世雄)이라고도 한다. 도교의 중요한 일파인 전진교(全眞敎)의 창시자이다. 북송말기 경조 함양(지금의 산서성 함양) 대위촌 사람이다. 송휘종 정화2년(1112년)에 태어나서, 송효종 건도6년(1170년)에 사망한다.

 

왕중양은 집안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스스로 왕삼(王三, 그는 셋째아들이다) 혹은 왕해풍(王害風, 미치광이란 뜻이다)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는 유생이었고, 글에도 뛰어났으며, 말타고 활쏘는 것도 능했다. 금나라 천권 초기에 무과에 응시하여 갑과에 합격한다. 그는 호방하고 협의를 행하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48세때 감하진에서 신선을 만나, 수련진결을 얻고 도를 깨닫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일찌기 종남산에 묘혈을 짓고 기거하였으며, 스스로 "활사인묘(活死人墓)"라고 했다고 한다. 금나라 대정7년(1167년) 산동으로 가서, 문등, 영해, 복산, 등주(지금의 봉래), 래주(지금의 액현)에서 삼교칠보회, 삼교금련회, 삼교삼광회, 삼교옥화회, 삼교평등회를 만들어, 전도하고 설법한다. 영해(산동 모평)에서 도를 강의할 때, 그는 송휘종이 총애하는 도사인 임영소(林靈素)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전통도교를 개조하여 전진교(全眞敎)를 창립한다.

 

왕중양은 산동에서 전도하면서 많은 제자를 받아들이는데, 그중에는 단양자(丹陽子) 마옥(馬鈺), 장춘자(長春子) 구처기(邱處機), 장진자(長眞子) 담처단(譚處端), 옥양자(玉陽子) 왕처일(王處一), 태고자(太古子) 학대통(郝大通), 장생자(長生子) 유처현(劉處玄)과 마옥의 처인 청정상인(淸靜散人) 손불이(孫不二)가 뛰어났다. 사람들이 이들을 북칠진(北七眞)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전진칠자(全眞七子)이다.

 

왕중양이 죽은 후, 전진칠자는 북방에서 널리 전진교를 전파하고, 각자 지파를 세운다. 즉, 마옥은 우선파(遇仙派), 구처기는 용문파(龍門派), 담처단은 남무파(南無派), 유처현은 수산파(隨山派), 학대통은 화산파(華山派), 왕처일은 전진파(全眞派), 손불이는 청정파(淸靜派)를 만든다. 그중 구처기의 용문파가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왕중양은 문무를 겸비하여 그의 무공은 비록 김용이 소설에서 쓴 것처럼 독보천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문재,풍류는 대단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그의 저작으로는 <<중양전진집>>이 있는데, 거기에는 전도시사(傳道詩詞) 천여수가 실려있다. 그 외에 <<중양입교십오론>> <<중양교화집>> <<분리십화집>>등이 있는데 모두 <<정통도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도교를 철학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왕중양은 도, 불, 유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하여, "유문석호도상통, 삼교종래일조풍(儒門釋戶道相通, 三敎從來一祖風)"이라고 하였다. 그는 삼교평등, 삼교합일을 주장하고, <<도덕경>> <<반야심경>> <<효경>>을 전진도의 필수경전으로 삼았다. 왕중양은 부록(符籙, 부적)을 숭상하지 않았고, 돈을 중시하지 않았다.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도 믿지 않았고, 내단을 수련하여 신선이 되고 도를 얻는 수단을 믿지 않았다. 그의 수련방법은 청정(淸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인심상허의청청, 편시수행진첩경(人心常許依淸靜, 便是修行眞捷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도자는 반드시 출가하여, 정욕을 버리고, 인치함구(忍恥含垢), 고행고수(苦行苦修)를 주장했다. 왕중양의 수행방식은 객관적으로 여진과 몽골 통치자의 필요에 적합했다.

 

금나라와 원나라의 교체기로부터 남송이 멸망하기까지의 수십년간은 중국대륙에서 철기가 종횡하고, 피와 포화가 튀는 시기였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고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전진교에 있어서는 전성시기였다. 이는 주로 이 시기에 여진과 몽골의 통치자들이 중원에 들어와서 주인이 되었는데, 가장 큰 골치거리는 어떻게 민족갈등을 해소시킬 것이냐였다. 그런데, 왕중양의 청수주장은 한족의 이족통치에 대한 반항의 투지를 완화시키는데 적합했고, 민족갈등을 해소하고, 이민족군주에 대한 통치지위를 공고히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왕중양이 창립한 전진파는 금나라, 원나라의 두 외족통치시기에 신속히 발전한다.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낸다. 왕중양은 이로 인하여 원나라황제로부터 "중양전진개화진군(重陽全眞開化眞君)"과 "중양전진개화보극제군(重陽全眞開化輔極帝君)"에 책봉된다. 전진교는 후기도교의 최대파중의 하나이고, 원나라 이래로 정일파(正一派)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