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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백)

이백(李白)의 고향은 어디인가?

by 중은우시 2010. 4. 5.

글: 조아휘(趙亞輝)

 

최근 들어, 매체에서는 자주 사천강유(四川江油)와 호북안륙(湖北安陸)의 '이백고리(이백고리(李白故里)"논쟁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다시 시나닷컴의 첫페이지에 논쟁이 다시 업그레이드되었다. 또한 국가공상총국은 얼마전에, 사천강유, 호북안륙의 '이백고리'논쟁에 답신을 보내었다. 그러나, 이 답신도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고리'라는 단어는 사전속에서는 '고향' '본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출생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백의 출생지는 도대체 어디라는 말인가?

 

필자는 마침 2년전에 중국서북지방을 갔을 때, 이 문제에 대하여 고찰과 연구를 한 바 있다. 당시에 써놓았던 글을 내놓아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자 한다. 필자가 제공하는 역사적인 소재와 글에 대하여 네티즌들이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필자는 블로그에 <<이백고거를 찾아서>>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네티즌들이 글을 남기고 논쟁이 격렬했다. 어떤 네티즌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였다. 이백의 고향은 강유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쇄엽(碎葉)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네티즌은 인터넷에서 찾은 이백의 자료를 첨부했다. 그 중에 분명히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블로거주인은 확실히 알고 글을 올리라'고 적었다.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하연 필자는 확실히 흥미가 있다. 이번에 다시 서북지방을 갈 때 강유에 들러서 상세히 고증을 진행한 바 있으므로, 네티즌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하고자 한다.

 

사실 많은 네티즌과 마찬가지로, 필자가 소학교, 중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이백이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태어났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필자는 이것이 맞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 강유를 취재할 때 비교적 진지하게 고증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록 이백이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적다. 이백이 사천강유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99%이상이다."

 

왜 이전의 교과서와 자료에서는 모두 이백이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태어났다고 했을까? 주로 곽말약 선생이 '퍼트린 헛소리'이다. 사람들은 모두 곽말약을 믿었다. 1971년 곽말약은 <<이백과 두보>>를 발표했고, 이백이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국내에 있는 타크마크부근이다. 사실상 이것은 새로운 주장은 아니었다. 역사상 제기된 바 있는 주장이다. 당시는 중국이 소련과 국경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고, 중국의 소련에 대한 조회에서 이 견해를 인용했다. 이를 통하여 중앙아시아의 그 토지는 자고이래로 중국의 소유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학술문제가 정치문제와 결부되었다. 또한 중국의 역사학 권위자가 방향을 잡았으니, 누가 감히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일시에 모든 교과서, 사전은 모조리 바꿔쓰게 된다: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했다."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있다. 비밀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필자도 이번에 알게 된 이야기이다. 1982년, 강유는 등소평이 딸을 통해서 보낸 친필글을 하나 받는다. 단지 4글자였다: "이백고리(李白故里)". 전해지는 바로는, 등소평은 곽말약과 오랫동안 얘기를 한 바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은 확실한 진실이다. 이 네 글자는 비석에 새겨서 이백고향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후단부분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등소평이 쓴 글은 확실히 존재한다.

 

이러한 비전은 놔두고, 우리가 과학적으로 고증해보자. 도대체 왜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 이렇게 논쟁이 많은가? 이들 논쟁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논쟁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백의 출생지가 어디인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필자는 이 논쟁의 역사를 하나하나 설명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해봐라. 역사를 고증하는 것은 분명히 좀 길 수 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보기 바란다.

 

먼저 강유백성들의 주장을 얘기해보자. 이백의 출생에 관하여, 강유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태백금성이 옥황상제에 의하여 속세로 내려오게 되었다. 남천문을 나와서, 서촉의 청련향으로 왔다. 이곳의 산수가 뛰어나고, 대나무가 무성하고, 논밭은 비옥하여, 인간세상의 선경이었다. 그 때 단정하고 기운이 빼어난 여성이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백금성은 금색의 잉어로 변신하여, 강을 헤엄쳐가서 빨랫감 사이로 뛰어들어 대나무바구니에 들어간다. 이 여인이 바로 이객의 처이다. 서역에서 옮겨온지 얼마되지 않았다. 잉어가 자신의 바구니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는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 남편과 함께 요리를 해서 먹는다. 그리고 임신기운을 느낀다. 10달후에, 이객의 처는 꿈을 꾼다: 하늘 위에서 금빛이 찬란한데, 장경성(長庚星)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마침 자신의 뱃속으로 떨어진다. 곧이어 이객의 처는 하얗고 통통한 아이를 낳는다. 부부는 아주 기뻐하면서 태백장경이 들어와 생긴 아이라고 하여 아이의 이름을 백(白)이라 하고, 자는 태백(太白)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백 이름의 유래이다. 이 아름다운 전설은 강유에서 일대 일대 전해져서, <<사천총지>> <<용안부지>> <<강유현지>> <<창명현지>>에 실렸다. 그리하여 이백고향의 사람들은 모두 이백이 청련에서 태어났고, 바로 하날의 태백금성이 하범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당나라때부터,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온갖 의견이 있었다. 이백의 명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많은 곳은 모두 이백을 자신의 고향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갖가지 다툼이 벌어진다.

 

명나라때의 사상가인 이지(李贄)는 재미있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촉인들은 이백을 촉에서 났다고 하고, 농서인들은 이백이 농서에서 났다고 하며, 산동인들은 또 산동에서 났다고 하며, <<일통지>>에 써넣었다. 모두 당나라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다...오호라, 한 이백이 살아있을 때는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않았는데, 죽어서 천백여년이 지나니, 그를 받들고 싸우는 것이 시도 때도 없다. 내가 말하노니, 이백은 모든 해가 그가 태어난 해이고, 모든 곳이 그가 출생한 곳이다. 또한 하늘의 별이며, 지상의 영(地上英)이고, 파서사람이고, 농서사람이며, 산동사람이고, 회계사람이고, 심양사람이며, 야랑사람이다. 죽은 곳도 자랑스럽고, 태어난 곳도 자랑스럽고, 유배간 곳도 자랑스럽고, 갇혀있던 곳도 자랑스럽다. 놀러가지도 않았고 갇히지도 않았고 유배되지도 않았고 가보지도 않은 곳이라 하더라도 그의 책을 읽고, 그 사람을 봤으면 역시 자랑스럽다. 싸우지 말라. 싸우지 말라."

 

이 노선생은 재미있다. 이백의 출생지 다툼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화사로(和事佬, 좋은게 좋다는 노인)'역할을 하려 했다. 혹은 '니수장(泥水匠)"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저 흙을 한번 발라버렸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백은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 이백은 어느 한 지방에 속하지 않고 전체 중국에 속한다.

 

사실상,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 당나라때부터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다.

 

중당(中唐)의 대시인 원진(元稹)은 "산동인 이백(山東人 李白)"이라고 한 바 있다. 오대에 쓴 <<구당서. 이백전>>에도 이백은 산동사람이라고 적었다. 이 주장은 이백이 비교적 오랫동안 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이백을 산동인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이 주장은 사료로 받쳐주지 않는다. 또한 <<구당서>>는 오대의 난세에 쓰여져서 사료가 부족했고, 내용이 조악하며 빠진 것이 많고, 잘못된 곳도 적지 않다.

 

그래서, 북송의 대문호, 사학가인 구양수는 다시 쓰면서 <<신당서. 이백전>>에서 <<구당서>>의 잘못을 바로 잡았다: "이백...그의 선조는 수나라말기에 죄를 받아 서역으로 옮겼고, 신룡초에 돌아왔다. 이객은 파서에서 이백을 낳을 때, 모친은 꿈에 장경성을 보아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이백의 조상이 일찌기 서역에 유배갔다고 적었다. 당나라 신룡초기에 비로소 몰래 내지로 숨어들어오고, 이객이 파서(巴西) 즉 금주(錦州)에 살았다. 이백의 모친은 장경성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백을 낳았다. 이것은 이백의 친구인 위만(魏萬), 이양빙(李陽氷)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백 고향의 전설과도 일치한다.

 

이백의 친구이면서, 이백의 종숙(從叔)이기도 한 이양빙의 기록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백의 임종을 한 것으로 공인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당도현령이었다. 그는 <<초당집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백은 자가 태백이고, 농서 성기(成紀)사람이다. 양무소왕의 구대손이다. ....조지(條支)에 유배를 가서 성과 이름을 바꾼다....신룡의 초기에, 촉으로 도망쳐서 되돌아온다....장경성이 꿈이 들어와서 낳으니 이름을 백이라 하고, 태백을 자로 삼는다. 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태백의 정기를 얻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백의 집안내력과 출생지를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애빅은 그 부친이 '촉으로 도망해 들어온 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출생할 때 아름다운 신화전설이 있는데, '그의 모친이 꿈에 태백성이 자신의 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이름을 백이라 하고 자를 태백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백의 이 이름은 만일 '성과 이름을 바꾼' 서역에서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저 '촉으로 도망쳐 들어온 후'에 출생했기 때문에 이씨성을 되찾은 것이고, 이백이라 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양빙의 이 글은 "보응원년십일월(762년)"에 쓴 것이다. 이백이 사망한 그 해이다. 이백은 임종전에 당시 당도현령으로 있던 종숙 이양빙을 만나러 갔었다.

 

이양빙이 <<초당집서>>에서 이백이 친히 주었다고 하니, 이는 믿을만하다. 이양빙은 이백이 죽은 후에 바로 이 서문을 썼는데, 이백의 부탁에 따른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도 가까우니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양빙이 이 글로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셈인데, 왜 후세의 논쟁을 불러온 것일까? 무슨 논쟁이 있었는지를 계속 얘기해보자.

 

북송에서 명청에 이르기까지 이백의 출생지는 기본적으로 <<신당서>>의 견해에 따라, 큰 논쟁이 없었다. 청나라 건륭연간에, 왕기(王琦)가 <<이태백전집>>을 편찬하면서, 이백의 연보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한다: "<<대송중승자천표>>를 확인해보면.... 당시 오십칠이었다...신룡으로 연호를 바꾼 것은 태백이 이미 몇살 때이다. 신룡의 연호는 신공(神功)의 잘못이 아닌가. 혹은 태백의 출생이 광한(금주, 한나라때 광한군)에 오기 전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최후결론은 여전히 아주 명확했다: "태백은 촉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왕기는 대단했다. 그의 이 말은 날카로웠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중대한 발견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현재까이 이백출생지에 대한 논쟁에 복선을 깔아놓는다. 곽말약 선생의 최초의 근거는 바로 그의 이 발견이었다.

 

그의 이 발견은 바로, 구양수이건, 이양빙의 기록이건, 이백의 부친 이객이 '신룡초에 돌아왔다'는 것인데, 신룡초는 바로 705년이다. 이백의 부친이 이 해에 서역에서 서촉으로 도망쳐 왔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백이 촉에서 출생했다는 주장과 서로 모순된다. 왜나하면 이백의 연령으로 보면, 이백은 701년에 출생했다. 신룡초기라면 이백이 5살때쯤이다. 자료를 고증해본 후, 왕기는 이렇게 말한다: "혹은 이백이 촉으로 들어오기 전에 춣생했거나, 혹은 신룡은 신공의 잘못이거나...

 

왜 이렇게 얘기하는가? 왜냐하면 이백의 출생전후 20년동안에 19개의 연호가 사용된다. 그때는 무측천이 통치하던 시기인데, 그녀는 아주 특이한 취미가 있었다. 바로 연호를 바꾸는 걸 좋아했다는 것이다. 1년에 두 개의 연호를 바꾼 적도 있다. 신공초는 697년이다. 신룡초는 705년이다. 비록 이양빙이 <<초당집서>>에서 이객이 촉으로 돌아온 것이 신룡초라고 하였지만, 당시 이백의 병세가 위중했으므로, 아마도 출생연호를 이양빙에게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십년의 시간을 두고 그렇게 많은 연호가 있으니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물며, '공'과 '용'은 발음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낟.

 

당시 이 글자 하나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여러번의 논쟁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이 된다.

 

그러나, 분명히 인정할 것은, 당시 이양빙의 서문의 핵심의사는 이백이 촉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의문을 제기했던 왕기조차도 최후에는 이백이 촉에서 태어났다고 인정했다. 즉 그는 신룡초를 신공초로 본 것이다. 신공초은 697년이고 촉에 들어온지 3년후이다. 즉 701년에 이백이 출생한다.

 

나중에 민국시대가 되어, 1926년 5월, <<신보>>부간에 이의침의 <<이백의 관적 및 출생지>>가 실린다: "태백은 사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유배된 곳에서 태어났다." 1935년, 진인각은 다시 <<청화학보>>에 글을 실어, "태백은 서역에서 태어났고,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근거는 모두 왕기가 제출한 의문이다. 이백은 <<대송중승자천표>>를 썼는데, 이미 57세였다. 신룡초라면 당연히 5살이다. 그러므로, 이백은 서역에서 태어난 후 촉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찬성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교과서나 사전등에 모두 이백은 창명(彰明) 청련(靑蓮)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었다.

 

1971년, 곽말약은 <<이백과 두보>>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 글 첫머리에서 쓴 그 일이 일어난다. 일시에 모든 교과서, 사전은 고쳐지는데,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태어났다"로 된다.

 

당의 11기 3중전회에서 '백가쟁명'시대의 도래를 선언하고, 사람들은 곽말약의 '이백이 쇄엽에서 출생했다'는 견해에 이견을 발표한다.

 

돌 하나가 천층의 파도를 일으킨다. 이백출생지에 대한 논쟁이 거창하게 개시된 것이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6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중앙아시아 쇄엽설', '촉중설' 이외에, '신강언기설' '하미설' '아프가니스탄설' '장안설'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촉으로 돌아오는 도중의 어느 곳에서 태어났다는 설까지...이런 서로 다른 의견은 각종 신문잡지, 이백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되고, 서로 논박을 벌인다. 이를 통하여 아주 활발한 학술분위기가 나타난다. 다시한번 이지가 말한, '한 명의 이백이 살아있을 때는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않더니 죽고서 천백년이지나니 그의 명성을 흠모하여 다투는 자가 시도 때도없이 나타났다."

 

모두 이백을 좋아했으므로, 모두 이백을 자신의 고향사람으로 부르고 싶었다. 이것은 바로 '명인효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