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이래로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존재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 각종 견해가 등장했다.
촉중설(蜀中說)
이백의 출생지에 관한 여러가지 주장중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다. 이 설은 먼저 명나라때 양신(楊愼)이 제기했고, 청나라때 왕기(王琦)도 이 설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20세기초의 황석규(黃錫珪)는 <<이태백연보>>에서 왕기가 제기한 '신룡'은 '신공'의 와전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고 무후때 이씨집안 자손들은 이미 내지로 돌아갔고, 촉의 면주 창명현의 청련향에 정착했다고 보았고, 이백도 여기서 태어났다고 보았다. 이 설은 나중에 일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척유한(戚維翰)의 <<이백연구>>, 소중상(蘇仲翔)의 <<이두시선.도언>>, 복단대학 중문과에서 선주한 <<이백시선. 전언>>, 왕백상(王伯祥)의 <<증정이태백연보>>, 서수인(胥樹人)의 <<이백과 그의 시가>>, 배배(裴裴)의 <<이백출생쇄엽설 및 그 관적문제를 평함>>에서 모두 이 설을 채택하였다.
서역설(西域說)
이의침(李宜琛)은 1926년 5월 10일의 <<신보부간>>에 <<이백의 관적과 출생지>>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백의 생졸년을 고증하여, "이백은 사천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배된 지방"에서 태어났다. 즉, 이씨집안이 유배된 서역 쇄엽(碎葉)이라는 것이다. 9년이후, 진인각(陳寅恪)이 또 <<이태백씨족의 의문>>이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이백은 서역의 저라사성(咀邏私城)에서 태어났고, 그가 5세때 그의 부친을 따라 사천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1년후 <<일경>>에는 3편의 이백출생지에 관한 글이 실렸다. 즉, 호회침(胡懷琛)의 <<이태백이 국적문제>>, <<이태백이 돌궐문과 기타에 통했다>>, 유곡(幽谷)의 <<이태백-중국인인가? 돌궐인인가?>>. 이 글들은 모두 이태백이 서역에서 태어났다는 설을 취했다. 그 중 호회침은 <<대당서역기>>의 기재를 인용한 후 "이백의 선조가 유배갔던 지역은 아마도 저라사성의 남쪽 10여리의 지방인 것같다" 즉 소엽(素葉, 현재의 중앙아시아 쇄엽)의 서쪽 850리지역이다. 이 설은 나중에 상당히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는다. 즉, 이장지(李長之)의 <<도교도인 시인 이백과 그의 고통>>, 첨영(詹鍈)의 <<이백사세고이>>, 유평백(兪平伯)의 <<이백의 성씨 관적 종족문제>>, 장서성(張書城)의 <<이백선조의 언기쇄엽유방>>, 이종군(李從軍)의 <<이백출생지고이>>등이 있다. 그중 장서성, 이종군의 글은 모두 곽말약이 제기한 중앙아시아쇄엽설에 대한 것이고, 서역쇄엽에 대하여 보충적으로 논증했다. 그들은 이서(李序), 범비(范碑)중의 "조지(條支)" "쇄엽"에 대하여 고증하고, 이백선생은 선선군의 언기(焉耆) 쇄엽에서 출생했다고 보았다. 즉, 현재의 신강자치주내의 박사등(博斯騰)호숫가에 있는 쿠얼러와 언기회족지치현 일대이다. 그러나 종흥기(鍾興驥)의 <<당대 안서사진중 하나인 쇄엽의 위치 신탐>>에서는 이백의 출생지인 쇄엽이 중앙아시아의 파얼카스호수도 아니고, 언기도 아니고 현재 하미(哈密)부근의 삼보(三堡)라고 주장하였다.
중아쇄엽설(中亞碎葉說)
이 설은 곽말약(郭沫若)이 <<이백과 두보>>라는 글에서 제기한 것이다. 그는 쇄엽은 당나라때 두 군데가 있었는데,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쇄엽이고, 다른 하나는 언기의 쇄엽이라는 것이다. 언기는 당나라 고종 조로원년에 축성되는데, <<비문>>에서는 수나라말이라고 표시하고 있으므로, 이백의 출생지는 중앙아시아쇄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곽말약의 이 주장은 일부학자의 지지를 받았다. 예를 들어 여서성(余恕誠)의 <<이백이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하였다는 또 하나의 확증>>, 주방(朱方)의 <<당대 '조지'위치의 의문>>, 주춘생(周春生)의 <<이백과 쇄엽>>, 진화신(陳化新)의 <<이백이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행하였다는 설>>, 은맹륜(殷孟倫)의 <<당대쇄엽성의 지리위치 시론>>등이 모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하였다는 설에 찬성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설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강한논단>> 1981년 제1기에 발표한 경원서(耿元瑞)의 <<이백가세문제곽설변의>>에서는 곽말약이 얘기한 조지의 지리가 부정확하다는 것 이외에 쇄엽성의 지리는 소련 토크마크의 서쪽 푸롱지의 동쪽인 칸터라고 하였다. 이후에 출판된 일부 이백에 대한 연구저작, 문학사저작에서도 줄줄이 이 설을 채택하였다. 예를 들어, 왕운희(王運熙), 이보균(李寶均)의 <<이백>>, 유억훤(劉憶萱), 관사광(管士光)의 <<이백신론>>, 교상종(喬象鍾), 진철민(陳鐵民)이 주편한 <<당대문학사>>등이 그것이다.
기타 학설
이상의 세가지 학설을 제외하고도, 사람들은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오여빈(吳汝濱)의 <<이백>>에서는 이백의 출생지는 농서이고, 촉에서 자라고, 산동에서 거주했다는 것이다. 유우죽(劉友竹)의 <<이백의 출생지는 '조지'이다>>에서는 이백이 '조지'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당나라때의 '조지'의 위치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중도일대이고, 관청소재지는 학실나(鶴悉那)이며, 지금의 가츠니이다"라고 하고 있다. 약간 후에 발표된 강회원(康懷遠)의 <<이백의 출생지는 '조지'라는 설에 대한 한 가지 보충>>에서 이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가했다. 유개양(劉開揚)은 <<이백의 촉중에서의 생활과 시가창작>>이라는 글에서 이백이 <<이백상안주배장사서>>에서 "분류함진, 인관우가(奔流咸秦, 因官寓家)"는 바로 장안을 가르키는 것이므로 이백이 장안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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