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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백)

이백(李白)의 신분내력

by 중은우시 2007. 6. 24.

 

 

글: 양국선(楊國選)

 

중국문단에서 이백은 당당한 천고의 대시인이다. 그러나, 천여년이래, 많은 학자들이 그의 신분내력에 대하여 연구하고 고증하였지만 아직 확실한 답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백의 부친인 이객(李客)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조상은 과연 누구인가?

 

이백은 그 자신의 신세에 대하여 그의 일부 글에서 남겨놓은 내용들이 있다.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서는 "백본농서포의, 유락초한(白本?西布衣 流落楚漢, 이백은 원래 농서-감숙성-의 포의로서 초한의 땅에 흘러들어왔습니다)"라는 기술이 있다. <<여안주배장자서(與安州裴長史書)>>에서는 "이백은 원래 집은 금릉(金陵)이고, 대대로 우성(右姓)이었습니다. 차거몽손의 난을 맞아, 함진(咸秦)을 떠돌게 되었으나, 관리를 지내서 어려서부터 강한(江漢)에서 자랐습니다" <<증장상호(贈張相鎬)>>라는 시에서는

 

가본농서인, 선위한변장(家本?西人, 先爲漢邊將)

공략개천지, 명비청운상(攻略蓋天地, 名飛靑雲上)

고전경불후, 당년파추창(苦戰竟不侯, 當年頗??)

 

집안은 원래 농서사람인데, 선조는 한나라때 변방장수를 지냈다.

공격전략은 천지를 뒤덮고, 이름이 飛로 구름위까지 드높았다,

힘들게 싸우기만 하고 제후에 봉해지지 못하니, 그때는 매우 실의에 빠졌다.

 

남겨놓은 문자만으로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그는 먼 조상에 대하여는 얘기하면서 바로 윗대의 선조들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백이 남긴 자술문장에서 그의 집안내력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백의 종숙(從叔)인 이양빙(李陽氷)은 <<초당집서(草堂集序)>>에서 이백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이렇게 고 있다. "이백. 자는 태백(太白)이고, 농서 성기(成紀) 사람이다. 양(凉)나라 무소왕(武昭王) 호(暠)의 9대손이다...대대로 혁혁한 가문인데, 중간에 죄를 지어 조지(條支)의 땅에 유배를 갔고, 이민족들과 함께 살았다. 신룡이 시작되면서 촉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이백의 숙부인 이양빙이 말한 이백이 "양나라 무소왕 이호의 9대손"이라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자. 양나라 무소왕 이호의 9세손이라면 당연히 당현종의 집안어른이 된다. 고증에 의하면, 당현종은 천보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호의 자손은 황실종중에 집어 넣도록 지시한다. 즉, 이호의 자손은 황족의 족보에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영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백 일가는 등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백이 한림원에 들어가고 여러번 황제를 만났음에도, 이 일을 황제에게 꺼낸 적이 없다. 천보15년에 영왕이 패배하면서 이백은 이에 연루되어 감옥에도 갇히고, 말년에 유배도 갔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세내력을 밝힌 바가 없었다. 이로써 볼 때, 이양빙의 기록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 본인이 생전에 전혀 기록하지도 않은 일을 그의 사후에 숙부인 그가 공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여기에는 어떤 숨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근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백의 "가본농서인, 선위한변장"이라는 싯구를 분석하여 이백이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의 25대손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서한의 이릉(李陵), 북주 이현(李賢), 수나라 이목(李穆) 이 계통의 후손이다. 그러나, 이백은 생전에 저작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먼조상이 이광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릉등과의 관계는 부인했다. 대만의 한 학자는 스스로의 분석에 의하여 하나의 추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백이 이광, 이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세민이 바로 이광, 이호의 후손이므로, 이백은 아마도 이세민의 증질손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백이 왜 당현종 천보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호의 자손들은 황실족보에 넣도록 하였는데도, 황실족보에 등기하지 않은 것일까? 그 원인은 바로 그의 선조가 죄를 입어 유배를 갔었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백의 조상이 범한 죄는 "종실간의 은원"에 얽힌 사건, 혹은 "현무문사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이백의 증조부가 아마도 당태종 이세민의 형이나 동생중 하나일 것으로 본다.

 

당연히 이런 추론은 그저 한 학자의 주장일 뿐이고,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하다.

 

이백의 친구인 범륜(范倫)의 아들인 범전정(范傳正)은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병서>>에서 "공의 이름은 백이고, 자는 태백이다. 그의 조상은 농서 성기 사람이다. 후손이 끊긴 집안에서 족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공의 손녀가 수집해서 알아낸 것이다. 공의 아들 백금(伯禽)이 남긴 글 수십행은 글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 상세히 알 수 없고, 대체적인 것만 확인할 수 있는데, 양나라 무소왕의 9대손이다. 수나라 말기에 난을 만나 집안이 모두 흩어져서 이름을 숨기고 유랑했다. 그리하여, 당나라가 시작된 후에도 원적에서 누락되었다. 신룡초기, 광한에 몰래 돌아왔다(潛還廣漢). 부친인 객(客)은 관리를 추구하지 않고, 구름과 숲을 벗하여 살았다"

 

범전정의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병서>>가 있기는 하지만, 이백의 집안내력문제에 있어서, 특히 그의 부친인 이객은 왜 "촉으로 도망쳐 들어오거나" "광한에 몰래 돌아왔을까" 만일 나라가 망하여 이국땅으로 도망쳤다면 일찌감치 원적으로 돌아오면 될 것이고, 만일 조상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백여년 전의 일인데 왜 굳이 도망쳐 오거나 숨어들어야 했을까? 아마도 이백의 먼 조상이 나라가 망하였다거나,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이후 이백일가가 사천성으로 몰래 숨어들어온 진정한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지 않을까? 그의 부친이 "도망쳐 들어오거나" "몰래 숨어들어서" 비교적 구석진 곳인 창명현 청련향(지금의 사천성 강유시 청련진)으로 오게 만든...이처럼 불확한 문자는 이백의 집안에 대하여 더욱 의심을 많이하게 만들고, 이 대시인의 집안내력에 대하여 더욱 수수께끼로 만들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청나라 사람인 왕기가 편저한 <<이백년보>>에서 언급한 <<두시습유>>와 범전정의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병서>>를 대조한 후 아마도 이백의 부친이 협객이었는데, 원수를 피하기 위하여 사천으로 숨어든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만일 학자들의 이러한 추측이 맞다면, 이백의 여러가지 집안문제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는 측면이 있다. 이백은 그의 시에서 처, 자식, 친구들에 대하여는 여러번 언급하고 있고, 그들에게 주는 시도 많이 있으며, 그들에 대한 정을 읊고 있다. 그러나, 부친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자기의 원래 출신이 "양나라 무소왕 이호의 9대손"이라는 것도 사사로이 친구들과는 얘기하였지만, 감히 문자로 밝히거나, 조정에 가서 등기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부친의 경력이나 처지와 관련있지 않을까? 그의 부친인 이객이 아마도 협객이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원한을 갚아주다가 실권자의 미움을 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백의 증조부가 바로 "현무문지변"에 관련된 당태종 이세민의 형이나 동생중 한 명은 아닐까? 그리하여 고향을 떠나서 이역으로 떠나고, 성과 이름과 집안내력을 숨기고, 일생을 마친 것은 아닐까? 이백의 시문이나 그의 언행을 보면 부친의 협객으로서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같다. 만일 학자들이 이 점에 대하여 좀더 연구한다면 이백의 집안내력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