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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재해석

아편전쟁의 진실

by 중은우시 2010. 3. 14.

글: 한육해(韓毓海)

 

대청제국은 실제로 장기간의 서방에 대한 개방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 역사는 절대로 아편전쟁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유럽국가중에서 대청제국이 특히 중시한 것은 제정러시아였다. 왜냐하면, 제정러시아만이 중국을 서쪽과 북쪽에서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북방의 위협을 경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제정러시아와 평화적인 관계를 안정적으로 건립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중국외교의 하나의 역사전통이다. 특히 강희제의 시대가 두드러졌다.

 

우리는 강희제때 일어난 아크사전투에서 청나라가 제정러시아를 물리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강희제가 제정러시아와 경제무역관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한편으로 강경책을, 다른 한편으로 유화책을 사용하는 것은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당시의 북경은 국제적으로 주요한 무역도시이기도 하였고, 강희제 또한 실제로 개혁개방과 대외경제무역활동을 중시한 군주였다.

 

프랑스인인 백진(白晋, Joachim Bouvet, 1656-1730)은 루이14세에게 보내는 비밀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모스크바의 사신이 대청제국의 영토를 밟자마자 강희제의 특사가 계속하여 수행하면서 아주 성의있게 대접했다. "북경은 황제가 모스크바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통상을 허용한 대도시이다. 통상과정에서, 그들은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고, 차별대우도 받지 않았다. 황제가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원히 통상을 유지하는 이웃나라로 남고자 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이 유일하게 중국황제로부터 환대를 받은 외국인은 아니었다. 황제는 네덜란드, 포르투갈에서 온 사신들은 열정적으로 환대했다. 백진은 특별히 이렇게도 지적했다. 외국인들에 대하여, 강희제는 조공의 예로 삼궤구고의 예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외국인들이 중국의 예의범절을 따르도록 강요하지는 않았고, 외국사신을 친절하게 대했다. 중국예절을 행하지 않는 거친 러시아인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하여 러시아인들은 아주 감동한다."  백진의 이 글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대청제국이 자유무역을 추구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이렇게 언급했다: "청나라는 무역관세가 아주 낮았다. 심지어 거의 세금을 거두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청제국은 무역세수를 주요한 국가수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청나라의 무역이 발달한 기본원인이다." 이 특징에 주목하면, 우리가 청나라를 이해할 때, 특히 청나라와 영국의 무역문제에서의 차이를 살펴볼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백진은 청나라궁중에서 오래 생활한 프랑스학자라는 점이다. 황제의 과학고문이자 선생이었다. 그의 글로 추단해보면, 강희의 손자인 건륭제가 허영에 빠지고 무지하여 영국인들이 삼궤구고를 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영국과 통상을 거부했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악의를 가진 자들이 날조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역사는 사실 이러했다. 1793년, 매카트니의 사신단이 환대를 받은 후, '무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내놓았다: 첫째, 주산 부근에 방어시설이 없는 섬을 영국상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 영국상인들이 휴식하고 화물을 보관하고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해달라. 둘째, 광주부근에도 동일한 권리를 주고, 영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왕래가 금지되지 않도록 해달라. 이는 실제로 영토할양요구였다. 건륭제는 당연히 이런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이런 무례한 요구때문에 그는 영국인들이 야만스럽고 무지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왕에게 보내는 칙서에서도 영국인들에게 훈계조로 말했다: "천조의 땅은 한척이라도 모두 등기되어 관리되고, 변방은 삼엄하게 지킨다. 비록 섬이나 사막이라고 하더라도, 경계는 분명하다. 각자 자신의 것이 있다. 이 일은 허가할 수 없다."

 

확실히 건륭제는 다른 나라들의 동남연해에서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계심은 영국인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외국인에 대한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무역에 대한 것은 아니다. 대청제국의 해양방어에 대한 경계심은 주로 장기간의 대만문제로 인한 것이다. 영토문제인 것이다. 대만의 정씨왕조의 교란을 막기 위하여, 강희제는 금해령(禁海令)을 내렸었다. 당시 대만은 네덜란드의 군사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륭제때, 대청제국은 외국세력이 대만에 간여할 가능성에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대만이 다시 대륙으로 진공해오는 근거지로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영국사신과 접견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건륭제는 해상무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섬을 영국상인의 화물보관지 및 전략근거지로 개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는 영토에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해서이지 무역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건륭제의 심모원려를 알 수 있는 점이다.

 

건륭제는 그저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을 쓸 줄아는 태평황제가 아니다. 그는 포성이 이어지는 전쟁터에서 단련된 매파군인이다. 심각한 변방의 도전 속에서 건륭은 무수한 난관을 겪으면서, 중국을 전성기로 끌어올렸다. 티벳, 신강문제에 대하여도 그는 빈틈없이 처리했다. 중국서남, 서북의 변방안정을 위하여 그는 수차례 친정하고 자신의 자제병을 이끌고 혈전을 벌여서 지켜냈다. 자식이 부모의 밭을 팔아먹는데에는 마음이 아프지 않다. 우리는 오늘 역사상의 전제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호할 수는 없다. 더더구나 역사를 일방적으로 재단하여 마치 중국의 오천년역사가 그저 '전제(專制)'라는 두 글자로 포괄되고 나머지는 전혀 없는 것처럼, 청나라는 체두변발을 빼고는 장점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국의 오늘날의 판도는 대청제국이 얻어낸 것이다. 건륭은 일생동안 영토를 조그만큼도 빼앗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판도를 늘이고 지켜냈다. 그에 있어서 영토를 한조각 떼어내는 것은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같다. 금은을 준다고 해서 땅을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소박한 농민성격은 사실 대륙통치자들의 최저선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는 민족영웅이라고 칭할 만하다.

 

건륭제를 누구든지 그에게 사탕을 주거나 고개만 숙이면 즐거워하는 저능아로 묘사한다면, 이것은 '이야기꾼'들의 역사왜곡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고, 거짓말마저도 앞뒤가 맞지 않게 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만번을 하더라도 진리가 될 수 없다. 건륭은 당시에 매카트니가 머리를 땅에 박고 인사하느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물며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거절한 것은 무역이 아니라, 영국에게 섬을 넘겨주어 화물집산지로 삼는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상 분명히 글자로 쓰여있고, 왜곡할 수 없는 것이다. 건륭의 이런 생각은 사실 대만의 경험에서 온 것이고 전략적인 것이고, 영토안전을 위한 것이다. 역사는 증명한다. 오늘 날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실제로 100% 옳은 것이다. 중국이 홍콩과 대만을 대륙을 전복시키는 근거지가 되도록 용납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강조해야할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일찌기 동남지역의 해금이 풀리기 전에, 대청제국은 항구를 개방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그리고 개방한 곳도 정씨군사집단과 대치하던 하문(厦門)이다. 강희23년(1684년) 해금이 풀리고, 대청제국은 마카오, 장주(漳州), 닝보, 강소운태산(雲台山)의 4곳의 통상항구를 개방하고, 곧이어, 광주, 하문, 상해의 통상을 개방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광활한 육지의 경계선에서 대청제국은 계속하여 국제무역을 대규모로 개방했다는 것이다.

 

근대중국의 연구가운데, 아주 가소로우면서 해석되지 않는 문제는 바로, 영국에 개방해야만 개방인가라는 것이다. 해양무역만이 무역인가라는 것이다. 육지의 무역은 그 금액이 거대했는데 그것은 무역으로 치지 않는가? 이런 엉터리논리대로라면, 유럽대륙상의 무역, 남유럽과 북유럽의 무역, 유럽대륙이 오스만제국을 통하여 아랍세계와 한 무역은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 정말 그렇게 해석해야한다면, 베니스공화국에서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발전한 무역의 역사는 모조리 지워버려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황당한 것은 이것 만이 아니다. 당시 영국과 해양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대청제국만이 아니다. 건륭만이 아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국가와 영명한 군주는 모두 포함된다. 유럽에도 네덜란드가 있고, 네덜란드의 다음에는 미국, 프랑스가 있다. 19세기후기 이래로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정치, 경제, 문화정책을 내놓은 독일도 있다. 그들은 모두 대청제국보다 훨씬 철저히 영국과의 자유무역과 해양무역에 반대했다. 그리고 이들 국가는 모두 일찌기 세계의 지도자이거나 패권자였다. 그들이 영국과 무역에 반대한 것은 영명한 판단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대청제국이 대영제국과 무역하지 않겠다고 한 것만 문제삼는가? 설마 영국에 반대하면 그것이 바로 무역에 반대하는 것이고, 영국을 거절하면 그것이 바로 문명을 거절하고 현대화를 거절하는 것인가? 이런 웃기는 이야기는 그저 20세기후반의 중국에서 아주 황당한 후식민지적 상황하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주 반성해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