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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법률/사건이야기

'범죄와의 전쟁'에서의 형사변호사

by 중은우시 2010. 1. 6.

글: 왕홍량(王鴻諒), 위일평(魏一平), 양로(楊璐)

 

충칭(重慶)시 제1중급법원의 로비에 사건입건기록을 찾아보면서 변호사 주명용은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북경변호사 이장(李庄)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비록 이장이 소속된 캉다(康達)율사사무소는 업계에서 유명한 곳이지만, 이장의 이름은 주명용이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마침, 그들이 개입한 것은 동일한 범죄조직(黑社會)관련사건이었다. 이장은 제1피고 공강모(龔剛模)를 대리했고, 그는 제2피고 번기항(樊奇杭)을 대리했다.

 

원래 12월 7일에 개정하기로 했던 범죄조직사건에 그들 둘은 이미 신속하게 행동한 변호사들이다. 사건이 검찰청에서 법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이 11월 23일에 막 공표되었는데, 그들은 그 날로 법원에 도착해서, 관련사건기록의 열람을 신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법원으로 가서 사건기록을 열람하고 복사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장은 곁에 앉아있던 주명용에게 자신이 예전에 요양(遼陽)의 범죄조직사건을 대리한 바 있다고 얘기했다. 이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이장을 만나봤던 변호사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 사건은 이장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간판격이었다. "이 업계는 원래 좁다. 동종업계사람들간에도 자랑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

 

다음날 11월 24일, 주명용과 이장은 충칭시 간수소(看守所)에서 두번째로 만났다. 이번에 주명용은 이장의 잘난체하는 개성을 강하게 느꼈다. 주명용은 사건기록을 열람하기 위하여 일부러 아침일찍 왔다. 왜냐하면 이전에 '매체에서 공강모등 사건의 사건기록이 109권에 달한다"는 얘기를 들었서, 오후에 와서는 복사를 다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에 가서 보니, '얇다란 몇백 페이지에 불과했고, 거기에는 일부 소송문서와 감정자료도 있었고, 증거자료는 일부분이 겨우 1장이었다." 이것은 주명용이나 다른 변호사들도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생각했다. 비록 <<형사소송법>> 제36조 제2항에는 명확하게 "변호사는 인민법원이 사건을 수리한 날로부터, 본 사건에서 기소한 범죄사실의 자료를 열람, 초록, 복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본 사건에서 기소한 범죄사실의 자료"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지는 법률에서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고, 관련부문도 이에 대하여 상세한 해석을 해놓지 않았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1996년에 수정되었는데, 과거의 재판방식을 개혁한 것이다. 그 결과 검찰청은 개정전에 법원에 사건자료를 이송해야 하지만, 오히려 이전에는 '모든 사건기록'을 이송하게 되어 있었는데, '일부 사건기록'으로 바꾸어 버렸다. 여기에는 "기소장, 증거목록, 증인명단 및 주요증거복사본 및 사진"이 포함된다. 그중의 '주요증거'는 통상적으로 혐의자를 유죄로 인정한 증거를 말한다. 변호사는 재판단계에서 사건기록열람을 청구하지만, 이 일부내용밖에 볼 수가 없다. 검찰청이 법원에 이송하지 않은 사건기록자료는 검찰청에서 변호사의 열람을 거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적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명용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차를 법원에서 멀지 않은 광장에 세워놓고, '엔진을 끄지 않았다' 그는 사건처리를 도와주는 현지의 젊은 변호사를 법원에 보내어 사건기록을 복사하게 시켰다. 그 후에 '가장 빠른 속도로 뛰어오라'고 시켰다. 이렇게 해야 '가장 먼저 간수소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이렇게 많은데 만일 1시간 늦게 가면 아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제일 먼저 간수소에 가서 당사자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주명용이 간수소에 도착하자, '반드시 전담수사팀의 인원이 있는 장소에서 접견할 수 있다'고 통지받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사건이 이미 재판단계에 들어섰고, 피고인이 이미 법원으로 넘어왔는데, 규정에 따르면 이때는 수사기관이 피고인을 접촉할 권리가 없다. 그런데 왜 경찰이 접견자리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사실상, 새로 수정된<<변호사법>> 제33조는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범죄혐의자가 수수기관에서 제1차심문 혹은 강제조치를 받은 날로부터, 위임받은 변호사는 변호사개업증, 변호사사무소증명서와 위임장 혹은 법률원조공문을 가지고, 범죄혐의자 피고인을 만나서 관련사건현황을 파악할 권리가 있다. 변호사가 범죄혐의자, 피고인을 접견할 때는, 감청당하지 않는다" 비록 신 <<변호사법>>이 2007년 10월 29일에 제10기 전인대상무위원회 제30차 회의에서 통과되었고, 2008년 6월 1일부터 정식 시행되었지만, 이 법률의 관련조문은 여전히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왜냐하면 <<형사소송법>>의 관련조문은 상응하게 수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이 신 <<변호사법>> 제33조를 근거로 내세우려고 하지만, 왕왕 관련부서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주명용은 기자에게 말했다. 그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있을 때, 이장이 간수소에 도착했다. 반드시 전담수사팀이 접견시에 참석해야한다는 요구에 이장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말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간수소 검찰실로 가서 이 내용을 통보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법원에 전화를 했으나, 얻은 대답은 '위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명용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와 이장이 간수소측과 논쟁을 벌일 때,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충칭 변호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말한마디 하지 않았다'

 

'싸워봐야 얻을 게 없고, 시간낭비다'라는 점을 생각하고, 주명용은 마지막에 '결국 동의했다' 그는 그를 도와주는 젊은 변호사와 함께, 사건담당경찰을 참여시키고, 처음으로 당사자 번기항을 접견한다. '전담수사팀인원이 있으면 접견하지 않겠다'라고 우기던 이장도 마지막에는 할 수 없이 마찬가지로 타협했다. 그후 이장과 공강모의 3번에 걸친 접견은 모두 전담수사팀경찰이 참여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몇번 안되는 접촉이지만, 그동안에 있었던 사정들은 주명용으로 하여금 이장이 '전혀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였따. 그의 말하는방식은 '다른 사람이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간수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장은 큰 소리로 질책하며 물었다: "너희가 이렇게 하다가는 12월 7일에 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래 정법위에서 책임을 물어오면 어떡할 거냐?" 그는 심지어 같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다른 변호사들에게도 사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네가 대리하는 그 사람은 사형으로 정해졌다' 이같이 잘난체 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은 그와 접촉해본 적이 있는 업계인사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다.

 

큰소리치며 나타난 이장은 충칭에서 금방 난감한 처지에 몰린다. 기괴한 것은 이장도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것같다는 것이다. 그가 체포되기 3,4일전에 어느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내가 충칭 경찰의 주목을 끈 것같다 그들이 아마도 나를 체포할 것같다" 이장은 또한 충칭경찰측이 이미 북경에 사람을 보냈고, 그에 대한 일을 관련부서에 보고했다고 했다. 관련부문도 그에게 상황을 물어보기는 했지만, 추가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장이 전화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한 것도 기억한다: "이후에, 다시는 충칭으로 갔는데, 비행기의 일등석에서 충칭시 공안국장 왕립군과 우연히 만났다" 이장은 금방 왕립군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장이 이 일을 얘기하면서 약간 불안해 했다고 한다.

 

주명용은 이장이 왜 충칭범죄조직사건을 맡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 자신은 실재로 당사자인 번기항의 가족이 집요하게 찾아왔기 때문에 맡았다고 했다.

 

시간적으로 계산해보면, 주명용은 가장 먼저 충칭범죄조직사건에 개입한 북경변호사이다. 금년 6월 3일에 발생한 "에딘버러소구강도사건'으로 충칭의 범죄조직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직접 범죄조직소탕작전은 2달전부터 준비되었다고 한다. 번기항은 바로 이 사건으로 6월 26일 충칭공안국 강북분국에 체포당한다. 번기항의 가족은 6월말에 여러 경로를 통해서 주명용을 찾아왔고 몇번 통화한 후에, 주명용은 약간 망설였다. 그는 상대방에게 부친의 병이 위중하여, 사건을 맡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가 괴이하게 생각했던 것은 번기항이 가족은 '바로 직접 고향의 병원으로 찾아갔다" "조용히 병상에 앉아서, 비록 마음은 조급했지만, 며칠간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나눌 수는 없어서, 주명용은 가족들에게 충칭의 변호사를 찾아서 사건현황을 알아보게 하라고 건의했다. 결과 1달이 지났고, 두명의 충칭 변호사를 갈아치웠다. "사람은 갇혀 있는데, 사건이 어느 단계인지, 사건처리기관이 어디인지, 무슨 죄명인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가장 멍청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충칭의 모든 구,현의 공안국, 법원, 검찰청 및 간수소를 샅샅이 찾아보았다. "며칠마다 한번씩 이 기관들을 훑으면서 물어보았다." 그래도 소식이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충칭공안국 '범죄소탕반(打黑辦)'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문을 넘어 들어가보지도 못했다. '범죄소탕반'의 대답은 '변호사는 만나지 않는다. 제보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근 5개월후인 11월 20일, 금요일, 주명용이 처음으로 확실한 소식을 듣는다. 현지 변호사가 평소와 같이 전화를 물어보는 중에 "사건이 이미 중경시검찰원 제1분원으로 갔고, 다음주 월요일에 자료를 열람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틀 쉬고나서, 11월 23일, 주명용은 아침 일찍 검찰청을 찾아갔다. 한 업무인원은 '그날의 신문을 들고' 그에게 말했다. '아직 못봤느냐? 사건은 이미 법원에 갔다" 주명용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그가 법원으로 가서 물어볼 때, 번기항의 가족도 법원의 전화통지를 받았다: "개정시간은 12월 7일로 정했다. 변호사를 선임해도 된다" 이것은 번기항이 사건에 연루된 이래, 그의 가족이 처음으로 사법기관에서 명확히 고지받은 것이다.

 

형사소송은 일반적으로 세 단계로 나뉜다. 수사, 기소와 재판. 신 <<변호사법>>이든 아니면 13년동안 수정된 적이 없는 <<형사소송법>>이든, 모두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수사단계부터, 변호사는 당사자를 접견할 권한이 있고, '법률자문을 제공하고, 이의제기 항소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적혀 있는 법률조문도 실무에서는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러명의 형사변호사를 만나봤는데, 모두 이런 현실의 문제를 언급했다. 수사단계에서, 만일 '중대범죄조직사건 혹은 군중집단사건'이면 변호사들은 위임을 받더라도 당사자를 위하여 여하한 도움도 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기소단계에 변호사들이 실질적으로 사건에 개입하고, 당사자를 접견한다. 북경변호사 선동(宣東)은 일찌기 20년이 법관경력이 있다. 흑룡강고급법원에서 최고인민법원까지 접촉한 것은 모두 '중대형사사건'이었다. 그는 '만일 이 단계에서도 접견을 못한다면 확실히 이상한 경우이다'라고 말한다.

 

선동은 충칭 진명량(陳明亮) 범죄조직사건에서 변호사를 맡았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자신이 십개 성,시의 수십건의 범죄조직연루사건을 처리해봤지만, 현재 이렇게 '공안기관의 기소의견서, 검찰기관의 기소서, 법원의 개정통지서'를 동시에 받아본 경우는 '직업생애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진명량등 사건에 개입된 변호사 허석룡(許昔龍)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허석룡은 북경대성율사사무소에서 왔다. 일찌기 "상해사회보험사건" "증권계사형제1인 양언명사건"등 대형형사사건을 담당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소단계에 이 사건에 개입했다. 두번 당사자를 접견했다. 비록 매번 두 명의 전담수사팀의 경찰이 참여했지만, 현지 공안,검찰,법원의 사람들은 태도가 아주 괜찮았다"

 

허석룡은 접견때 전담수사팀의 인원이 자리하는 것에 대하여는 관용적인 태도였다. 그는 이런 상황이 드물지도 않다고 한다. "이것때문에 사법기관과 싸우면, 손해보는 것은 결국 당사자이다" 그가 보기에, "비록 <<변호사법>>에 명문규정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각지역 사법기관이 변호사가 당사자를 접견하는때는 확립된 방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그는 "아무리 유명한 변호사라도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결과를 보증할 수는 없다. 그건 법관이 할 일이다" 선동도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싸워야 효과는 없다. 경험있는 변호사라면 그저 법정에서 법리로 다투어야 한다."

 

충칭 변호사 초지군(肖志軍)의 기억은 나중에 사건에 개입한 이들 변호사들과는 다르다. 금년 8월, 초지군이 이의(李義)의 범죄조직사건을 대리할 때, 수사단계는 이미 끝났다. 사건이 기소단계에 접어들었다. 초지군은 그 동안 그가 3번 당사자를 만났다고 한다. "과정은 아주 순조로왔다. 수사팀의 허가도 필요없었고, 경찰이 참석하지도 않았다. 통상적인 사건과 다를 게 없었다." 초지군은 생각해보면 조금 곤혹스럽다. "아마도 범죄와의 전쟁이 최고조에 오르면서 이의 사건은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방 발견한다. 10월, 처음 사건이 개정되면서, 상황은 바뀌어 버렸다.

 

이의 사건의 1심결과가 나온 후에, "먼저 상소장을 제출할 수 없었다. 법관은 바쁘다고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바빴다" 비록 초지군이 만저우(萬州)에서 10년간 법관을 지냈지만, 충칭의 사법계통에도 인맥이 두터웠다. 그러나 이때는 전혀 작용을 못했다. "몇몇 시내 범죄조직의 두목들이 잡히고, 범죄와의 전쟁이 최고조에 이르자, 모든 사법단위는 야근을 했다." 곧이어 초지군은 단독으로 당사자를 접견하겠다는 요청이 거부당한다. 반드시 사건담당경찰이 참석해야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이의사건의 개정때 상황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되었다. "26명의 피고, 29명의 변호사, 70여명의 사법경찰, 각급 공안,검찰,법원의 책임자? 이렇게 큰 재판은 처음봤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일련의 절차를 거쳐, 초지군은 "마침내 당사자를 접견할 방법을 찾아낸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 범죄조직사건을 맡은 변호사들이 속속 와서 그에게 당사자를 접견하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이장 사건이 발발한 후, 초지군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담수사팀의 경찰이 참석한 것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는 보호하는 것이 된 것같다"

 

11월 24일부터 12월 2일까지, 주명용은 번기항을 모두 5번 만난다. 매번 2시간 정도였다. 모두 전담수사팀 경찰이 함께 했따.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한번은 전담수사팀 경찰이 일이 있었다. 우리는 한 수 없이 간수소에서 반나절을 기다렸다." 이 5번의 접견에서 주명용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꿈에라도 말실수할까봐 두려웠다. 그러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접견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곁에 있는 젊은 현지 변호사에게 당부했다: "한마디도 묻지 말고, 그저 기록만 해라." 주명용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문을 당했는지, 이것은 원래 변호사가 당사자에게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는, 완곡하게 제기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당신 손에 있는 상처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비록 기자가 만난 많은 형사소송변호사들이 이전에 이장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캉다율사사무소의 웹사이트를 보면 이장은 확실히 그 법률사무소의 파트너중 하나이다.

 

1988년에 성립된 캉다변호사사무소의 본사는 북경에 있다. 지금까지 전국에 11개의 분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변호사수만 200여명에 달한다. 캉다를 설립한 대표변호사 부양(付洋)은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전인대 법공위 부처장, 처장, 경제법실 부주임을 역임했고, 40여개의 법률제정업무를 맡았었다. 이외에 부양에게는 또 다른 대단한 신분이 있다. 팽진(彭眞)의 아들인 것이다. 1979년 중국의 첫번째 <<형법>>과 첫번째 <<형사소송법(시행)>>은 바로 팽진이 주재하여 제정한 것이다. 팽진탄신 100주년때, 부양은 <<변호사와 형사변호>>라는 글을 부친을 기념하여 쓴 바 있다. 그는 부친의 경우와 이념을 결합하여, 이 글에서 이렇게 썼다: "변호사가 변호의 직책을 행사하기 전에, 수사 기소기관은 왕왕 이미 아주 힘든 업무를 수행했고, 이미 법죄로 확인한 것이다. 왜 다시 변호사로 하여금 따지게 하는가? 사실, 바로 잘못된 사건을 피하고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업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법률은 형사변호제도를 설립했고, 변호사가 형사소송에서 집법기관과는 다른 책임을 맡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피고인은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1년말, 고향 석가장을 떠나 북경으로 온 이장이 캉다율사사무소에서 자리를 잡고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승(趙國勝)이 보기에, "자신의 노력에 의지한 것'이다. 조국승은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석가장 사법국 율사처 처장을 맡았고, 이장이 석가장에 있을 때 어떻게 지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비록 부양은 '현재 상황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조국승의 관찰에 따르면, 이장은 비록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건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는 상당한 전문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한다. '캉다의 파트너는 아무나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조국승의 말이다.

 

조국승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장은 1993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자격증을 취득한다. 이해에 그는 이미 32살이었다. 1995년, 이장은 하북성 사법청 직속인 변호사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한다. 당시의 동료인 최쌍희(崔雙喜)는 이렇게 기억한다. 이장은 그때 학력이 높지 않았다. "그는 하북정법간부관리학원의 전과(專科)를 졸업했다. 그것은 성인교육학교이다." "이전에 그는 철로계통의 보통노동자였다" 그러나 최쌍희에 따르면, 이장은 돌파력이 있는 사람이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정책이 개방되면서 변호사들은 신속히 발전단계에 접어든다. 1996년의 파트너변호사사무소관리방법에 따르면, 변호사경력 만3년인 변호사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3명의 파트너는 변호사사무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환경하에서, 이장은 다른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석가장에 '장성(庄成)율사사무소'를 설립한다. 석가장에서 최초에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먼저 생긴 변호사사무소였다고 한다.

 

장성율사사무소는 처음에는 하북성 사법청이 관리하는 성직속 변호사사무소였다. 나중에 이장은 돌연 조국승을 찾아온다. 변호사사무소를 석가장시 직속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이다. 변호사사무소에 있어서 이 차별은 크지 않았다. 조국승은 관리기구가 변호사사무소와 연락하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는데, "하나는 진정을 받았을 때, 상황을 파악하고 처리하기 위함이고, 하나는 어떤 업무에 협력하는 것인데, 변호사사무소가 일부 공익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다." 조국승이 나중에 들은 바로는 "아마도 그와 당시 성 사법청 율사관리처의 처장과 관계가 돌연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장의 장성율사사무소는 기차북역 부근의 2층짜리 작은 건물안에 있었다. 나중에 한번 이사를 한다. 조국승이 기억하리고, 이 변호사사무소는 석가장에서 중하규모였다. 등기변호사는 10명이고, 겸직변호사와 다른 잡무인원이 있어서 합쳐서 20명가량이었다. 그러나, 조국승은 이장에 대하여 괜찮게 평가한다. 이장은 그 당시에 핵심변호사였다. 그는 아주 적극적이었고, 사법국에서 각종 대형공익활동에 참가를 요구하면, 그는 모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예를 들면, 공원에서 대형 활동이나 선전을 하거나 가난한 시골마을을 도와주는 자선활동같은 것이다.

 

조국승은 이장이 일처리가 활달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율사처에서 중요한 접대임무가 있을 때, 그에게 한 마디만 하면 이장은 힘껏 도와주었다. 1995년, 조국승이 석가장율사협회를 조직할 때, 한번은 북경율사협회의 사람을 접대해야 했는데, "이장에게 중요한 손님이니 잘 대접해달라고 한 마디 했더니, 다음 날, 이장이 벤츠를 몰고 나타났다. 차는 이장의 것이 아니었고, 자신이 법률고문을 맡는 회사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2001년을 전후하여, 이장은 골치거리가 있었다. 조국승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변호사사무소의 파트너는 반드시 풀타임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사무소의 파트너중 하나가 겸직이었다." "성사법청 율사처에서 진정을 받고는, 그에게 상황을 조사했다. 그런데 이장은 불만이었다. 그는 일곱, 여덟군데 성직속 율사사무소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도 모두 똑같은데 왜 자신에게만 칼을 대느냐고 따졌다." "성사법청의 태도는 아주 강경했다. 규정에 따라 그의 사무소를 말소시키겠다고 했다." 조국승이 중간에 막아주었다: '이장에게 3개월의 시간을 주어 시정하게 하자. 아니면 그 파트너를 사직시키고, 아니면 새로 파트너를 데려오게 하자" 비록 조국승이 이렇게 도와주엇지만, 이장은 화를 참지 못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욕까지 내뱉었다. '안해'"

 

이장이 캉다율사사무소에 들어간 것은 조국승과 약간은 관계가 있다. 1998년 조국승이 석가장율사협회 주석으로 있을 때, 중국율사대표단의 해외방문에 참가한 적이 있다 .캉다율사사무소의 주임인 부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때 캉다는 이미 72명이 있고, 다렌, 상하이, 광저우, 충칭 등지에 모두 분사무소가 있었다. 돌아온 후, 조국승과 이장은 부양과 그의 사무소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었다. 2001년 이장이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일찌기 한동안의 방황기가 있었다. 이장은 조국승에게 같이 변호사사무소를 열자고도 했다. 그러나 조국승은 자신이 나이가 많고, 신경을 많이 쓰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대신 그는 이장에게 '북경으로 가서 일해보지 그러느냐'고 말했다. 나중에 이장이 북경으로 갔다. 그는 조국승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바로 캉다율사사무소로 가서 자리를 구했다. 북경으로 간 후, 이장은 명절이 되면 조국승에게 전화를 해오거나 메세지를 보내주었다. "그는 잘하는 것같았다. 어떤 때는 전화로 나에게 농담도 했다. 나보고 북경에 와서 부양을 만나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