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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유위)

강유위(康有爲)의 세번의 서태후 암살시도

by 중은우시 2009. 10. 26.

글: 수은하(水銀河)

 

속담에 "수재조반, 십년불성(秀才造反, 十年不成, 수재가 반란을 일으키려면 십년이 지나도 이룰 수 없다)"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강유위에게 쓰면 딱 들어맞는다. 그는 전형적인 서생이다. 강유위는 정의감과 개인적인 호오를 가지고 일을 처리했다. 서태후와 영록등 실권자들을 처음부터 적으로 규정지어버렸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그들은 변법유신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서태후는 무술변법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강유위가 변법을 하려면 왜 나를 찾지 않는 거지?" 이를 보면, 강유위는 비록 정치가의 포부는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고, 정치가의 책략은 없었던 순수한 글쟁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생은 변법실패후에 여러번에 걸쳐서 멍청한 서태후암살시도를 했다. 결과는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첫번째 암살시도는 원세개를 찾아간 때이다. 사상관점으로 보자면, 원세개는 양무파(洋務派)의 후기지수이다. 사상은 어느 정도 유신파에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후, 기연으로 원세개는 강유위와 안면을 익히게 된다. 강유위의 제4차상소를 올려 광서제에게 변법을 요구했을 때, 도찰원, 공부에서는 그 상소문을 광서제에게 전달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원세개가 도와준다. 이외에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원세개는 옹동화에게 글을 올려, 금일의 시국이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반드시 변법을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렇게 몇번 교류하면서, 강유위는 원세개가 자신과 같은 요강에 오줌을 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데 된다. 그래서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키기 전날, 그는 담사동(譚嗣同)을 보내어 원세개를 설득하려한다. 원세개에게 영록과 서태후를 죽여버리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원세개가 배신한다. 당시에 이런 가요가 사회에 널리 퍼졌다:

 

육군자, 두로송(六君子, 頭送)

원항성, 정자홍(袁項城, 頂子紅)

매동당, 요기공(賣同黨, 邀奇功)

강여량, 재몽중(康與梁, 在夢中)

부지타, 시효웅(不知他, 是梟雄)

 

육군자의 머리가 떨어졌다.

원세개의 벼슬이 높아졌다(*항성은 원세개의 고향)

동료를 팔아먹고, 공로를 세웠구나.

강유위와 양계초는 아직 꿈속에 있다.

그가 효웅인 줄도 알지 못하면서

 

이를 보면 백성들은 강유위가 서생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암살시도는 강유위가 호남사람인 심신(沈藎)을 보낸 것이다. 심신은 원래 담사동의 가까운 친구이다. 유신이 실패한 후, 여전히 강유위, 양홍(梁鴻)과 서신왕래를 계속했다. 강유위는 죽음을 두려워해 해외로 도피했고, 심신으로 하여금 서태후를 암살하도록 격려했다. 심신은 바로 승락한다. 그리고 짐도 챙기지 않고 북경으로 올라가서 암살행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그는 일개서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조금후 그의 친구인 당재상(唐才常)이 자립군의거를 계획한다. 심신은 당연히 그 친구를 도우면서, 암살 건은 잠시 접어두었다. 자립군의거는 금방 실패로 끝난다. 심신은 무창에서 며칠간 숨어있다가, 상해로 몰래 숨어들어가고 다시 북상한다. 그리고 팔국연합군과 교분을 맺는다. 그는 외국의 힘을 빌어 만주족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 당시 사상은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1903년 4월, 제정러시아가 <<동삼성교수조약>>을 위반하여 청나라조정에 7개항의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다. 심신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그 밀약내용을 알아내서, 그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해버렸다. 그리하여 전국이 발칵 뒤집혀진다. 서태후는 피동적인 입장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심신은 친구인 오식쇠에게 배신당해 유신당 사람이라는 신분이 노출된다. 서태후는 그를 아주 미워해서, 그를 잡아서 죽이게 된다. 다만 만수절이므로 서태후는 공개적으로 그를 처결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형부에 명을 내려 옥중에서 곤장을 때려 죽이고, 외부에는 병사했다고 공표한다.

 

세번째 암살시도는 강유위가 보황파(保皇派)의 핵심인물인 양철군(梁鐵君)을 파견한 것이다. 양철군은 소자산계급이다. 오랫동안 광서의 오주에서 소금판매를 해서 돈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강유위와는 영남의 대유(大儒) 주구강(朱九江)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형제간이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털어 강유위의 사업을 도왔을 뿐아니라, 무술정변후에는 집을 떠나 해외로 나가서 강유위와 함께 망명생활을 한다. 양철군은 무술을 잘했다. 그리하여 강유위의 호위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은 나중에 주종관계와 비슷하게 된다. 이를 보면, 양철군은 강유위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강유위가 그를 파견했다는 것은 자신의 심복대장을 파견한 셈이다.

 

양철군은 임무를 받은 후, 진묵암(陳默庵), 양자강(梁子剛)등 몇명을 데리고 북경으로 들어간다. 웃기는 일은, 이번 암살계획의 경비로 1만은원을 잡았는데, 이를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철군은 할 수 없이, 옛날로 돌아가서, 북경에서 장사를 한다. 등시구에 '길창(吉昌)'사진관과 '광명(光明)'동양차(車)회사를 차린다. 양철군은 이 장사를 이용하여, 빈번하게 경찰청, 신문계 및 궁내태감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태후의 소식을 탐지한다.

 

양철군 대협은 1904년 11월에 북경에 도착한 후, 1906년 8월 체포되어 희생되기까지, 근 2년의 시간을 북경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돈을 모으고, 폭탄을 연구하고,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환관 요환경, 왕한장, 풍중평등과 사귄다. 심지어 서태후와 광서제의 기거, 건강상황까지 손바닥처럼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그는 서태후를 '서양차' 혹은 '소형화물선'으로 유인하여, 폭탄으로 죽여버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1906년의 어느날, 양철군은 천진가에서 남해 같은 고향사람인 주기(朱淇)를 만난다. 주기는 원래 중흥회에 참가한 적이 있고, 나중에 간첩의 혐의를 받아서 혁명당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 천진경찰청의 정탐으로 활약했다. 타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양철군은 처음에 조심했다. 그러나 여러번 얘기를 나누다보니, 상대방을 믿고,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털어놓게 된다. 8월 8일, 양철군은 체포당한다. 9월 1일, 혹형을 받은 후 양철군은 살해된다.

 

서태후암살이라는 같은 프로젝트에서 강유위는 세번이나 실패한다. 결국 이는 그의 전문적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매번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다. 강유위의 일생이 실패로 끝난 것이 우연만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