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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유위)

강유위(康有爲)의 부인들

by 중은우시 2007. 7. 31.

글: 진명원(陳明遠)

 

강유위(캉유웨이)는 일찌기 "일부일처제" 운동을 벌인바 있고, 부녀해방과 현대가족제도의 건립을 제창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스스로 이를 지키지 않고, 여러 명의 첩들을 두었다.

 

강유위는 처첩성군(妻妾成群, 처와 첩이 무리를 이룰 정도로 많음)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처첩을 두었는가? 필자가 고증한 바에 의하면 강유위가 정식으로 맞이한 처첩중에 이름을 알 수 있는 자가 6명이고, 이들은 일찌기 모두 상해의 집에서 같이 산 적이 있다. 대부인(大夫人) 장운주(張雲珠), 이이태(二姨太, 이태는 첩이라는 의미임) 양수각(梁隨覺, 취할 때 17살), 삼이태 하전리(何理, 미국화교, 취할 때 17살), 사이태 시강학자(市岡鶴子, 일본하녀, 취할 때 17살), 오이태 요정징(廖定徵), 육이태 장광(張光, 취할 때 19살).

 

강유위의 첩들은 취할 때 대부분 20살이 되지 않은 처녀들이었고, 명실상부한 "작은" 마누라였다.

 

강유위는 광동 남해에서 결혼한 원부인 장운주가 연속하여 3명의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강유위의 불만이 컸다. 그래서 고향에 있을 때 첩인 양수각을 취했고(그녀는 강유위가 해외로 유랑할 때 광주에 거주한 바 있다), 1남2녀를 낳았다. 원부인인 장운주는 시어머니인 노연지(勞連枝)를 모시고, 홍콩에 장기간 거주했다. 1907년, 강유위가 50세 되던 해, 미국서부의 프레스노에서 나이 겨우 17살된 화교재녀 하전리를 셋째 첩으로 들인다. 그녀는 영문통역 겸 비서역을 했다. 하전리는 강유위보다 33살이 어렸으나, 총명하고 영리했고, 다재다능했으며, 강유위를 따라 전세계를 주유했으며, 강유위의 유력한 조수였다. 나중에 1남1녀를 낳게 된다.

 

1911년 6월 7일, 강유위는 양계초의 초청을 받아, 싱가포르에서 일본으로 이주한다. 사제간에 일본 관도원(觀濤園)에서 함께 거주하는데, 문제는 부인들간의 관계가 좋지 않았었다. 어리고 영리한 하전리는 나이 겨우 22살이었는데, 양계초의 부인인 이혜선(李惠仙)은 그녀보다 두배는 나이가 많았다. 양계초부인인 이혜선이 어찌 그녀를 "사모"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강유위의 셋째 첩인 하전리는 전족을 한 양계초부인을 무시했다. 그렇지만, 양계초의 부인은 명문집안출신으로 절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쌍방은 화합할 수가 없었다. 1912년 봄, 강유위와 하전리는 수마호(須磨湖)의 "분예원(奮豫園)"으로 이사나갔다.

 

강유위는 54살 되던 해에, 다시 넷째 첩인 일본첩을 들인다. 그녀는 일본여자인 시강학자였다. 수마호 분예원에서 마침 하전리가 임신을 하게 되자, 강동응(康同凝)등의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16살된 고베소녀 시강학자를 하녀로 들인다. 1913년, 강유위의 모친인 노연지가 중국에서 사망한다. 강유위는 귀국하여 모친상을 치른 후 일가족을 이끌고 상해의 신가화원(辛家花園)으로 이주한다. 오래지 않아 시강학자를 상해로 데려온고, 신가화원의 유존려(遊存廬)에서 그녀는 정식으로 강유위의 넷째 첩이 된다.

 

1914년, 셋째 첩 하전리가 상해에서 불행히도 성홍열로 사망하니, 나이 겨우 24살이었다.

 

이후, 강유위는 다시 다섯째 첩인 요정징을 취한다.

 

원부인인 장운주는 1922년까지 살다가 죽는다.

 

강유위는 만년에 다시 여섯째 첩인 장광을 취한다. 그녀는 원래 서호의 유람배를 모는 여자였다. 강유위가 서호에서 유람하다가 그녀에게 반했다. 61세 되던 해에 그보다 42살이나 어린 소녀 장광을 첩으로 맞이하고, 상해에서 거창하게 혼례를 치른다. 이 19살의 처녀는 아직 강유위의 자녀들보다도 어렸었다. 결혼식때는 강유위집안의 자녀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다. 장광은 천진난만하고 귀여웠으며, 강유위가 임종전에 가장 아끼던 첩이 된다.

 

강씨집안은 대가족이었고, 인원도 각양각색으로 섞여 있었다. 집안에는 원부인인 장운주이외에도 선후로 취한 다섯명의 첩이 있었으며, 결혼하지 않은 6명의 자녀도 함께 살았다. 여기에 일하는 사람들과 식객들까지 하여 동상 거주하는 사람이 수십명에서 백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 1925년초, 강유위는 28세된 시강학자가 결혼 12년만에 임신한 것을 발견했다. 이 때, 강유위는 이미 68세의 노인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강학자가 강유위의 장남인 강동잠(康同箴)과 암도진창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수근댔다. 그리하여 집안내의 분쟁은 폭발했다. 늦가을, 시강학자를 "생활습관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보내버린다. 시강학자는 일본에 돌아가서 딸을 낳고 이름을 능자(凌子)라고 짓는다. 다음 해에 시강학자는 강유위가 청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1927년 강유위는 청도에서 급사한다. 이는 여섯째 첩인 장광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녀는 젊어서 과부가 되었는데, 개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과부인 장광이 항주의 농촌에 은거할 때, 화가인 유해속(劉海粟)은 이 젊은 "사모"를 매우 동정했고, 일부러 항주까지 그녀를 보러 갔다. 당시, 장광은 강유위가 남긴 유산 즉, 한 상자의 아주 가치있는 글자와 그림을 생명처럼 아꼈다. 매번 강유위를 그리워할 때마다, 상자를 열어 강유위의 글과 그림을 보곤 했었다. 1945년 이 상자안에 무가지보인 글과 그림이 날개도 없는데 사라졌다. 그녀는 상자를 열었다가 글과 그림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혼절한다. 이때부터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황천으로 간다.

 

1974년 2월, 70여세된 시강학자는 수마호의 "분예원"에서 멀지 않은 교외에서 기찻길에 누워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