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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유위)

강유위(康有爲) : 거짓과 사기

by 중은우시 2007. 7. 6.

 

 

글: 진명원(陳明遠)

 

강유위(캉유웨이, 1858-1927)는 광동성 남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장소(長素)이다. 청나라말기의 개량파이며, 유신변법에 참여했고, 나중에 보황파(保皇派)의 우두머리가 된다.

 

황창건의 <<무술변법사연구>>, 장건위의 <<온고무술년>>등 저서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1895년 5월, 강유위는 소위 그 개인이 "18성 1천200여 거인을 조직하여 연명으로 공거상서(公車上書)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거짓이고, 인원수도 허구이다.(이 숫자는 강유위가 스스로 편찬한 연보에 기재되어 있고, 그가 1895년에 쓴 시에서는 18개성 거인 3천명이 글을 올렸는데, 다음 날 미국대사가 글을 요청해서, 전하니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으니, 그는 갈수록 허풍이 세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강유위는 당시에 진정으로 "상서(上書)"를 실행하지도 못했다. 그는 단지 송균암의 문앞에서 일부 각지에서 북경에 온 거인(擧人, 과거시험참여자, 절대 3천명이 될 수 없음)들에게 연락했고, 상서를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이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원인은 강유위가 알고 있는 환관으로부터 그가 진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는데, 만일 그가 앞장서서 상서를 올리게 되면, 손에 들어온 '진사'의 벼슬이 날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물러섰다. 사료는 이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바로 강유위의 충실한 제자인 서근의 <<남해선생사상서기>>의 부록인 <<잡기>>, 당시 송균암 집회에 참가했던 "애시노인 미환씨"의 <<공거상서기서>>, 장대천이 제공한 증농염, 이매암의 회고기록(이들도, 당시 송균암집회에 참석했었다)이 모두 그렇다.

 

강유위는 소위 "공거상서"에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날 전국각지의 거인과 관원들이 올린 상서가 모두 15건이었다. 호북, 강서, 절강, 하남, 산동, 사천등지의 거인들이 모두 이 날 상서를 올렸다. 그것이 진정한 "공거상서"이다.

 

나중에 강유위는 자신을 위하여 이 "영광된 역사"를 날조한다. 염치없게도 스스로 자기를 과장하고, 이런 공로부를 자신의 정치적인 자본으로 삼는다. 그는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얻었으며, 한때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진실한 모습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현재는 이미 당시 유명했던 "공거상서"는 실제로 전국각지의 거인들의 공동의 애국행동이었고, 강유위에게 공로를 돌릴 것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 졌다.

 

무술변법, 백일유신의 핵심인물은 실제로 양예(楊銳), 유광제(劉光第), 담사동(譚嗣同), 임욱(林旭)의 네 사람이었다. 이들은 "군기사경(軍機四卿)" 또는 "사장경(四章京)"으로 불리던 인물로, 모두 광서제에 의하여 4품의 관직을 받았고, 신정(新政)에 참여했다. 당시 신정에 관한 조서는 전부 이 군기사경이 광서제를 대신하여 초안했다. 사장경이 실권을 장악했으므로, 양계초가 말한 바대로라면 "이름은 장경이나, 실질은 재상"이었던 것이다. 장경은 원래 관직명으로 청나라때 군대직위였으며 만주어의 음역이다. 군기처와 총리각국사무아문에서 문서사무를 처리하는 관리도 장경이라고 불렀다.

 

1898년 6월의 어느날 광서제는 강유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접견했다. 그러나, 강유위는 광동식 관화로 말을 하니, 광서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광서제는 강유위에게 그저 "총리아문장경상행주(總理衙門章京上行走)"라는 6품의 작은 관직을 내렸을 뿐이다. 이는 실제로 사장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관직이고 광서제가 그를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주"는 청나라때의 제도인데, 당해부서에서 고유관할업무가 없는 관리를 말한다.

 

나중에 강유위는 더욱 거짓말을 꾸며내서, 광서제가 그를 직접 접견하였다고 하여, 자신의 몸값을 높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광서제에게 직접 글을 올렸다고 허풍을 떨었는데, 실제로는 무술변법시기에 그가 올린 모든 글은 도찰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올린 것이었다.

 

단지 "군기사경"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강유위는 해외에 망명하였다. 그러자, 강유위에게는 스스로 과장하고 허풍떨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100일유신동안의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였고, 해외에서 모금하고 재산을 늘여갔다. 강유위는 나중에 해외에서 화교들과 유학생들에게 보황사업에 참가하도록 하는 "밀지"를 위조했다. 100일유신의 95일째 되던날, 국면이 험악해지자 ,광서제는 어쩔 수 없어 그의 심복신하인 "군기사경"중의 한 사람인 양예에게 밀지를 내린다:

 

밀지의 내용은 개략 다음과 같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짐의 자리를 보전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하물며 다른 것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짐이 그대에게 묻노니, "좋은 방책이 있는가" 그대는 옛법을 모두 바꿀 수 있고, 나이들고 우둔한 노신들을 모두 쫓아내며, 젊고 이치를 아는 사람들 등용하여 정사를 의논하여 중국을 위기에서 평안으로 전환시켜야 하고,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야 하고, 성의(서태후의 뜻)에는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대는 임욱, 유광제, 담사동 및 여러 동지들과 잘 협의하여, 비밀리에 글을 올리면서 군기대신으로 하여금 대신 올리도록 하라. 짐이 깊이 생각한 후에 다시 처리하겠다. 짐은 실로 조급하기 그지없다."

 

이는 분명히 "군기사경"에게 내린 임무이다. 양예, 임욱, 담사동, 유광제등 4사람이 주재하여 신속하게 타당한 방책을 연구해서 올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유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교활한 강유위는 양예가 그에게 보여준 밀지의 사본을 근거로 하여 "밀지"를 위조해버린다. 그리하여, 이 밀지를 기초로 광서제가 강유위 개인에게 내린 밀지인 것처럼 변조해버린 것이다.

 

"짐은 시국이 어려움을 헤아리니, 변법이 아니면 중국을 구할 수 없다. 수구의 늙은 대신들을 몰아내고 젊고 용감한 인사를 쓰지 않으면 변법할 수 없다. 그러나 태후는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다. 짐은 여러번 간했으나, 태후는 더욱 노하고 있다. 이제 짐의 위치는 거의 보전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대는 양예, 임욱, 담사동, 유광제 및 여러 동지들과 상의하여 비밀리에 글을 올려달라. 방법을 강구해서 나를 구해달라. 아주 조급하니 기대가 크다."

 

이 위조한 밀지는 두 곳이 관건이다. 첫째는 강유위는 광서제가 양예에게 준 밀지를 강유위에게 준 것으로 바꾸어버린 것이고, 둘째는 광서제 밀지의 원뜻은 방법을 강구해서 서태후에게 밉보이지 않으면서 변법을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는 것인데, 완전히 다르게 고쳐서 강유위등으로 하여금 방법을 강구해서 구해달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군기사경"은 이미 모두 죽였고, 더 이상 이에 대하여 대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강유위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던 동지인 왕조등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강유위는 그를 연금하기까지 하는데, 왕조는 일본인들에게 이 진상을 털어놓는다. 동시에 사료는 양예가 그의 아들에게 남겨주었던 밀지의 원본을 찾아내어, 둘을 상호 비교하게 된다.

 

아주 분명한 것은 1898년의 강유위는 비록 유신변법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백일유신"의 핵심인물에 오르지는 못했었다는 것이다.

 

강유위는 이외에도 "공자개제고"와 "신학위경고"를 썼는데, 이는 모두 장지동의 문하생인 요평의 <<지성편>>과 <<벽유편>>을 표절한 혐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