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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서상기(西廂記): 최앵앵의 은인은 장생이 아니라 두장군이다

by 중은우시 2008. 10. 20.

 

 

 

글: 후홍빈(侯虹斌)

 

<<서상기>>에는 몇몇 인물이 있는데, 이들은 스토리전개를 위하여 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손비호(孫飛虎)가 그렇고, 혜명(惠明)이 그렇고, 두확(杜確)이 그렇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손비호는 깡패장군이다. 다만 그가 강제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장생이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평범한 영웅이 미녀를 구한다는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악인이 도구로 쓰이고, 영웅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손비호는 바로 작가가 이렇게 뽑은 조역이다.

 

하나의 도구로서 손비호는 면목이 모호하다. 성격도 없고, 심리적인 묘사도 결핍되어 있다. 그는 할 일이 없다보니 그저 미녀를 빼앗으려고 할 뿐이다; 두확이 보낸 병사에 패한 이후, 상대방에게 용서받고, 그 이후에는 모두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또 하나의 조역은 "술마시고 싸우는" 혜명이다. 만일 평화시대라면, 이 중은 <<법화경>>을 읽지 않는 노지심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입만 열면 "오천명을 가지고 만두속을 만들겠다"고 떠든다. 이 자는 무예가 고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친히 나서서 죽인 일은 없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는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이 인물은 원래 작가가 괜히 집어넣은 것이다. 그를 쓴 것은 글에 긴장감과 이완감을 주어 리듬감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스토리를 전개하는데에는 별 역할이 없다. 왠일인지는 모르지만, 혜명은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상 이 인물을 없애버려도, 스토리전개에는 영향이 전혀 없다. 그의 작용은 손비호의 포위를 뚫고 나가서 편지를 두확에게 보내는 것이다. 극중에서는 그의 담량과 무예를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는 이 혜명에 관한 부분은 글재주는 뛰어나고, 기백도 웅장하지만 어느 정도 로댕조각의 그 손과 같은 느낌이다; 손을 너무 자세하고 아름답게 조각하다보니, 너무 많은 주의를 끌어, 결과적으로 전체 인물의 조화를 깨트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로댕은 조각에서 아주 아름다웠던 손을 잘라내 버렸다. 다만, 왕실보는 아름다운 글에 빠져서 스스로 벗어나지를 못했다. 혜명에 대한 여러가지 아름다운 글은 나로 하여금 최앵앵을 구하는데 있어서 장생의 역할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한다. 혜명은 영웅이고, 두확은 오천병마를 거느리고 친히 움직였다. 그들이 적을 물리친 공로가 어찌 적다 할 수 있을까? 왜 굳이 소식을 전한 자잘한 인물인 장생이 최앵앵을 처로 맞이하는가?

 

두확은 확실히 장생의 뒷배경이다.

 

희곡은 일종의 통속문학이어서 자주 관중의 심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희곡에서 통상적으로 정의를 주재하는 숨은 인물이 있다. 이런 주재자의 표현형식은 어떤 때에는 관부이고, 어떤 때에는 황제이며, 어떤 때에는 신령이다. 그들은 능력이 있고, 주인공을 도와 결정적인 승리를 얻게 해준다. 이 희곡에서는 바로 한 장군이 그 역할을 맡았다.

 

장생과 팔배지교를 맺은 두확은 장생과 같은 군의 동문이다. 무과에 장원을 했고, 관직이 정서대원수에 이른다. 그리고 10만대군을 거느린다. 중국역사상 무과제도는 확실히 당나라때 시작되었다. 무측천이 장안2년(702년)에 "천하에 조서를 내려 무예교육을 권장하고" 병부의 주재하에 매년 천하의 무사들을 모아서 한번 시험을 치고 시험합격자는 무관직위를 내렸다. 당나라때 무과는 기술과 용기를 중시했고, 전체 제도가 아직 완비되지 못했다. 그저 무과를 창설한 시기라고 할 것이다. 송나라때부터, 무과는 전체 과거체제내에 편입된다. <<당대무장원명록>>을 찾아보니, 거기에는 34명의 무과 장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두확은 확실히 허구의 인물이다.

 

당연히 희곡에서 이런 관직을 쓰는 것은 약간은 문자유희적인 성격이 있다. 10만대군을 거느리는 것은 이미 손안에 큰 병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어찌 나이가 어린 무과장원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는 두확신분의 첫번째 헛점이다. 두번째, 당나라때 무과는 그저 무예만 중시했지 문장은 묻지 않았다. 글을 읽은 두확이 회 무과시험을 쳤겠는가? 세번째, 실제로 무과에 합격하면 바로 무슨 큰 군관이 되지 않는다. 더더구나 10만을 거느릴 수는 없다. 문과 장원을 했다고 바로 재상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송신종 희녕9년의 무장원인 설혁은 겨우 봉상부 도감의 관직을 받았다. 당나라때 무장원들중 대명이 자자한 곽자의는 그가 수십년에 걸쳐서 목숨을 걸고 싸워서 공명을 얻은 것이지, 시험을 잘 쳐서 얻은 것은 아니다.

 

고증을 반드시 해야겠다면 나는 두확의 시를 보면 "화근본염공경자(花根本艶公卿子)"라는 문구가 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꽃이 아름다운 것은 뿌리에 있다는 것이고, 이는 그가 공경(고관대작)의 아들이므로 원래 고귀하다는 말이다. 이로써 볼 때, 두확이 그러한 지위에 오른 것은 집안배경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스토리전개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더 많은 뒷받침하는 내용은 없다.

 

당연히, 중국고전희곡은 고도로 사의화(寫意化), 정식화(程式化)하는 것을 중시했으므로, 우리는 그저 두확장군이 합리적이라고 인정하고 지나가자.

 

두확은 원래 정문아(丁文雅, 손비호의 직계상사)를 상대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실을 몰라서 감히 군대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혜명화상이 장생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장생은 두확으로 하여금 병사를 일으켜서 보구사를 구해주고, 천자의 은혜에 보답하며, 창생의 곤란을 구해달라고 한다; 최상국이 지하에서라도 딸을 구해준 은덕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두확은 원래 할 일이 없어서 사방으로 싸울 일을 찾고 있었다. 이때 그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장수가 바깥에 있을 때는 군왕의 명이라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밤에 병사를 일으켜 장생을 구해준다.

 

사실상, 나는 최앵앵을 구해준 사람은 장생이 아니라 두확이라고 생각한다. 장생에게 공로가 있기는 하지만, 공로가 더 큰 것은 두확이다. 장생의 반장짜리 종이가 어찌 두확의 5천병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두확의 조건은 장생보다 훨씬 뛰어났다. 만일 노부인이 권세나 이익을 쫓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약속한 바에 따라 딸을 적을 물리친 두확에게 시집보내야 한다. 그게 정리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인은 이런 생각이 없었다. 최앵앵의 변명도 아주 가소롭다. "만일 장해원(장생)이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 않았다면, 어찌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어떡할 것이냐 최앵앵 소저를 취하고 싶어하는 자도 장생이고, 모두 장생이 그 덕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확도 옛친구의 이 혼사를 이루어주고 싶어한다. 이번 공로에서 조역이 졸지에 주역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