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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적청(狄靑)의 영예와 비애

by 중은우시 2009. 8. 23.

글: 노조소랑(老鳥小狼)

 

적청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하다. 어려서 적청전전(狄靑全傳)을 읽었다. 한권은 오호정서(五虎征西)이고, 한권은 오호평남(五虎平南)이다. 오호(五虎)는 적청, 장충(張忠), 유경(劉慶), 이의(李義), 석옥(石玉)이다. 적청전전은 전설적인 색채가 짙다. 다만, 적청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이고,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거의 신과 악마가 싸우는 내용이다.

 

적청은 송(宋)나라의 군인중 가장 영예로운 사람이다. 무인들이 한번도 오르지 못했던 추밀사(樞密使, 국방장관격)를 지냈다. 그러나, 추밀사를 지낸 이후 문관집단의 박해를 받아, 우울하게 죽어갔다.

 

적청은 빈한한 집안 출신이다. 16세때는 형을 대신하여 벌을 받아 자자충군(刺字充軍)당한다. 오대에서 송나라까지 군인의 지위는 아주 낮았다. 일반적으로 얼굴에 글자를 새겨(刺字),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다. 후주황제 곽위는 하급병사에서 올라간 사람이고, 얼굴에 자자가 있다.

 

1038년 당항족 이원호가 서하국을 세우고 황제를 칭한다. 적청에게는 첫번째 기회가 왔다. 그는 변방을 지키는 하급군관이었다. 오래지 않아 서하가 쳐들어온다. 적청은 스스로 나서서 선봉장이 된다. 적청은 전투에 나갈 때는 일반적으로 산발을 하고, 머리에는 구리가면을 쓰고 나간다. 그리고 말 한마리를 타고 앞장서서 부닥치는대로 쓰러뜨린다. 서하군은 패퇴한다.

 

그 후에 범중엄에게 가르침을 받아, 적청은 글을 읽는다. 그리하여 진한이래의 각종 병법을 모두 익힌다. 그리고 적청은 작전에 아주 신중했고,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의 수하가 적을 추격하자고 할 때, 적청은 보통 적의 허실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다. 사실 서하국은 병법이 아주 교활했다. 송나라군대와 정면으로 부닥치지를 않았다. 북송의 장수들은 여러번 공을 탐하여 함부로 진격하다가 손해를 본 적이 많았다. 아마도 적청은 그의 신중함 때문에 패배하지 않았던 것같다.

 

적청은 25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고, 8번이나 화살에 상처를 입지만, 한번도 패전한 적이 없다. 적청을 사병을 이끌고 금탕성, 유주등지를 공격했고, 서하의 양초(糧草) 수만을 불태웠다. "그들의 장막 2천3백을 거두었고, 가축 5천7백을 얻었다" 그리고, 사병을 지휘하여 전략요지에 보루를 쌓아서 요충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계속 전공을 거두고 지위는 계속 상승한다. 몇년만에 계속 상승하여, 1052년 육월에는 추밀부사(국방부차관)에까지 오른다. 승진속도가 아주 빨랐다.

 

1052년 광서 장족 수령인 농지고는 교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송나라에 상을 달라고 하지만 얻지 못하자, 병사를 이끌고 모반을 일으킨다. 그리고 옹주(현재의 남녕)를 함락시킨다.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와 광주를 포위한다. 송나라의 남방부대는 이미 패배하여 형편없었다. 농지고라는 초적을 만나서 병력과 장수들을 잃었고, 대패하였다. 당시 추밀부사를 맡고 있던 적청은 스스로 난을 평정하겠다고 나선다.

 

적청은 서하에서 친히 훈련시킨 수백명의 소수민족기병을 이끌고 남하한다. 광서의 진서는 적청이 자신의 공로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적청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농지고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곤륜관에서 궤멸당한다. 적청이 도착한 후, 진서등 30여명을 패망죄로 참수한다. 여러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여 감히 적청을 바라보지 못했다.

 

적청은 한신의 "명수잔도, 암도진창"의 계책을 참고하여, 병력이 움직이기 전에 각지에서 대량의 양초를 조달한다. 농지고는 송나라군대가 즉시 진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계를 약간 늦춘다. 적청은 적군이 대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진공하여 밤에 곤륜관을 기습하여 점거하고,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다.

 

곤륜관은 옹주의 동북에 있고, 옹주를 드나드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지이다. 역대이래로 병가의 필쟁지지이다. 농지고는 지리를 잃었다. 할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출전한다. 송나라군대는 처음에는 불리했다. 선봉장이 전투에서 사망한다. 적군의 사기가 졸지에 올라갔다. 여러 장수들은 놀라서 얼굴색이 바뀐다. 적청은 그가 데려온 정에소수민족기병을 데리고 좌우양익으로 나눈 다음에 길을 돌아 후미로 갔다. 농지고의 초적이 어찌 늑대같고 호랑이같은 정예기병을 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청은 50리를 추격하고, 큰 승리를 거둔다.

 

군대를 이끌고 개선한 후 적청은 추밀사로 임명된다. 최고군사장관이 된 것이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영예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적청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송나라는 송태주부터 무장들에 대한 방비를 엄밀하게 하였다. 중문경무(重文輕武)의 정책을 쓴 것이다. 이런 정치환경하에서, 적청의 관직이 올라감에 따라 조정에서는 그를 시기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적청이 추밀사가 되자, 이런 시기와 불안은 최고조에 달한다. 전체 문관집단에서 원래 적청을 자주 칭송하던 방적(龐籍)마저도 적청을 임명하는데 반대한다.

 

이것이 혹시 적청이 공을 세운 후 오만하거나, 다른 마음을 품어서 말들이 많았기 때문인가? 전혀 반대이다. 적청은 시종 조정에 충성심을 나타냈고, 그의 품행이나 전공도 당시 조야에서 널리 칭송되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조정은 더욱 마음을 놓지 못했다. 만일 적청의 공로가 그다지 높지 않았거나, 인품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면, 조정은 아마도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통치자는 모두 수하가 일하는데 약간의 약점이 있어야 통제하기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청은 재물을 탐하거나 여색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약점이 없는 사람에 대하여 통치자가 어찌 안심할 것인가? 자고이래로 황제는 탐관은 겁내지 않았다. 탐관은 안목이 좁고, 황권에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탐관이 돈을 모으더라도, 나중에 가산을 몰수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엄숭 화신과 같은 류가 오랫동안 나쁜 짓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인이다. 황제도 그들이 재물을 탐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신경쓰지 않는다. 황제는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을 신경쓸 뿐이다.

 

거의 완전무결하고 능력이 뛰어난 적청이 손안에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손쉽게 문인들은 송태조 조광조를 연상한다. 이런 시기와 의심이 극도에 달하자, 온갖 유언비어가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적청의 집에 있는 개의 머리가 정방형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적청의 집에서 밤이면 빛이 난다고도 한다. 심지어 경사에 홍수가 나서 적청의 집안이 상국사로 피신을 갔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황위를빼앗으려고 준비한다고 하였다. 가우원년(1056년) 팔월, 4년간 추밀사로 있던 적청은 마침내 파직당한다. 그리고 진주지주로 되어 경사를 떠난다. 왜 조정은 이처럼 서둘러 적청을 쫓아냈을까? 문언박이 적절하게 말했다: 조정이 의심했기 때문이다.

 

적청이 진주(陳州)로 간 후에도 조정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반달마다 사신을 보냈다. 겉으로는 위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감시이다. 이때의 적청은 이미 유언비어때문에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다. 매번 사신이 올때마다 하루종일 두려움에 떨었다. 반년도 되지 않아 적청은 우울증이 도져서 병사한다. 나이 겨우 49세때의 일이다. 일찌기 전쟁터를 누비며, 피를 뒤집어쓰면서 싸우고, 송나라를 위하여 한마공로를 세운 일대명장이 칼날이나 화살에 쓰러져, 피를 전쟁터에 뿌리고, 시신을 가죽으로 싸서 말에 태워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시기와 배척을 견디다 못해서 죽은 것이다. 적청은 생전에 조정에서 눈에가시처럼 여겼다. 그는 억울하게 죽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대우와 존경은 받았다. 황제는 애도를 표하고 중서령의 관직을 추증했으며 시호를 무양(武襄)으로 하였다.

 

적청의 비애는 먼저 북송이 중문경무의 국책을 썼기 때문이고, 둘째는 추밀사를 맡은 후에 모든 사람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적청의 비애는 송나라의 모든 무장의 비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