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지군(張志君)
전설은 아주 아름답다. 예를 들면 양문여장의 모든 것은 천백년이래로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우리는 그 역사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는 왕왕 우리를 가지고 논다. 왕왕 우리가 굳게 믿어 의심치 않던 "사실"이 사실은 수백년동안 계속하여 윤색된 아름다운 하나의 전설이고, 진실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문여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운 "거짓역사"인 것이다.
유럽연합군을 이끌고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몽고메리 원수가 1960년대초에 중국을 방문했다.
외부행사를 하는 사이에, 그는 중국에서 그에게 보여준 경극 <<양문여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통역을 통하여, 몽고메리 원수가 제기한 의문은, 여자가 원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중국측 업무인원은 나이가 젊고 혈기방장하며, 그는 양문여장의 이야기에 대하여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바로 답변을 했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당신 나라도 여왕이 삼군총사령관이 아닌가?" 나중에 그 업무인원은 심하게 질책을 받았다.
확실히 외교예절에 어긋나는 잘못을 범했을 뿐아니라, 그 업무인원은 수천수만의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양문여장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었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람들의 전통적인 이미지 속에서의 양가장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제1대는 금도령공 양계업(楊繼業, 즉, 楊業). 양업은 8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중 여섯째아들의 이름이 양연소(楊延昭), 즉 양육랑(楊六郞)이다. 양육량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양문광(楊文廣)이고 양문광의 아들이 양종보(楊宗保)이며, 양종보의 딸이 양회옥(楊懷玉)이다. 이런 계보가 믿을만한가?
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양계업은 역사상 존재한다. 그러나 민간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은 반인미(潘仁美)와의 은원은 대부분이 허위이다.
양업과 반미(潘美, 소설상의 반인미)는 원수지간이 아니다. 육가곡 입구에서 양업을 진군하도록 핍박하고, 나중에 호응부대를 철수시킨 사람은 왕신(王侁)이지, 반미가 아니다. <<송사. 왕신전>>에 따르면, 왕신은 자가 비권(秘權)이고, 개봉 능의 사람이다. 부친은 왕박(王朴)으로, 일찌기 후주의 추밀사를 지냈다. 변방에 대한 대책을 올려서 이름을 날렸다. 왕신은 명문의 후예이고, 본인도 전공이 있었지만, 사람됨이 강퍅하여, 말로써 양업을 자극하여 양업이 힘들게 싸우고 어려움에 빠졌다. 왕신은 죄를 받아 제명당하고 금주에 유배된다"
소설가의 붓끝에서 아주 나쁜 놈으로 그려진 반인미(반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그는 진가곡구에서 양업을 함정에 빠지게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통속소설이나 티비드라마에서 그린 것처럼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양칠랑을 죽여버리지도 않았다. 그가 이번 전투에서 무슨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왕신의 말을 오신하였다는 것뿐이다.
이뿐이다. 그래서 송태종 조광의는 참전인원의 사후처리시에 반미는 3등급 강등시켜 계속 일을 하게 하고, 주요한 책임이 있는 감군 왕신은 "제명시켜 금주에 유배된다" 유문유는 "제명되고 등주에 유배된다"
2. 양업은 모두 7명의 아들이 있었다. 8명이 아니다.
소설 <<양가장>>과 드라마 <<양가장>>에는 양업에게 모두 8명의 아들이 있다. <<송사>>에 따르면, 양업은 모두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양연랑, 양연포, 양연훈, 양연환, 양연귀, 양연빈, 양연옥이었다.
그중에 양연옥은 부친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고, 진가곡구에의 전투에서 순직한다. 나머지 6명의 아들은 양연랑이 숭의부사가 되고, 양연포, 양연훈은 모두 공봉관이 되며, 양연환, 양연귀, 양연빈은 모두 전직(殿直)이 된다. 이 7명의 아들중 양연옥이 전사한 외에 나머지는 모두 선종(善終)했다. 이웃나라로 유랑하거나, 간신의 손에 죽은 사람은 없다.
3. 양육량은 양대랑(楊大郞)이다. 양종보는 양문광(楊文廣)이다.
"양가장"의 전기에서 양씨집안의 남자주인공인 노영공 양계업이외에 가장 유명한 것이 양육랑과 양종보 부자 두 사람이다. 이 두사람도 역사에 본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양육랑이라는 자는 아마도 양대랑일 것이다. 즉, 양업의 큰아들인 양연랑(나중에 양연소로 개명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양업의 여섯째아들이 아니라, 큰아들이다.
그는 북송 진종 대중상부7년(1014년)에 사망한다. <<송사>>에서는 "지용을 겸비하고 전투를 잘했다. 하사받은 것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집안 일에 대하여 물어본 적이 없으며, 명령이 분명했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적을 만나면 먼저 뛰어나갔고, 적을 물리친 공은 아랫사람에게 돌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일하고 싶어했다. 변방에서 20여년을 지냈는데 거란족들이 그를 꺼려했다."
양종보는 양문광일 것이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양문광은 양연소의 아들이다. 자가 중용(仲容)이고, 장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전직의 관직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북송의 유명한 범중엄이 섬서선무사로 있을 때 그를 기이하다고 말했고, 그를 부하로 삼았다. 나중에 적청을 따라 남정하고, 나중에 관직이 정주부도총관, 천보군도우후에 이른다.
"양가장"은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허위이다. 그래서 뭐가 진실이고 뭐가 가짜인지 어지럽다. 그렇다면, "양문여장"은 어떻게 된 것인가?
유감스러운 점은 소설과 드라마에서 그 유명한 "양문여장"에 대하여 정사에는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송사.양업전>>에는 양업과 그의 아들 양연소등 7인에 대하여는 기록하고, 손자 양문광 1인이 기록되어 있지만, 여자들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만일 양문여장이 정말로 존재했더라면, "의부절부(義婦節婦)"의 이야기로 <<열녀전>>에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송사. 열녀전>>을 뒤져보다도, 거기에 수록된 40명의 '기여자'에는 양씨집안 사람이 없다.
"양문여장"은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이다. 문학을 역사로 오인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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