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녹순자(鹿順子)
1915년 12월 11일 원세개는 북경에서 황제를 참칭했다. 이를 전후하여 발생한 몇 가지 사건들을 언급하자면...
첫째, 원세개의 장남인 원극정(袁克定)은 부친이 황제에 오르면 자신이 태자가 될 것이라고 깊이 믿었다. 그리하여 부친으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북경에서 중문신문을 하나 발간했는데, 이름이 <<순천시보>>였다. 이는 일본정부의 중국내에서의 입장을 대변했다. 원세개는 시간이 있을 때면 <<순천시보>>를 뒤적여 보면서 일본정부의 입장을 파악했다. 원극정은 부친이 황제에 오르도록 결심하게 만들기 위하여,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글쟁이들을 끌어모아 가짜 <<순천시보>>를 만들어서 원세개에게 올린 것이다. 동시에 진짜 <<순천시보>>가 원씨집안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엄히 단속했다. 원극정은 이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부친 원세개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원세개의 셋째딸 원정설(袁靜雪)이 흑피오향소잠두를 좋아해서, 시녀를 시켜 사오게 하였는데, 마침 그 시녀가 이를 <<순천시보>>로 싸서 가져왔다. 원정설이 신문내용을 보니 달라서 의심이 들었고, 원세개에게 보고했다. 원세개는 사실을 조사한 후 진상을 알아내곤 원극정을 불러서 한바탕 혼을 내주었다.
둘째, 어떤 사람이 원세개에게 "장태염(章太炎)의 문장이 천하에 이름있으니, 그를 불러서 조서를 쓰게 하면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세개도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 장태염에게 사람을 시켜 부탁했다. 장태염은 바로 응락한 후, 서신을 써서 원세개에게 보냈다. 원세개가 뜯어보니 그 안의 내용은 개략 이러했다:
"너의 민국원년 4월 8일의 선서내용은 아직도 내 귀에 선명하다. 이제 돌연 야심이 일어나 황제가 되고자 한다. 너는 민국의 반도일 뿐아니라, 청나라황실의 죄인이다. 나는 네가 경성에 가두어두어서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니, 이 서신을 본 후에 깨끗이 나를 죽여달라. 너의 손에 죽는다면, 이전에 청나라관리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다"
원세개는 서신을 본 후에 대노하여, 죽일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대사를 그르칠까 우려하였다. 장태염을 죽였다가는 천하의 선비들이 자신에 등지게 될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모른척 하고 지나갔다.
셋째, 엄수(嚴修)는 원래 원세개의 가정교사였다.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서 원세개가 존경했다. 원세개가 황제가 되려한다는 말을 듣자, 천진에서 북경으로 와서, 원세개를 설득하고자 했다:
"역대제왕으로 가천하(家天下)를 도모한 사람들은 모두 끝이 좋지 않았다. 하물며 민국으로 개조된지 이미 4년이 지났다. 만일 대총통께서 일찌감치 황제가 되고자 하였다면 당초에 한구를 격파하고 무창에서 난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제1차로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계축의 전투때 손문, 황흥을 쫓아내고, 장강을 안정시키고, 사방의 추대를 받아 황제위에 올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제2차로 기회를 잃은 것이다. 이제 4년이 지났고, 청나라황실에서 민국으로 이양되는 조건이 이미 정해졌으며, 정부는 공화제를 이미 밝혔는데, 지금 다시 황제제도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천하사람들을 설득하겠는가? 황제에 오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매일 문신무장의 기치를 내걸고 대총통을 기만하는 것이다. 외부의 진정한 여론을 대총통께서 아는가? 나는 문신무장들이 걱정스럽고, 대총통이 걱정스럽고, 원씨집안이 걱정스럽다. 장래에 내가 말한 것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원컨대 대총통께서는 세번 생각한 후에 행동해달라.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와 원씨집안의 복이다."
원세개는 엄수의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나중에 원극정이 이 말을 듣고는 아주 화를 냈다: "어디서 굴러온 늙인이가 감히 나의 태자자리를 뒤흔들려고 하는가?" 엄수는 원극정이 사람을 보내어 보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천진으로 되돌아갔고, 다시는 북경으로 오지 않았다.
넷째, 당시 북경에는 두 개의 외국인이 발간하는 신문이 있었다. 모두 원세개의 황제등극계획에 반대했고, 자주 글을 써서 공격했다. 원세개는 심복을 보내어 이 두 신문과 협의했고, 이 두 신문사에 각각 금1만을 보내주면서, 논조를 바꾸어달라고 부탁했다. 두 신문사는 모두 응락했다. 과연 더 이상 원세개를 반대한다는 내용이 올라오지 않았다. 원세개는 아주 기뻤다. 그런데, 10일후, 두 신문사는 다시 원세개를 욕하기 시작했다. 원세개는 사람을 보내어 따졌다. 신문사 편집장은 "우리 신문은 원래 황제제도에 대한 기사를 싣고 나서는 신문이 잘 팔렸다. 그런데, 황제제도에 관한 기사를 빼버리니 매일 손실이 금1천씩이었다. 만금이라고 해야 겨우 10일치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매일 우리에게 천금씩을 준다면 우리는 신문의 명예를 희생하고서라도 총통의 뜻을 받들 수 있겠다" 원세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섯째, 단기서와 풍국장이 원세개의 집으로 새해인사를 하러 갔다. 원세개는 선물등을 잘 준비했다. 두 사람은 원극정에게도 새해인사를 했다. 원세개는 그저 자리에 앉아서 손만 흔들어서 인사를 대신했을 뿐이었다. 단기서와 풍국장은 원극정의 방을 나온 후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여섯째, 양계초의 사상은 군주입헌에서 공화제로 바뀌어 갔다. 1915년 8월, 양계초는 <<이재소위국체문제자>>라는 글에서 원씨의 황제등극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일곱째, 여원홍은 원세개의 복벽에 대하여 저지하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15년 12월, 원세개는 중화제국 황제의 명의로 첫번째 작위령을 내렸다. 여원홍을 무의친왕(최고의 작위임)에 봉했으나, 여원홍은 거절했고, 봉호를 받지 않았으며, 왕의 의복도 받지 않았고, 원세개의 친필편액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두문불출했다.
여덟째, 원세개의 가장 가까운 전우인 서세창은 원세개의 칭제에 대하여 보류적인 입장이었다. "나는 저지하지 않는다. 찬성하지도 않는다. 여러분들은 하고 싶은대로 해라"
아홉째, 원세개는 매일 아침 북해경도의 백탑으로 갔다. 거기서 하늘에 그의 황제등극이 성공하도록 빌었다. 원극정은 유리창의 장인들을 시켜 석비를 하나 만들게 한 후에, 길가에 묻어두었다가, 원세개를 속였다.
열째,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집안에서 먼저 문제가 발생하였다. 몇몇 첩들은 "비빈"의 명분을 가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장남 원극정은 동생들이 그의 "태자"지위를 빼앗을 까봐 겁냈다. 원세개는 골치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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