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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후기의 해양정책

by 중은우시 2009. 3. 3.

글: 유앙(劉仰)

 

포르투갈인들이 중국해안선에 출현함으로서 조성된 첫번째의 사상유례없는 영향은 바로 중국정부가 해외상인등의 행동범위를 제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중국으로 오기 전에, 중국정부는 기본적으로 해외상인들에 대하여 엄격한 관리감독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당나라때의 장안이건, 원나라때의 대도이건, 외국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비교적 넓었다. 당연히, 그 때의 외국상인은 대부분 아시아인들이었고, 유럽인들은 아주 적었다. 역사가 1500년이후로 흘러가면서, 포르투갈인들을 대표로 하는 유럽인들이 중국에 왔다. 그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평화를 주장하지도 않으며, 무력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명나라정부는 할 수 없이 그들을 마카오라는 작은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제한했다. 일찌기 어떤 사람이 포르투갈인들의 교력장소를 바꾸자고 건의한 적이 있다. 명나라관리는 최종적으로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마카오의 생활필수품은 명나라의 현지지방정부가 공급하므로, 관리하기가 쉬웠다는 것이다. 명나라정부는 포르투갈인들의 행동범위를 제한하는 동시에, 무역행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제한했다. 원래 무역대상을 따지지 않고 단지 세금만 거두던 시박사(市舶司)는 점점 외국인을 겨냥한 무역기구로 변해갔다. 이 두가지 변화는 청나라이후까지 계속되었다. 청나라정부는 국가에서 전문적으로 외국인과 무역을 하는 십삼행(十三行)을 두는데, 시박사가 발전하여 나타난 것이다.

 

역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유럽인들의 중국에서의 행동과 무역에 대하여 제한한 것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겠다. 그 나쁜 점 중 하나는 바로 서양인들이 말하는 쇄국정책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서양인들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완전히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를 조성한 것은 서양인들의 오만과 무법행위와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근 100년간의 마찰을 거쳐, 포르투갈인들은 점점 중국과 양호한 관계를 건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 출현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독일등의 상인들은 거의 모조리 포르투갈인들의 최초의 행동방식을 반복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사람들은 필리핀을 점령한 후, 한번은 무력진압을 하면서 한꺼번에 수만명의 현지 중국인을 살해했다. 서방인들의 야만적인 행동은 중국정부로 하여그 외국인에 대한 관리감독을 완화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외에 1500년이후, 명나라는 비록 정화의 "항공모함"은 없었지만, 해양작전에서, 명나라군대는 나무범선시대의 서양인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서양인들의 무장선단을 무찔렀다는 사례는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양인들의 강점은 해상이 아니라 육지에서 발휘되었다. 이는 명나라정부가 갖은 방법을 써서 서양인들이 육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포르투갈인 및 이후에 아무런 제약없이 온 서양인들이 중국해안선에 출현하면서 조성된 두번재 거대한 변화는 바로 무역환경이 파괴되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처음에 비지니스를 하는데, 정부의 관할을 전혀 받지 않았다. 많은 경우 보통중국인들과 무역을 했다. 그들은 혹은 강매하고 혹은 사기를 쳤다. 그러다보니 물가가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원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국인들은 더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무역에 종사할 수 없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잃었다. 1500년이후, 중국해안선에는 해적이 날로 창궐하는데, 이것도 서양인들이 파괴한 정상적인 무역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르투갈인들이 무역환경을 교란시켰으므로, 원래 해양무역에 의존하여 살아가던 중국인들이 곤경에 처한다. 포르투갈인들의 무역환경에 대한 파괴는 나중에 출현한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하나 모두 자신이 무역을 독점하고자 했다. 명나라정부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서양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부득이 관리감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엠바고(무역금지), 중국주민들이 서양인들과 무역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하다보니, 명나라정부의 통제는 연해지역의 일부 중국주민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끼쳤다. 명나라의 전반기에 민간의 해양무역을 용인하였었는데, 점점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연해지구의 일부 중국주민은 부득이 규칙이 없는 무역활동에 종사하고, 폭력으로 스스로를 지키게 된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의 무역금지정책과 충돌이 발생한다.

 

포르투갈인들의 출현으로 아시아의 해양에서 천여년이상 형성된 정상적인 무역규칙과 관계는 철저히 무너진다. 서양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 중국정부가 관할하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무역활동에서 공정성이라는 것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중국해안에서 해적활동이 날로 극성을 부린다. 명나라 가정시기에는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명나라후반기의 해양정책은 이로 인하여 아주 명확해진다: 서양인을 통제하고, 해적을 진압한다. 이러한 정책하에, 명나라정부는 약간의 신축성도 발휘한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인들의 비니지스독점욕을 이용하여, 포르투갈인의 역량을 빌어 해적을 소탕하는 것이다. 혹은 포르투갈인들의 역량을 빌어 다른 서양인들에 타격을 가한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인들은 성공적으로 네덜란드인들이 중국대륙에 침입하려는 기도를 막아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인들은 할 수 없이 대만섬으로 퇴각하고, 일본과의 무역에서도 조심하게 된다. 이외에 명나라정부는 해적을 거두어 재편하여 자신의 역량을 키우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명나라후기의 이러한 해양정책의 전정한 목적은 바로, 해양무역의 정상환경, 정상질서를 회복하고 유효한 해양무역규칙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세계에는 아직 현대적인 세관제도가 없었다. 유럽각국간의 해양무역에도 통일된 규칙이 없었다. 명나라정부는 확실히 이를 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나라정부가 해적을 기본적으로 소탕한 후에는 무역금지를 풀어주게 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명나라정부의 후기 해양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첫째, 서양인들의 무법행위가 줄어들었다. 둘째, 서양인들이 조심하면서 중국상인들의 생존공간이 확보되었다. 그리하여 명나라가 해적을 진압하려던 기본적인 목적은 달성하였다. 그러니, 무역금지를 풀어주는 것도 당연하다. 셋째, 해적을 재편하여, 자신의 힘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공동으로 바다를 경영한다. 명나라후기, 조정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해적은 정지룡이다. 정지룡이 명나라에 귀순한 후, 서양인들은 중국해안선에서 기본적으로 함부로 일을 벌이지 못하게 된다. 모두 정지룡의 명에 따르게 된 것이다.

 

명나라의 해양정책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일본이다. 서방인들이 중국해안선에 도착할 때쯤, 거의 동시에 일본에도 도착한다. 일본은 처음에는 서방인들을 엄격하게 막지 않았다. 일본막부는 금방 알아차린다. 서양상인드로가 전도사는 현지정권에 엄중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일본은 서방인들에게 명나라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채택한다. 철저한 쇄국정책을 쓰고, 서양인들을 축출시켰던 것이다. 오로지 중국과의 무역만 허용했고, 그 외에 소량의 네덜란드선박만 받아들였다. 현대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160여년동안 쇄국정책을 쓰면서, 일본정부의 생존을 보장받았다. 그리하여 이는 나중에 일본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리하여 일본은 다른 아시아국가와는 달리 서방인들의 파괴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날 보기에, 일본인들이 이렇게 한 것은 당시의 실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고, 서양인들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명나라정부는 서양인들을 성공적으로 통제했으므로, 서양인들이 무력으로 일본의 대문을 열기 힘들게 되었던 것이다.

 

명나라의 멸망은 이 글에서 논의하려는 주제가 아니다. 다만, 명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명나라후기 해양정책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북경을 빼앗긴 후, 명나라황족후예는 남방으로 도망쳐온다. 그들이 빌리려던 역량은 주로 정지룡의 해양세력이었다. 왜냐하면 막 산해관을 넘은 만주족과 반란을 일으킨 농민군은 해상작전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지룡은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청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명나라의 최종운명을 결정한다. 정지룡의 아들인 정성공은 부친을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 분열된 정씨가문의 세력은 명나라를 지키는데 부족했다. 다만, 바로 이렇게 분열된 정씨가문의 세력으로 정성공의 지휘하에 네덜란드인을 무찌르고, 대만을 수복한다. 이는 명나라후기 해양정책이 성공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보자. 주원장의 해금령은 중국의 일관된 쇄국정책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결론이다. 주원장이 반포한 해금령이후 100여년만에 유럽인들이 비로소 중국에 도착한다. 주원장의 해금령이 서양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거의 무지의 우스개에 불과하다. 우리가 주원장이 100년을 넘는 예지능력을 지녔다고 보아야 한단 말인가? 주원장이 그처럼 위대한 예언가였던가? 중국은 일찌기 개방된 대국이었고, 계속하여 개방된 대국이었다. 폐쇄정책이라는 말은 서양인들이 억지로 중국에 갖다붙인 것이다. 원인은 그저 중국인들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방문명이 중국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서방의 뜻에 따라 개방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낙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불합리하다. 그것은 서방이 유럽을 벗어난 후 전세계에서 무법행위를 저지른 것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현실을 고려한 주장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1500년을 기준으로 둘로 나눈다면,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더욱 명확히 보는데 도움이 된다. 1500년전에 명나라전기에 정화하서양을 대표로 하는 항해의 장거를 이루었다. 이는 구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의 다음 시대의 웅심을 나타낸다. 비록 이러한 웅심이 당시의 역사조건하에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당시에는 이러한 웅심이 그저 무의식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설사, 오늘날 보더라도 이러한 웅심에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명나라 후반기에 해양정책은 서양인들의 도래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세계를 둘러보면, 유럽인들의 해양확장에, 적시에 해양정책을 조정하고, 성공적으로 대응한 국가는 중국뿐이다.

 

대항해시대이후, 서방인들이 도착한 곳은 기본적으로 모두 성공적인 군사적 점령과 현지인들의 노예화를 이루어 냈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서방인들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곳이라면 아프리카이든, 아메리카이든 아시아이든, 서방인들은 큰 돈을 벌어갔다. 오로지 성공적으로 서방인들의 야만을 막아낸 곳은 그리고 서방인들과 무역을 거절한 곳은 중국뿐이다. 서방인들은 큰 돈을 벌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전체적으로 중국인들이 서방인들로부터 큰 돈을 벌었다. 약 200년동안. 이것이 바로 명나라후기의 해양정책이 성공한 증거가 아닌가? 서방인들은 명나라후기의 해양무역정책에 대하여, 오랫동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해양무역정책에 대하여 원한이 깊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만일 그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욾는다면, 그것은 정말 너무나 멍청한 짓이다. 그러므로, 명나라 후반기의 해양정책은 성공적이었고, 그것은 대국의 존엄을 지켜주었고, 중국의 해양을 지켜주었다고 하여야 한다. 현재의 중국인들은 아직도 그 덕을 보고 있다.

 

중국은 청나라후기부터 쇠락하고 비참한 지경에 처한다. 이는 쇄국정책때문이 아니다. 유럽이 18세기이후에 산업혁명을 하면서, 중국이 경쟁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중국의 쇠락은 농업사회의 공업사회에 대한 상대적 쇠락이다. 하나의 역사적인 중대 전환기에 기회를 제대로 붙잡지 못한 것이다. 절대 중국인들의 수천년의 일관된 과오가 축적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머나먼 지구의 저편에서 발생한 공업혁명을 당시 중국인들은 너무나 몰랐다는 점이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쥐고, 역사적인 기회를 붙잡고자 한다. 다만, 인류에게 부와 동시에 거대한 재난을 함께 가져다준 산업혁명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