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곽상학(郭翔鶴)
역사적인 원인으로 수십년이래로 중국의 역사학계에는 하나의 현상이 존재했다: 폄명양청(貶明揚淸, 명나라를 깍아내리고 청나라를 치켜세우다). 명나라는 군주가 멍청하고 신하가 탐욕스러우며, 사회는 어두웠고, 문화와 과학기술은 타락한 시대로 그려졌다. 청나라는 강건성세(康乾盛世,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는 태평성대)를 계속 언급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청나라가 통치말기까지도 명나라의 사회문화, 경제성취를 따라가지 못했던 사실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무지한 학생과 민중들에게 왜곡된 역사내용을 주입시켜왔다.
역사의 진상은 어떠했는가? 필자가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명나라가 이들 역사학자들이 묘사한 것처럼 암흑시대가 아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권력분립체제를 갖추고, 군권이 강력하게 제약을 받고, 선비들이 국가의 운명을 장악했던 국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방대한 시민계층을 보유하고, 해외무역에서는 전세계를 선도하였으며, 과학기술문화도 급속히 발전하였고, 도시주민의 수량도 신속히 확장되고 생활이 행복했던 사회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동서양을 오가던 외국인은 이미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본 명나라 사회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의 중국사회를 진실되게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1585년 멘도사의 <<중화대제국사>>가 출판된다. 그리고 16세기말을 전후하여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및 네덜란드어등 7종류의 문자로 번역되어 모두 46판이 발행된다. 이 책은 16세기 중국의 자연환경, 역사, 문화풍속, 예의, 종교신앙 및 정치, 경제등 가장 전면적이고 가장 상세한 저술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들은 첫째로 아주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집안 뿐아니라,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통상적으로 거리에 서너곳의 공공 휴게소를 마련해두는데, 배치가 아주 잘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무에 바쁜 사람들은 거리에서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고, 그곳에서 공급을 받을 수 있다. 유사한 방식이 전국의 모든 도로에서 통한다. 어던 도시의 거리는 배가 다닐 수 있는데, 마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같다."
"그들은 중국의 다른 성에서는 특이하고 뛰어난 대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아마도 선장 아트리에다가 본 그런 것일 것이다. 그는 국왕 필리페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에게 이 국가의 비밀을 보고했다. 그 안에는 중국인들은 우리와 같이 각종 무기를 사용하고, 그들의 포는 아주 좋다고 하였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는 배 위에 설치된 각종 포를 보았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잘 만들었고 더욱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투를 위하여 크고 견실한 배를 만드는데, 높은 선루(船樓)가 있다. 각각 뱃머리와 뱃꼬리에 둔다. 마치 레판트에서 온 배, 포르투갈인들이 동인도로 몰고온 배와 닮았다. 그들의 배는 아주 많다. 한 장교는 4일만에600여명의 군대를 모집할 수 있다...그들은 다른 종류의 배가 더 많고, 어떤 것은 그림을 그리고 금칠을 한 복도와 창문이 있다."
1613년 예수회 선교사 증덕소(曾德昭)는 중국 남경에 도착했고, 1636년에 유럽으로 되돌아간다. 귀국하는 도중에 <<대중국지>>라는 책을 완성한다. 그는 중국에서 22년여를 머물렀는데, 마침 파란만장한 명나라말기였다. 그가 기록한 명나라말기의 사회와 이후 청나라조정의 어용문인들이 묘사한 "황제는 멍청하고 무능하며, 정치는 어둡고 부패하고, 인민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때는 경제가 번성하고 문화가 창성하며, 거대한 활력이 넘치는 나라였다:
"그들의 주택은 설계가 잘 되어 있어서 살기 편하다. 깨끗하면서 편안하다"
"남방 9개성의 마지막 성은 남경이다...중국에서 가장 좋은 성의 하나이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서부지역은 가장 부유하고, 면사가 많이 난다. 상주성(Chincheo) 및 부근의 광대한 지역에만 20만대의 직포기가 있다. 직포기는 작아서 한 방안에 여러대를 둘 수 있다. 거의 모든 부녀들이 이 일을 한다."
"중국인은 천성적으로 장사를 좋아한다.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 가서 매매해서 큰 돈을 벌 뿐아니라, 같은 도시내에서도 장사를 한다. 상점안의 물건은 거리에서도 거의 팔고 있다..부유한 상인은 신용이 양호하고 시간을 잘 지킨다"
명나라때 건립한 선진적인 권력견제체제도 유럽인들의 찬탄을 불러왔다. 아래에는 <<마테오리치중국여행기>>에서 명나라 정치체제에 대한 기술이다. 이 책의 제1권 제6장 <<중국의 정부기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 황상도 이번에 공개조사한 조사관이 한 결정을 바꾸지 못하는 것을 친히 보았다."
"내가 본 것은 판결을 받은 자의 명단을 단행본으로 만들어 전국에 발행한 것이었다"
"비록 우리는 이미 중국의 정부형식이 군주제라고 말했지만, 앞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해 졌겠지만, 아래에서는 더욱 명확히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일정한 정도에서는 귀족정체이다. 만일 대신과 협의하고 그들의 의견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면, 황제본인은 국가대사에 대하여 최종결정을 할 수가 없다. 모든 문건은 반드시 대신이 살펴본 후에 황제에 올린다."
"나는 이미 철저한 조사연구를 했다. 아래의 상황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어떤 대신이 요청하지 않으면, 황제는 어떤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거나, 권한을 확대시킬 수 없다. 당연히 황제는 그의 가족과 관련된 사람에게 하사품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다만 이 하사품은 국가공금으로 해서는 안되고 황제가 내리는 하사품은 공금에서 꺼낼 수 없다."
"그들(명나라때 도찰원에 소속된 십삼도감찰어사)은 어떤 측면에서 우리가 말하는 공중양심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최고의 관리이거나, 황제본인이나 황족에 관련되더라도, 그들은 직언을 한다. 그들이 이처럼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외국인들이 보기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본받아야할 모범이다. 황상이건 대신이건 모두 그들의 용감함과 직언을 피해갈 수가 없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들이 황제를 화나게 하여 황상이 그들에게 진노하는 경우까지 있다.그들은 계속하여 진언하고 비판한다. 그들이 맹렬하게 비판하는 악행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는.."
"사실상, 아주 억울한 경우에는 그들의 공소는 아주 날카롭다. 비록 황상과 조정에 관련되더라도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다. 황제에게 올라오는 모든 문건과 그들에게 내리는 답신은 여러부가 복사된다. 이렇게 하여 조정에서 발생한 사실이 신속히 전국의 곳곳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런 문건은 책으로 만들어지고, 만일 그 내용이 후세에 남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본조의 편년사에 기록된다."
"몇년전, 현재 황상이 그의 첫째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은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 어린아들은 그와 황후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법에 어긋났다. 황상은 그를 질책하는 많은 상소문을 받았다. 결국 황상은 거대한 여론의 압력하에, 대신들이 집단사직하겠다는 위협적인 조건하에서, 할 수 없이 태자를 정하는 일에서 양보하고 만다."
갑신국난은 화하문명이 세계문명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이다. 서양인의 붓아래 열정적이고 개방적이며,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교양에 넘치던 명나라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호연지기를 가슴에 품고, 기세당당하던 화하, 일찌기 사방의 오랑캐에게서 예의의 나라로 칭송받고, 신의의 나라로 칭송받던 화하, 일찌기 휘황하게 세계민족을 이천여년이나 선도하던 화하는 이제 그저 고대그리스, 고대로마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강물 속에 흘러가버렸다. 오늘날의 화하후예는 심각하게 오랑캐화한 사회에서, 이미 고대문명의 선진적인 것과 문아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리적 위치의 불행으로, 선진문명은 자주 낙후민족에 의하여 멸망하는 역사를 면하지 못했다.
17세기중엽인 1636년, 중국에서 유럽으로 되돌아온 증덕소가 기록한 "상당히 부유번영하고 각방면에서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던" 명나라는 이미 1644년에 멸망한다. 이를 대체한 것은 소위 초기 '성세'의 강희, 옹건, 건륭황제시절이다. 이 기간동안에 외국인들이 기록한 것을 보면, 이런 허구의 "성세"를 잘 반박해준다. '강건성세'의 정치, 문치무공을 거쳐 결국 중국은 얼마나 빈곤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던가> 1793년 영국의 매카트니 사신단의 스탄튼이 한 한마디를 보면 분명해진다: "모든 지방이 놀랄 정도로 빈곤하다...사람들의 의복은 암루하고 심지어...우리가 버린 쓰레기도 그들은 서로 빼앗아 먹었다."
시인인 당견이 산서에서 지현을 지낸 바 있다. 그는 자기 눈으로 청나라통치하의 고통스런 생활을 목격했다. 그는 <<잠서(潛書)>>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청나라가 흥한 오십년이래로, 사해의 안에서 날로 곤궁해져갔다. 농사는 비고, 공업도 비고, 시장도 비고, 관료사회도 비었다" 그가 친히 본 산서부녀들은 입을 바지가 없었다. 그런데, "오중의 백성들은 자녀를 북방에 팔아넘겼다" 이로써 볼 때, 강건성세라는 것이 사실은 억지로 들어올린 난장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금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의 실제생활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영국의 매카트니 사절단의 스탄튼이 한 말은 당견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에딘버르평론>>에 실린 글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비록 건륭칸이 일찌기 명을 내려 사신이 도착할 때 반드시 대오를 정렬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라고 하였찌만, 매카트니는 청나라의 무장부대가 마치 거지떼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매카트니는 사회가 보편적으로 빈곤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건륭칸이 자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목적과는 전혀 상반되는 현상이었다. 도중에 그는 너무나 많은 거지를 보았고, 너무나 많은 낡아빠진 건축물들을 보았다. 그리도 대다수의 청나라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극히 낮았다. 매카트니는 청나라를 '반야만적'인 제국으로 묘사했다. 청나라인의 생활은 '가장 비열한 폭정하에서 곤장을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중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겁이 많고, 더럽고 또한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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