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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산업

동석(東石): 중국의 우산도시

by 중은우시 2009. 7. 17.

글: 왕가(王佳)

 

현재 중국에는 두 개의 유명 양산브랜드가 있다. 하나는 항주의 천당산(天堂傘)이고 다른 하나는 복건성 동석진(東石鎭)의 매화산(梅花傘)이다. 동석진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은 전세계의 30명중 1명은 동석우산을 쓰고 다닌다는 것이다.

 

복건성 남부 금삼각 진강(晋江)시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금문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작은 마을이면서, 일찌기 화교의 고향과 항구고진(港口古鎭)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전국 최대의 우산제품 및 우산원부자재의 생산수출의 집산지가 되었다. 전체 마을에 우선기업이 300개에 가깝다. 매년 수출액은 40억인민폐에 가깝다. 전국수출액의 40%에 가깝다. 명실상부한 "중국우산도시"이다.

 

1980년대초에 첫번째 우산제조공장이 "내료가공(來料加工)" 방식으로 시작한 후 지금까지, 동석의 우산기업은 30년의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그리고 중국우산제조업계의 유명인물들을 적지 않이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우산기업의 아버지: 귀향한 대만상인 소청륜

 

1980년, 동석진 매봉촌의 채정형, 채정권 및 채정록 형제는 집앞에 매봉내료가공공자을 만든다. 이것은 동석진에서 현대우산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전체 동석진에는 우산을 만드는 가내공장조차 없었다.

 

그러나 진정 동석의 우선업을 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소청륜(蕭淸倫)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동석진의 토박이들은 소청륜을 얘기할 때면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동석우산업이 오늘날의 강호지위를 갖게 된 것은 소청륜의 공로가 가장 크다는 것이다.

 

채씨형제의 매봉내료가공공장이 개시한지 7년만에, 소청륜은 동석진으로 와서 복건성내의 첫번째 첫번째로 독자기업인 우산제조기업 부흥공사(富興公司)를 설립했다. 이것은 이후 동석진의 운명을 뒤바꾸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소청륜의 고향은 동석진이다. 그는 일찌기 홍콩으로 가서 살길을 찾았고, 나중에는 대만으로 가서 발전했다. 1980년대중반에 그는 홍콩대만의 두 지역을 자주 오갔다. 대만의 일부 지방에서 많은 여공들이 손으로 공장에서 우산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고향인 동석에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그곳에서 이 사업을 벌이면 되지 않을까?

 

1987년, 소청륜은 대만에서 우산제조공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높은 가격을 주고 우산을 만드는 기계를 구입한다. 동시에 대만에서 설비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자를 불러온다. 소청륜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당초 그 기기는 300만신대만달러를 주고 샀는데,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기계의 시장가격보다 100여만신대만달러를 더 주고 산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이 기계가 부족했고, 소청륜은 하루빨리 동석으로 기계를 가져가려했기 때문에 비싸게 주고 산 것일 것으로 추측한다.

 

부흥의 공장을 동석진에 열때, 현지의 많은 젊은이들을 불러서 일하게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산제조기술과 관리경험을 익혔다. 그리고는 스스로 따로 기업을 차렸다. 동석진에는 한때 60%정도의 우산제조기업 사장들이 부흥공사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중에 20개정도의 기업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부흥에서 떠나서 만든 기업에서는 다시 20여년간 새로운 기업인을 배출했고, 이렇게 눈덩이처럼 급속히 발전하면서 동석의 우산제조업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동석진 부서기인 주신욱의 소개에 따르면, 마을의 우산제조공장이 1개에서 10개로 되고, 다시 백개가 넘어섰다. 그리고 이전에는 모두 완제품우산을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각자 분업을 해서 누구는 우산대를 만들고, 누구는 우산천을 만들고 누구는 손잡이를 만들었다. 산업클러스터가 형성된 것이다.

 

1980년대말에 이르러, 동석진의 산하에 있는 소하, 금구, 매봉, 양하, 유력등의 촌에서도 속속 각각 특색을 지닌 우산제조전문촌이 형성된다. 지금 업계내에서 유명한 부륭양산(富隆洋傘)의 동사장인 왕문필, 우사몽양산(雨思夢洋傘)의 동사장 유기안이 모두 그때 시작하였다.

 

대단한 점이라면, 소청륜은 '제자' '제자의 제자'들이 장사를 잘하고 심지어 자신은 추월해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동석에서는 지방관리이든 일반백성이든 모두 그의 흉금이 넓은 점에 감격해 했다.

 

나중에 동석우산협회의 회장이 된 소청륜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저 공동으로 산업을 키우면, (부흥)회사에게도 더 큰 발전이 있는 것이다" 중국일용잡품협회 이사장인 윤과는 소청륜에 대하여 "동석우산제조업계의 굴기에 공헌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우산기업의 중견: 매화방주 왕안방(王安邦)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초에 급속히 발전하면서 동석의 우산업계는 문제점도 있었다. 제작하는 모델이 단일하고, 판매채널이 동일했다. 각 공장들끼리 육박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윤이 격감하여 1990년대중반에 많은 우산제조기업들이 파산지경에 처한다.

 

국내시장에서 더 이상 판매할 공간이 없어지자, 일부 머리가 빨리 돌아가고, 시야가 넓었던 동석우산기업의 기업인들은 눈을 해외로 돌린다. 현재 매화산업의 동사장인 왕안방은 바로 가장 먼저 해외로 나가서 시장을 개척한 사람이다.

 

현임 동석진경제고문인 장보심 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왕안방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다만 스스로 외국으로 나가서 장사를 했다. "무엇이 동석상인의 정신인가? 왕안방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장보심의 말이다.

 

1991년, 왕안방은 두 개의 우산과 한 개의 계산기를 들고, 혼자서 광교회(廣交會)에 참가한다. 전람관출입증이 없어서, 문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려야 했다. 당시 복건성 대외무역중심에서 근무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점심슈힉시간에 식사하러 외출하는 두 명의 미국상인과 식탁에서 얘기를 하게 된다.

 

왕안석은 나중에 이 당시의 경력에 대하여 기억이 새롭다고 힜다. "처음으로 외국인과 장사를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가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노력으로 왕안석은 10개의 컨테이너 합계 100여만달러의 주문을 얻어낸다. 이때부터 국제무역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장보심은 말한다. 동석의 기업은 모방을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왕안방이 성공하는 것을 보자, 해외로 나갔다. 그래서 하나, 둘, 8개, 10개로 동석의 수출기업은 점점 늘어났다.

 

왕안방과 동석우산업계는 운이 좋았다. 그들이 구미시장을 좌충우돌하고 다닐 때, 아마도 햇살을 막아주는 양산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제재로 몰랐던 것이 틀림없다.

 

유럽의 적지 않은 국가에서는 기후가 다습하고 비가 많아서, 검은색의 길다란 우산은 신사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구비해야하는 장비였다. 그리고 예쁜 양산은 숙녀의 매력을 드러내는 보물이었다. 기본적인 기능외에 양산에는 더 많은 패션요소를 가미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유럽국가의 중산층은 통상적으로 1다스 이상의 각종 양산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옷이나 경우에 사용한다.

 

바로 국제시장에서의 '우산컴플랙스"로 동석의 우산은 막다른 골목에서 살 길을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매년 40억인민폐의 수출로 전국 동종업계의 수출액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매년 천여종류의 신제품이 해외의 120여개국가지구에서 팔리고 있다. 동석진 한 곳에서의 양산 생산량은 전세계 생산총량의 23%이상을 차지한다. 대다수의 지명도가 있는 동석우산기업은 모두 이 단계에서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2002년을 전후하여, OEM가공에 의존하던 동석우산업계는, 다시 한번 심각한 도전에 맞부닥친다. 토지, 노임등의 원가가 올라가면서, OEM가공이윤은 너무 적어서 문제가 되었다. 기업의 생존공간이 너무나 협소했던 것이다. 비록 '동석제조"가 성공적으로 동석이라는 지리표지를 국외고객들에게 낙인시켰지만, 동석은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인 브랜드가 결핍되어 있었다.

 

여기서, 다시 왕안방이 일어섰다.

 

회사에서 생산한 "매화산"을 정정당당하게 세계시장에 내놓기 위하여, 왕안방은 한가지 규칙을 정한다: 외국상인들이 "매화산"으로 지정하여 주문한 것은 모두 가격우대를 받을 수 있고, 계약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만일 OEM가공이면, 가격을 배로 준다고 하더라도 생산라인이 남는지를 보고 결정한다.

 

이 규칙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집행하니 외국상인들이 "매화산"을 괄목상대하게 된다. 최신통계에 따르면, 왕안방의 회사는 매년 350만개의 양산을 생산하는데, 4/5가 "매화표"이다. 제품은 전세계 150여개국가와 지구로 수출된다.

 

2007년 9월 25일, 매화산업은 성공적으로 심천거래소에 상장된다. 그리하여 동석의 우산기업은 처음으로 국내외투자자들의 관심을 끈다. 이때 우산제조기업의 6개 저명브랜드 중에서, 매화, 우중조, 우사몽과 금구중국이라는 4개의 기업은 동산진에 있다. 6석중 4석을 차지한 것이다.

 

왕안방은 "매화산"을 가지고 자본시장에 선풍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보니 현지의 동종업계에도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초, 홍성우구는 310만위안의 가격으로 양광양산을 입찰을 통해 인수해서 품에 안았다. 이는 동석우산업계에서 처음으로 자본M&A를 맛본 것이다. 매화산업과 문을 마주하고 있는 홍성우구는 금년내에 상장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