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병마용은 진시황의 배장갱(陪葬坑)이 아닌가?

중은우시 2008. 10. 28. 00:35

글: 김석(金石) 2008년 10월 22일 <<서안일보>>게재

 

최근 한동안 외지의 일부 매체는 남경의 한 건축학자인 진경원(陳景元)의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견해를 보도하였다. 특히 일전 CCTV 채널10의 <<발현, 탐색>> 프로그램이 방영한 <<병마용의 신비주인>>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서안시의 시민을 놀라게 했다. 기자가 인터넷을 열어보니, 관련보도가 아주 많아서, 천개가 넘었다. 특히, "진경원의 BLOG"는 창끝을 직접 저명한 병마용연구전문가인 원중일을 향하고 있었다. 블로그에는 진경원이 최근에 홍콩에서 <<진용진상: 하나의 두세기에 걸친 고고기안>>이라는 책을 출판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책인 <<진용풍파: 하나의 왜곡된 학술전쟁>>이 인쇄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기자는 최근들어 이 현상에 대하여 원중일을 인터뷰했다.

 

"이는 일군의 전문가가 수십년 고고연구한 성과이다"

 

금년에 76세된 원중일 연구원은 가장 먼저 병마용을 발굴하고 연구한 전문가의 하나이다. 1974년 그는 3명의 고고대원을 이끌고 병마용갱에 들어간 후 계속하여 병마용의 고고연구에 종사했다. 1988년 4월 진용박물관 관장을 맡았고, 섬서성고고연구소 부소장,섬서성고고학회 부회장, 진용학연구학회 회장, 진문화연구회 부회장을 겸직했다. 1998년에는 진용박물관 명예관장이 된다. 원중일은 1,2,3호 병마용갱, 동차마갱에 대한 탐사, 발굴을 실시한 이외에, 진시황릉 능원에 대한 비교적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했고, 각양각색의 배장갱과 묘장 600여좌 및 수백만평방미터의 지면건축유적지를 발견했다. 그가 주재한 <<섬서진시황릉2호병마용배장갱제1단계발굴>>프로젝트는 1999년 국가문물국 전야고고1등상을 받았다. 비록 일찌감치 은퇴했으나, 그는 병마용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고, 자주 회의, 강연에 참석했다. 그래서 아주 바빴다. 어떤 때는 일부 기자의 인터뷰에 응할 수가 없었다. 본보 기자는 그의 두 개 회의의 빈 시간을 이용하여 그를 인터뷰했다.

 

원중일은 기자에게 말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배장갱이다라는 점은 그의 관점만이 아니라, 국내외고고전문가의 기본관점이다. 고고계, 사학계, 자연과학계는 보편적으로 이것이 과학적인 결론이라고 인정한다.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양대의 고고인원이 30여년동안 한삽 한삽 파내어 이루어진 것이다. 고고대원은 초기에 이 문제를 주의했다. 1974년 그들이 고고발굴을 시작할 때, 그는 18개연구과제를 내놓아 사람들이 연구했는데, 그 중에는 바로 "병마용"이 누구의 배장갱인지의 문제가 있었다. 이 결론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노력하여 얻어낸 성과이다. 어떤 고고대원은 이미 작고했다.

 

"대량의 고고학적 증거가 입증한다."

 

원중일은 기자에게 말한다. "병마용"이 진시황의 배장갱이라는 결론은 각종, 대량의 고고학적 증거를 기초로 얻어낸 것이라고.

 

첫째는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문물중에서 23건의 진시황기년명문이 있는 동병기가 있었다. 각각 진시황3년에서 19년까지이다. 그중에는 '여불위과' 6건이 있다. 기년은 진시황 3년, 4년, 5년, 7년이다. 예를 들어, 진시황3년의 '여불위과'의 위에는 '삼년상방여불위조 사공섭 승의 공조(三年相邦呂不韋造 寺工 丞義 工)"라는 명문이 있다. '삼년'은 진시황삼년을 가리키고, '상방'은 '독조(督造, 제조감독)'이라는 뜻이고, 여불위는 바로 진시황의 승상이다. '사공'은 진시황시기 중앙에서 병기와 차마기를 제조하던 관청의 명칭이다. '섭'은 제조한 책임 장인의 이름이다; '승'은 부책임자이고, '의'는 사람이름이다. '공'은 구체적인 제조장인의 이라는 것이고, '조'는 사람이름이다. 후기 기물이 전기묘장이 나타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병마용갱은 진시황때 건조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연대를 명확히 표기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다만, '사공'이라는 명문을 포함한 모(矛, 세모난 창), 대(鐓)등 동병기 10여건이 발견되었다. '사공'은 진시황2년에 만들어졌고, 이후 진시황시기에 계속 존재했다. 병마용갱에서 한 마롱두(馬籠頭)의 피대(皮帶)에서 붉은 글자로 두 군데 쓰여 있는 것이 '사공'이라는 두 글자이다.

 

둘째는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벽돌에는 도문(陶文)이 70여건 있는데, 각각 "궁모(宮毛)", "좌사고와(左司高瓦)", "궁수(宮水)"등등이 있다. "좌사고와"의 "좌사"는 "좌사공(左司空)"으로 관청이름이고, '고'는 이름이다. '궁수'는 궁사공하의 벽돌굽는 기관이다. 전문적으로 진릉을 위하여 벽돌을 굽는 기관인 것이다. 이들 도문은 진시황릉원에서 출토된 벽돌기와의 도문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두곳의 벽돌기와의 형태, 크기, 규격, 문양등도 완전히 가다. 시대는 진시황시대에 모두 속하는 것이다.

 

셋째는 병마용갱내의 도용(陶俑)과 진시황릉의 다른 배장갱에서 출토된 도용은 조형품격과 제조공법이 동일하다. 진시황릉의 봉토 서측내외성의 사이에 있는 곡척형마굿간갱에서 출토된 도용은 그 크기, 복식, 모자신발, 머리모양 및 제작방법이 1,2,3호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일부 도용과 완전히 같다. 이는 양자간에 동일시기, 동일장인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 진시황의 배장품이다.

 

넷째, 1,2,3호갱에서 출토된 수십건의 마차를 끄는 도마(陶馬)와 기병의 안장은 조형과 모습 세부적인 선을 긋는 수법이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마(銅馬)와 동일하다. 예를 들어, 말의 조형이 모두 머리가 무겁고 콧뼈가 돌출되었으며, 목이 두터우면서 짧고, 갈기가 낮고, 등이 넓으며, 가슴이 넓고, 사지의 발육이 좋아서 서북부 하곡마에 속한다. 

 

다섯째, 1,2,3호갱에서 출토된 전차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차(銅車), 안장과 줄을 묶는 방법등이 같다. 동용과 도용 어수(御手, 말모는 사람)는 두 손을 반쯤 쥐고, 식지와 중지의 사이에 간격을 두었는데, 밧줄을 여기를 통하여 손안에 잡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섯째, 1,2,3호갱의 구축방법은 진시황릉원내의 마굿간갱, 부장갱, 동차마갱등 많은 배장갱의 구조방법과 비교했을 때, 모두 먼저 흙을 파내고, 구덩이의 주위에 2층으로 흙을 다졌다. 대형갱의 중부는 모두 평행의 격벽이 있다. 갱의 위에는 나무를 빼곡히 놓고 다시 흙을 묻었다. 나무는 송백이다.

 

일곱째, 병마옹 1호갱에서 출토된 T19G9:22호 병마용의 발판위에 '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도용을 제조한 장인의 이름이다. 또 다른 T2G1:33호 병마용의 위에도 '함양고'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진시황릉원내의 백희용갱에서 출토된 T1G3:3호갱의 발판에도 '고'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형이 같다. 이 두 곳의 도용제작자가 서로 같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이외에 병마용갱과 진릉의 다른 배장갱에서 출토된 벽돌, 도용에는 '궁강(宮强)' '궁득(宮得)' '궁진(宮進)'등 같은 글자가 있다.

 

여덟째, 진시황릉원의 전체 건축과 배치로 보면, 병마용갱은 불가분의 구성부분이다.

 

진시황릉원의 건축배치는 하나의 이상적인 궁성이다. 높은 봉토와 내외의 이중성벽이 있다. 봉토의 아래에 있는 지궁은 진궁을 상징하고, 내성은 황성을 상징한다. 외성은 경사의 외곽성을 상징한다. 능묘는 내성의 남부에 있고, 침전은 북부에 있다. 이는 능측설침(陵側設寢)의 예법에 맞는다. 우궁의 각종 부장갱, 차마갱은 봉토서쪽의 내성안에 있다. 이는 궁중의 마굿간, 정원을 상징하는 배장갱이 외곽성의 서부에 있다.; 사택리사(寺宅吏舍)는 서북부에 있다; 경사마굿간, 정원을 상징하는 마굿강갱과 병마용은 외성의 동쪽에서 동쪽을 향해 있다. 전체 능원의 배치는 합리적이고 질서있으며,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했다. 진시황이 생전에 거주하던 진궁과 함양성은 모두 군대가 지키고, 군대는 3종으로 나뉜다. 하나는 황제의 시위군, 또 하나는 궁중밖의 둔위군, 셋째는 경사의 둔위군이다. 1,2,3호갱의 병마용군진은 세번째에 속한다. 경성을 지키는 둔위군인데, 숙위군이라고도 한다.

 

아홉째,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의 능역내에 있다. 고고자료를 보면, 진시황릉의 규모는 거대하고, 능력의 점유면적은 매우 넓다. 동서, 남북으로 각 7.5킬로미터이며, 모두 56.25평방킬로미터이다. 그 범위내에 모두 진시황시기의 유적, 유물이 있다. 진시황릉의 문물분포가 밀집된 구역은 119.2평방킬로미터이다; 진시황릉의 핵심구역은 2.13평방킬로미터이다. 병마용갱은 문문분포가 비교적 밀집된 지역에 있고, 서쪽으로는 진시황릉의 외벽과 1025미터 떨어져 있다. 병마용갱의 주위 동, 북, 서방향에도 다른 진시황릉의 배장갱이 있다.

 

이외에 다른 많은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병마용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지, 고증(孤證, 하나의 증거)이 아니다. 결론은 아주 착실하게 얻어냈다. 만일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배장갱이라는 결론을 뒤집으려면 반드시 일련의 고고발견에 대하여 명확히 해석해야 한다. 학문은 과학이다. 증거를 중시해야 하지, 아무렇게나 상상해서 만들어내서는 안된다.

 

"왜 선태후의 배장갱이 아닌가"

 

원중일은 기자에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병마용갱의 서북쪽에 큰 묘가 있는데 선태후의 묘라고 하는데, 이런 결론은 시기상조이다. 고고대는 아직도 발굴하지 않았다. 안의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아직 진나라의 것인지 한나라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묘실은 200평방미터도 되지 않는데, 1개의 묘도만 있어서, "갑(甲)"자형 묘제이다. 능원, 벽이 없어서 규격이 너무 낮다. 대부(大夫)급이다. 선태후라면 최소한 제후왕의 급으로 하여 "중(中)"자형의 묘제일 것이다. 200평방미터도 되지 않는 묘에 2만평방미터규모의 병마용을 배장갱으로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사기>>에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선태후는 "지양여산(芷陽驪山)"에 묻혀 있다고. 진나라때 지양고성의 위치는 여산서록의 임동구 한욕일대이다. 서양촌은 여산의 북록에 위치해있는 여읍고성부근이므로, 지양고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서양촌에서 발견된 묘와 선태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고인원은 이미 여산서쪽의 패교 홍경동쪽에서 발견된 4곳의 대형능묘를 발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마도 선태후릉일 거이다. 병마용갱은 여산의 북쪽에 있다.선태후는 "병마용"과 같은 큰 배장갱을 가질 수가 없다. 여인의 능묘는 8000병마용을 가질 수 �는 것이다. 여인은 여인의 매장용제도가 있다. 당연히 시녀용이 있어야 한다. 여산북록의 광대한 지역에 진시황릉부근에 아직도 다른 대형묘장이 있다는 사료의 기재는 없다. 그러므로, 병마용갱은 다른 어떤 사람의 배장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 그렇게 큰 건설규모로 볼 때, 진시황만이 그러한 것을 지을만한 박력,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듣기를 희망한다."

 

원중일은 선후로 전문서적 10여권을 출판했고, 논문 백여편을 발표했다. 그중에 <<진시황릉병마용1호갱발굴보고>>, <<진시황릉병마용연구>>, <<진릉2호동차마>>등의 전공서적은 섬서성사회과학원 우수학설성과 1등상을 받았다; <<진대도문>>등은 국가우수도서 1등상을 받았다; 그는 1991년 '섬서성의 뛰어난 공헌을 한 전문가"라는 칭호를 받았다. 1992년에는 섬서성 노동모범이 되었고, 국무원 특수보조금을 누려�; 1993년에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가 되었다.

 

1984년 제3기 <<대자연탐색>>잡지에 진경원이 <<진용신탐>>이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병마용갱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병마용갱의 주인은 선태후라는 것이다. 다음해에 개최된 1차병마용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진경원의 관점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원중일도 논문 1편을 써서 자신의 관점을 얘기했다.

 

원중일은 기자에게 얘기했다. 사회에서 서로 다른 관점이 있는데 대하여, 그의 태도는 학술상 서로 다른 학설이 있는 것은 아주 정상이다. 학술은 토론해야 한다. 학술은 토론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토론을 많이 할수록 분명해진다. 학술은 각종 의견이 부닥치는 것이고 부닥치는 것을 통하여 깊이있는 사고가 가능하고, 학술연구를 깊이있게 발전시킬 수 있고, 점차 합리적인 컨센서스를 형성해갈 수 있다. 관점이 맞느냐 틀리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만일 서로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 그는 서로 다른 의견을 듣기를 바란다고 했다.

 

기자는 원중일과 다른 동료 장잠민이 편집하고 1990년에 출판한 <<진용연구문집>>에서 진경원의 <<진용신탐>>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