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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5.4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4. 23.

글: 진원(陳遠)

 

시간은 위대한 조화주이고, 역사는 순서대로 늘어놓은 알파벳과 같다. 시간을 거슬러 90년전인 1919년 5월 4일에 발생한 일도 오늘날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또한 후인들이 거기에 부가하는 의미를 그렇게 담고 있지도 않았다. 기괴한 것은, 후인들이 그 운동에 대하여 부여하는 의미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운동은 오늘날 보기에 모습이 갈수록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어느 시간을 잡아서 전환점의 표지로 삼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1912년의 중화민국건국이 그것이다. 사실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신해혁명은 이천년간 지속된 중국의 황제제도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국체는 이미 출현했다. 국민의 심리는 제때 따라가지 못하여, 어떤 사람들은 황제가 없어졌으니,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중화민국이 건국된 초기에 정계요인들의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원세개, 여원홍, 풍국장, 장훈, 장작림 등등, 모조리 청나라말기정계의 주요인물들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연속성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5.4운동도 고립된 학생운동이 아니라, 그 자체의 전인후과(前因後果)가 있다.

 

이런 기준하에서, 5.4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검토해보아야, 순조롭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

 

먼저 21개조부터 얘기해야 한다.

 

1915년 1월 18일, 추웠던 그날 저녁에 정상적인 외교경로를 거치지 않고, 일본의 주중국공사인 하오키마스(日置益)는 중국총통 원세개와의 개인적 회동에서, 몇페이지의 종이에 쓴 문건을 내놓았다. 문건용지에는 전함과 기관총무늬가 들어 있었다. 하오키마스는 원세개에게 "절대로 기밀유지를 해줄 것과 그렇지 않으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건의 내용은 바로 중국인의 자존심을 그 어떤 전함이나 대포보다 더욱 상하게 만드는 21개조였다. 조약에 따르면, 중국은 거의 일본에 장악되는 것이다.

 

원세개는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날 저녁에 즉시 국무경 서세창, 외교총장 손보기, 외교차장 조여림, 육군총장 단기서, 세무독판 양사이를 불러서 일본의 요구사항에 대하여 협의했다. 

 

4일간의 연속회의를 거쳐, 총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데 익숙한 군벌과 관리들은 전례없는 방식을 채택하게 되는데, 외국과 중국신문계를 이용하여 도의적인 지지를 받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24일, 미국공사 Pual S. Reinsch는 자체 경로를 통하여 21조의 대체적인 내용을 입수한다. 그날, 북경의 신문에는 먼저 일본의 요구사항에 대한 소식이 실린다.

 

중국정부가 외국을 이용하려던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그저 본국의 중국에서의 이익이었다. 다만, 중국의 민중여론은 이때 처음으로 발언권을 얻은 것이다. 지식인들은 신문, 잡지를 통하여 민족굴욕감을 소리높이 외쳤고, 전국의 상하에서 그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하오키마스는 신임 외교총장 육휘상(陸徽祥)과의 제3차 회동에서 중국정부가 관례에 반하여, 여론을 무마시키지 않고 오히려 여론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육휘상은 이런 질책에 대하여, "현재는 이미 만주인이 통치하는 시대가 아니다. 중국인은 이미 신문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다만, 일본인들에 대응하는 이유로서는 당당했다.

 

중국국민들의 일제불매운동도 그 시기에 급속히 번져갔다. 정부가 일본의 압력에 못이겨 여러번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래도 멈추지를 않았다. 이 운동은 4년이후인 5.4운동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과 중화서관(中華書館)의 상전(商戰)이 벌어지고, 결국은 소송으로 번진다. 1897년에 설립된 상무인서관은 중국근대출판의 선구자였다. 건립초기부터 일본인의 지분이 있었다. 당시의 형세하에서, 상무인서관은 자신의 이미지를 위하여, 1919년 1월 4일 <<신보(申報)>>에 광고를 싣고, "이미 외국인지분은 모두 철수했다"고 밝힌다. 다만, 중화서관은 선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순수한 중국상인들의 지분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무인서관에는 일본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시에 상무인서관과 중화서관이라는 출판계의 거두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것도 이 시기의 에피소드중 하나이다.

 

원세개정부는 비록 중간에서 알선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일본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5월 7일, 하오키마스는 외교부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중국정부에 5월 9일 6시까지 답변을 달라고 한다. 5월 8일, 원세개는 여원홍, 서세창과 각부총장을 불러서 회의를 하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9일 밤, 외교부는 하오키마스에 조회를 보내어 일본의 최후통첩을 승인한다.

 

5월 7일과 9일은 금방 "국치기념일(國恥記念日)"로 명명된다. 이후 5.4운동의 두 가지 구호는 바로 "외쟁국권, 내징국적(外爭國權, 內懲國賊, 밖으로는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국적을 징벌한다)"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과 교섭하던 관리는 주로 3 사람이었다: 장종상(章宗祥), 조여림(曹汝霖), 육휘상(陸徽祥). 이들에게 몇년후 학생운동의 창끝이 겨눠진다.

 

2.

 

21개조의 소식은 신속히 국외로 퍼져갔다.

 

<<중국학생월간>> - 당시 미국유학생의 목소리는 주로 이 잡지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이 잡지의 3월호에 거의 모든 문장이 21개조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이었다.

 

중국유학생들은 격분했다. 그 안에 있던 글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미족의 최고이익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만일 필요하다면 목숨의 희생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인재가 그 어떤 것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아주 명백하다. 조국으로 돌아가자." 심지어 어떤 학생은 여름방ㅎ삭기간동안 미국 군부가 주관한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호적은 이런 조류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당시 <<중국학생월간>>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 호적은 <<전체 중국학생들에게 보내는 공개서신>>을 통하여 모두 "애국의 맑고 깨어있는 두뇌"를 갖자고 호소했다. 호적은 학생으로서 당장 해야할 임무는 '공부'이다. '스스로를 잘 준비하자' '우리의 국가가 이 위기를 극복한 이후 -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 국가가 발전하도록 도와주자" 호적은 심지어, "혹은 만일 필요하다면, 조국이 죽음 속에서 다시 부활하도록 하자"라고 했다.

 

호적은 스스로 욕먹을 짓을 했다. 즉시 호적의 건의는 무슨 "애국의 맑고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비애국의 멍청함"이라고 반박당했다. 호적의 곁에 있던 학생들은 더욱 직접적으로 그를 "매국노"라고 불렀다.

 

다만, 호적은 자신의 판단에 자신감이 있었다. 반년후 호적은 이렇게 썼다. "신조류가 밀려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장래에 문학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1년후이 혁명의 지도자가 된다.

 

21개조가 체결된 후, 유학생의 귀국붐이 일어나는 가운데, 반원세개의 "제2차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진독수는 1915년 여름에 상해로 되돌아온다. 9월 15일, 그는 상해에서 <<청년잡지>>를 창간하는데 나중에 <<신청년>>으로 개명한다.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발간사인 <<경고청년(敬告靑年)>>에서 진독수는 당시의 청년들에게 6가지 행동준칙을 제안했다: (1) 자주적이고 노예적이지 않을 것, (2) 진보적이고 보수적이지 않을 것, (3) 진취적이고 퇴은(退隱)적이 아닐 것, (4) 세계적이고 쇄국적이지 않을 것, (5) 실리적이고 허문(虛文)적이지 않을 것,  (6) 과학적이고 공상적이지 않을 것.

 

이 잡지는 멀리 미국에 있던 호적의 이목을 완전히 일신시켰따. 그는 자신의 문학혁명에 대한 생각을 진독수에게 걸었다. 그후 <<문학개량추의>>라는 이름으로 <<신청년>>에 발표하는데,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이 부드러운 말투의 글이 그 시대에 광풍노도를 몰고 오는 백화문(白話文) 운동의 시발점이 될 줄은.

 

그러나, 호적이 나중에 결론내린 것처럼, 호적의 태도는 너무나 온화했다. 그의 태도에 따라서 하자면, 문학혁명으 최소한 10년의 토론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다만, 진독수의 용기는 이처럼 너무나 진중한 결점을 잘 보완해 주었다...그때 만일 진독수의 '반대하는 자들에게 토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 정신'이 없었더라면, 문학혁명의 운동은 절대로 그렇게 큰 주의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진독수의 주요활동은 상해에 집중되어 있었다. 국내외의 신지식인들중 대표적인 인물인 오치휘(吳稚暉), 호적, 이대쇠(李大釗), 유반농(劉半農)등의 인간관계는 그다지 밀접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1916년 12월 26일이 되어, 채원배가 북경대학총장에 임명된 후에 바뀌게 된다. 채원배가 북대를 맡은 이후, 진독수를 북대진영에 끌어들이고, 호적도 "지금 우리가 돌아왔다' 북대에 들어가기 전에 진독수는 이미 이백사(易白沙), 오우(吳虞)등과 반유교의 관점을 형성했고, 자신의 신조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덕선생(德先生)과 새선생(賽先生)

 

채원배가 북대를 맡은 후, 북대에는 새로운 기상이 감돌았다. 1918년 겨울, 새로운 사상과 활동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신조(新潮)>>잡지를 창간한다. 그 학생들은 나가륜(羅家倫), 부사년(傅斯年)등이었고, 나중에 5.4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다.

 

3.

 

많은 사람들은 채원배가 북대총장을 맡은 후에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하는데 놀라워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개혁조치들은 적절히 시행되었다. 이는 채원배의 경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채원배와 같은 자격을 갖춘 인물이더라도 역시 압력은 있었다. 그가 받은 압력은 주로 보수주의진영에서 오는 것이었다.

 

임서(林)는 당시 보수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대표적 인물이다. 임서는 비록 영어를 몰랐지만, 조수의 도움을 받아, 대량의 구미소설을 번역했다. <<차화녀(茶花女, 라 트라비아타)>>는 가장 영향력있는 책이었다: "가련한 라트라비아타 한권이 중국의 탕자들의 애간장을 끊는다" 다만, 임서가 신문화에 대한 반대에 적극적으로 압장섰다기 보다는, 피동적으로 응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화진영의 인물들은 역량은 충분히 비축되었지만, 관심이 부족했다. 표적이 필요했었다.

 

임서는 그들의 주목표가 된다.

 

1918년 3월 15일, 전현동(錢玄同)은 "왕경헌(王敬軒)"이라는 가명으로, 구파문인의 말투로 <<신청년>>의 편집자에게 서신을 하나 보낸다. 그 거신에서 임서를 극도로 찬양하는 내용을 담는다. 그리고, <<신청년>>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 그 후, 유반농이 이 서신에 대하여 답변을 싣는데, 하나 하나 따져서 반박하는데 아주 각박했다.

 

임서도 반박을 시작한다. 1919년 2월과 3월, 임서는 상해의 <<신신보(新申報)>>에 두 편의 단편소설을 싣는다. 채원배, 진독수, 호적, 전현동등을 빗대어 썼는데, 그중 <<형생(荊生)>>이라는 글은 역사교재에까지 들어가 있다. 임서는 이때부터 악역을 맡는다. 그러나, 임서는 나중에 신문에 쓴 글을 통하여, 그의 두 편의 이야기는 모욕적이었다고 인정하고, 채원배 등에게 사과한다. 이런 태도는 신문화진영에서 진독수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19년 3월 18일, 임서는 채원배에게 나중에 널리 알려지게 된 서신을 쓴다. 거기에서 북대는 "공자,맹자를 뒤집어 엎고, 윤리도덕을 뒤집어엎었다"고 적었다. 같은 날, 채원배는 임서에게 장문의 회신을 보낸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인용되곤 하는데, 그 서신에서 채원배는 이렇게 말한다: "학설에 대하여 세계 각 대학의 통례를 본받아 '사상자유'원칙을 따르고, 겸용병포(兼用幷包)주의를 취하며..."

 

다만, 채원배의 회신 원문을 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비록 채원배라고 하더라도, 구진영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때, 말을 교묘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운동교수들이 제창한 것에 대하여는 부인하거나 축소했다. 이에 대하여, 주책중 선생은 그의 명저 <<오사운동>>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그러한 환경하에서, 낙후한 군벌정치통치하에서 보수세력이 대규모로 진공하는데 직면하여, 채원배의 답신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대학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4.

 

임서 하나로는 채원배가 그렇게 고민하도록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채원배가 압력을 느낀 것은 당시 임서로 대표되던 보수세력이다.

 

일찌기 민국성립초기에 많은 청나라황실출신의 군계정계요인들이 국민당체제에 편입되어 들어온 후, 공개적으로 청나라황조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는 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신강도독 원대화(袁大化)는 청나라관모의 정대(頂戴)를 떼어내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도독겸순무부원이라고 칭했다; 감숙도독 조유희(趙惟熙)는 스스로 변발을 남겨두었을 뿐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변발을 자르는 것도 금지했다; 풍국장이 금위군군통을 맡고 있을 때, 양궁(兩宮)에서 보면 슬퍼할 것을 두려워하여, 북경남원의 인민들이 국기를 내걸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장훈의 변자군(子軍)이다.

 

1914년, 사회에는 복벽(復)의 기운이 전례없이 농후해졌다. 당시 두 가지 서로 다른 황제파가 동시에 나타난다. 하나는 원세개를 새로운 황제로 앉히자는 원당(袁黨)이고, 다른 하나는 청나라를 복벽시키자는 청나라유신(遺臣)들이다.

 

원세개는 이런 복벽주장에 대하여 종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원세개의 황제등극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그의 아들 원극정과 양도로 대표되는 주안육군자(籌安六君子)이다.

 

1915년초, 양계초는 원극정의 초청장을 받는다. 그를 탕산의 봄연회에 초청한 것이다. 양계초는 도착한 후, 주인과 양도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자, 원극정은 이렇게 해명했다: "오늘은 외부인을 초청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 주제로 들어가자 원극정은 은근슬쩍 양계초를 떠보았다: "최근들어 여론에서 공화제는 국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탁여선생은 어떤 고견을 갖고 계신지요?" 이렇게 묻는 것은 아주 돌연해서, 양계초는 원씨부자가 황제에 오르려는 기도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이렇게 답변했다: "나는 평생 정체(政體)를 연구했고, 국체(國體)는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6월, 양계초가 남경으로 가서 풍국장을 방문했다. 풍국장은 양계초와도 가깝고 원세개와도 가까운 인물이다. 양계초는 풍국장을 통하여 원세개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내고자 했다. 6월 27일, 두 사람은 북경으로 온다. 풍국장은 연속 세번 원세개를 만난다. 매번 황제제도문제가 나오면, 원세개는 분명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그후인 12월 31일, 원세개는 각종 '청원단'이 재촉하는 분위기하에서, 정식으로 민국5년을 홍헌원년으로 바꾸고, 총통부를 신화궁이라 바꾼다. 원세개는 마침내 황제에 오른 것이다.

 

다만 당시의 사회엘리트층에서, 공화체제는 이미 컨센서스를 이룬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하층에서 '황제'를 갈망하는 심리형태와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바로 '여영시(余英時)선생이 얘기한 '대전통'과 '소전통'이 상호 부닥치는 역사였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밀고 갔다. 각지에서는 반원세개세력이 속속 깃발을 들었다. 1916년 3월 23일, 원세개는 자신의 총통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황제제도를 폐지한다. 단명한 홍헌황제제도는 앞뒤로 겨우 83일간 존속했다.

 

비록 총통지위는 보전하였지만, 원세개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6월 6일, 원세개가 죽었다. 임종때, 그는 자신을 위한 만련(輓聯)을 썼는데, "위일본거일대적, 간중국재조공화(爲日本去一大敵, 看中國再造共和)". 마치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과 같다. 어떤 역사가는 당시 일본이 중국을 계속 핍박하는 상황하에서, 원세개는 황제에 오름으로써 황제제도를 통하여 중국의 흩어진 권력분포를 집결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고자 했다고 본다.

 

원세개가 죽은 후, 여원홍이 총통을 맡는다. 다만 실제권력은 내각총리 단기서의 수중에 장악된다. 단기서의참모장인 서수쟁(徐樹錚)은 바로 임서의 소설 <<형생>>에 나오는 '대장부'의 원형이다.

 

신사상과 구세력은 접근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5.

 

1916년 10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隅重信)의 뒤를 이어 일본수상이 된다. 당시 일본경제는 사상유례없던 전시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재정대신인 가쓰다(勝田)는 "국분근(菊分根)" 정책을 실시한다. 그 목적은 대출과 투자를 통하여 중국에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고, 중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이었다. 1917년 1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이 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은 단기서정부에 거액의 "니시하라차관(西原借款)"을 제공한다.

 

예전의 원세개, 지금의 단기서. 그들은 같은 정치모태에서 태어났다.

 

21개조 협상에서 일본에 강경한 입장을 주장했던 단기서는 점차 일본에 치우치기 시작한다. 1918년 3월에서 5월까지, 단기서의 허가를 받은 후, 중국과 일본은 <<중일육군공동방어협정>>에 대한 협상을 시작한다. 협정에 따르면, 중국정부는 일본에 북만주와 외몽고에 대한 군대주둔권을 인정하고, 일본이 중국의 군사지도를 사용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중국해군과 육군에는 일본교관이 배치된다. 이외에 일본은 일부 다른 권리도 인정받는다. 비록 협상이 엄격한 보안하에서 진행되었지만, 소식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5월 5일, 중국의 재일본유학생들은 일본경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거행하고. 모든 재일본유학생은 5월 20일 집단으로 귀국하겠다고 결의한다. 다음날 또 다른 집회에서 46명의 중국학생이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이는 중국학생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소년중국학회는 바로 이때 결성된 것이다.

 

5월 21일, 북경의 많은 대학, 북경대학, 북경고등사범학교, 북경정법전문학교등이 포함된 대학의 2000여명 학생이 시위를 하여 일본과 군사협정을 맺는데 항의한다. 오전 9시, 학생들은 신화문 총통부의 접견실 앞에 모였다. 그리고 총통면담을 요구한다. 풍국장은 북경시장등을 보내어 학생들과 만나고, 학생들을 설득하여 학교로 되돌려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풍국장이 13명의 학생대표를 만나고, 중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학생들은 그제서야 흩어졌다. 이때의 학생대표는 단석붕(段錫朋), 서덕형(徐德)등의 인물이다. 다음해에 이들은 모두 5.4운동의 지도자가 된다.

 

그때 파리평화회의는 아직 개최되지 않았다. 다만 5.4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느릿느릿한 역사의 흐름에서 몇년간의 숙성을 거쳐 다시한번 급류과 몰아치는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