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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아편은 어떻게 약품에서 마약으로 바뀌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7. 15.

글: 주유쟁(朱維錚)

 

중국근대사 교과서들은 제1장에서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아편이 중국에 전래된 역사에 대하여는 소개하지 않고 있다. 의분이 과학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단지 아편의 해독을 질책하는 것만으로는 아편이 어떻게 청나라의 부패과정을 가속화시킨 마약인지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명나라 만력6년(1578년)에 쓰여진 <<본초강목>>의 곡류약물(穀類藥物)부분에서: 이시진은 "아부용(阿芙蓉):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인데 최근 들어서 쓰는 것이다. 앵속화의 진액이라고 한다."라고 적었다. 사실 진통약으로서 일찌기 당문종 개성연간(836-840)에 아편(鴉片, 阿片이라고도 쓴다)은 약방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중 태의를 지낸 바 있는 이시진은 앵속화가 원래 서아시아에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것같다. 앵속화의 부드러운 과실의 진액을 응결시킨 아부용은 개략 비잔틴을 거쳐 당나라로 무역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말한 '최근 들어서 쓰는 것이다'라는 것에는 최소한 1가지 사례가 있다. 즉 그가 죽을 때(1593년) 이미 뚱뚱해져서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만력황제는 아마도 병으로 인한 고통때문이겠지만, 아편을 먹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편을 담배에 혼합시켜서 담뱃대로 흡입하는 것은 즉, 아편담배를 피우는 것은, 미주의 인디안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는 습속이 스페인사람을 거쳐 극동지역에 전해지고난 이후이다. 위비덕(魏菲德)에 따르면, 이런 아편흡입방식은 1620년(명나라 태창원년)에 대만사람들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미주의 담배는 명나라중엽에 중국에 전래된다. 그후 금방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중국에 퍼진다. 가정, 만력연간의 왕세정은 이렇게 탄식했다: "삼척동자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만인들은 대부분이 복건성에서 이민간 사람들이고, 청나라강희22년(1683년)에 이미 정씨정권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해금이 해제되었지만, 아편을 피우는 습관은 대륙보다 늦게 전파되었다. 8년후인 청나라 옹정7년(1729년)에 청나라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아편수입을 금지했다. 이는 아편이 이미 약재에서 마약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약으로서의 아편은 중국에서 만연했다. 이것도 만주통치자들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강희, 옹정부자는 모두 담배를 금지한 적이 있다. 이는 백성의 건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담배를 심으면 양식을 심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세수에도 영향을 주고 담배를 심는 곳에서는 식량이 부족하여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명나라말기에서 청나라초기의 근 200년동안, 비싼 담배, 담배피우는 도구를 가지고 부를 자랑하던 동남의 귀족, 부호들과 그 자제들은 돌연 대만에서 발명한 아편흡입법을 배우게 된다. 더욱 신기하고 더욱 자극적이었으며, 합법적으로 수입하던 양약이었다. 어찌 서로 앞다투어 피우지 않겠는가?

 

일찌감치 백은을 주고,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등의 우수한 제품을 수입해가던 구미의 상인들은 중국에서 날로 늘어나는 아편시장에 주목하게 된다. 어찌 이 기회를 놓칠 것인가? 마르크스의 <<아편무역사>>(1858년 발표)에 따르면, 영국 동인도회사의 우두머리는 터키에서 아편을 운송해서 중국에 파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시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인도 방글라데시 농민들에게 아편을 심도록 강제하고, 대중국아편무역을 독점하고자 했다고 한다. 청나라 가경원년(1796년)에는 태상황이 된 건륭제가 다시한번 아편수입을 단속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후 내외관상들이 결탁하여 아편밀수는 더욱 성행한다. 특히 1834년(청도광14년)에는 영국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독점권이 취소되면서, 아편무역은 사영기업의 수중에 들어간다. 미국등의 아편밀매업자들도 경쟁에 뛰어든다. 결과적으로 3년도 되지 않아, 중국에 유입되는 아편의 양이 10배나 증가하게 된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중국은 백은이 부족한 나라이다. 명나라 영종 정통원년(1436년)부터 은을 위주로한 화폐제도를 시행한다. 상품유통과 국고수입은 모두 백은을 사용했고, 주로 농공산품수출무역에서 얻는 역외의 백은이 사용되었다. 전한승은 이에 대하여 상세히 연구한 바 있는데, 일찌기 명나라 융경5년에서 청나라도광6년까지(1571-1821), 2세기반동안, 스페인사람들이 수출한 미주의 백은만 약 4억스페인화폐에 달했다. 그중 절반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일찌기 명나라말기의 한 스페인 해군장교가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중국황제는 페루에서온 은괴로 궁전도 만들 수 있겠구나."

 

바로 갈수록 창궐하는 아편밀수무역으로, 청나라제국을 지지하던 백은이 국내에서 국외로 유출되기 시작한다. 청도광18년(1838년)에 홍로사경 황작자는 아편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는 원래부터 인색한 도광제의 마음을 움직여서 아편수입금지쪽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당시 상소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편이 중국에 유입된 이래로, 도광3년이전에는 매년 빠져나가는 은이 수백만냥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귀족자제들이 놀아나는 정도였는데, 후에는 위로는 궁중,귀족부터 아래로는 기술자, 상인, 배우,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부녀 승려 비구니, 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광동성의 간사한 상인들은 군대와 결탁하여 팔룡, 쾌해등의 배로 은을 해외로 내보내고, 아편을 수입한다. 그리하여 도광3년에서 11년까지 연간 빠져나가는 은이 1700-1800만냥에 이른다. 11년에서 14년까지는 매년 2천여만냥백은이 빠져나갔다. 14년에서 지금까지는 빠져나가는 은이 3천만냥으로 늘어났다. 복건, 절강, 산동, 천진의 각 항구를 통해서도 합쳐서 역시 수천만냥이 빠져나갔다. " 기록에 따르면, 도광3년(1823년)이전에 청나라의 무역흑자는 여전히 은2600만냥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최소한 4천만냥의 적자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백은으로 바꾸어 온 것은 "사람의 행색을 형편없게 만들고, 사람의 심지를 미혹되게 하며, 사람과 집안을 망치게 하는" 아편이었다. 당연히 은이 부족해지다보니 세금을 더 거두지 않아도 더 힘들어지고, 가격이 오르지 않아도 더 비싸게 느껴졌다. 백성은 가난해지고 재산은 탕진했다.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기에 좋은 조건이 모두 형성되었다.

 

황작자의 이 상소문은 아편의 해로운 측면을 강조하면서, 황실친인척, 팔기자제, 궁녀태감은 빠트렸다. 그렇지만 바로 이들이 돈을 마음대로 뿌리면서 아편을 피우는 주체들이었다. 그들이 앞장서서 부패하였고, 만청의 국고를 텅비게 만들었다. 이것이 더욱 문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