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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철도국유화: 청나라멸망의 직접원인?

by 중은우시 2009. 4. 3.

글: 상우(翔宇)

 

한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와 군인들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깊이있게 살펴보면, 놀랍게도 200여년간 존속했던 청나라제국은 철로국유화의 과정에서 순식간에 붕괴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1년 1월, 성선회(盛宣懷)는 우전부상서(郵電部尙書)로 임명된다. 이때 입헌운동은 미뤄졌고, 사회갈등은 극단적으로 격화되고 있었다. 혁명당사람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각성의 군벌들은 모두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대청제국은 마치 일촉즉발의 화약통과 같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화약통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바로 과거 40년간 계속하여 조정을 위하여 실업의 기초를 쌓고, 이를 통해서 이름을 후대에 남기고 싶어했던 성선회였다.

 

갑오청일전쟁이후,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열기를 더해갔다. 조정은 이를 국책으로 삼았고, 민간에서도 거대한 이익을 보고 뛰어들었으며, 국제자본도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따. 그리하여 철도는 각측이 서로 쟁탈하고 싸우는 최대의 핫이슈가 된다.

 

성선회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는 반드시 국유화해야 한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철도는 국가의 명맥에 관련된 경제사업이다. 그리고 이처럼 두터운 이익이 나는 사업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국가가 독점경영해야 한다. 그리하여, 과거 7년동안, 그는 계속하여 힘을 다하여 철도를 부설했고, 동시에 각 철도의 권익동향에도 신경을 썼다. 투자이념상, 국가가 돈이 있다면, 국가의 돈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만일 돈이 없다면 할 수 없이 외부자금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때도 차관으로 도입할 지언정, 지분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차관을 도입한다면, 외채를 도입할지언정 내채를 끌어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897년, 영국공사는 광저우(廣州)에서 한커우(漢口)에 이르는 월한철로의 건설을 제안한다. 성선회는 이 철로는 아주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만일 철로부설권을 영국인이 가지게 되면, '중화는 독립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철로를 건설할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기금에서 차관을 도입하여 철로를 부설하고자 한다. 그가 이끄는 중국철로총공사는 그의 주재하에, 청나라정부와 미국합흥회사는 <<월한철로차관계약>>을 체결하여 400만파운드를 빌리는데, 연이자는 5리9호였다. 철로재산을 담보로 하였고, 상환기간은 30년이었다. 1899년, 합흥회사의 대표는 중국으로 와서 계약을 체결하고, 샤오저우, 헝저우, 천저우등지에서 탄광을 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리하여 호북, 호남, 광동의 세 성에서는 불만을 갖는다. 미국의 주중공사인 Conger가 나서서 간섭하였다. 그는 월한철도는 '미국이 반드시 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리하여 1900년 7월, 성선회는 다시 <<월한철도차관보충계약>>을 체결하여, 차관금액을 4000만달러로 증가시킨다.

 

성선회의 이 결정은 민간자본에서는 '국가이익을 팔아먹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경한(京漢, 베이징-한커우), 호녕(상하이-난징)철도등 간선철도를 만들 때 그가 계속하여 시도한 것은 벨기에, 미국 및 영국등 국제기금으로부터 외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먼저 외채를 받아서 철로를 하루빨리 건설하고나서 외채를 갚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30년이라고보았다. 그러면 철로의 소유권은 완전히 국가로 귀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월한철로의 공사는 운명이 기구했다. 그후 여러해동안 풍파가 끊이지를 않고, 국내 민족주의정서가 팽배해지면서, 철로권을 회수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민간자본과 국유자본은 철로사업에 있어서 아주 첨예하게 대립했다. 성선회의 국영독점이념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1903년, 사천총독인 석량(錫良)은 외채를 빌리지 말고 민간자본에 의지하여 천한(川漢, 쓰촨-한커우)철도를 부설하자고 제안한다. 일시에 호응하는 자들이 구름과 같았다. 그해 11월, 조정은 상부(商部)에서 <<철로간명장정>>을 반포한다. 여기서 각성의 관상이 스스로 자본을 모아서 철로간선 혹은 지선을 건설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였다. 1905년 7월, 장지동(張之洞)은 우창(武昌)에서 삼성신상회의를 소집하여, 미국 합흥공사로부터 월한철도의 부설권을 회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호북, 호남, 광동의 각성은 각각 돈을 조달하여 각자 자기 성의 노선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미국측은 고액의 양도금을 요구한다. 장지동은 회사를 가져오면 프리미엄은 신경쓸 것없다고 하면서 675만달러를 지급한다. 이후, 전국에서는 철도운영의 붐이 일어난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각성에서는 모두 18개의 철도회사가 생겨난다. 그중 13개는 상인들이 만든 것이고, 4개는 관청과 상인이 합작으로 만들거나, 관청이 주도하고 상인들이 참여한 것이며, 1개는 관청이 만든 것이다.

 

중국의 백년기업사상, 에너지산업(탄광, 철광 및 나중의 전력, 석유)와 자원성기업(철도, 은행 및 나중의 항공, 전신업)은 계속 이익이 가장 집중되는 분야였다. 이에 대한 쟁탈과 이익분배는 국가경제정책의 중요한 표지이다. 이 특징은 청나라말기에 이미 아주 분명히 드러났다. 양무운동이후에, 다국적기업이 가장 먼저 이 분야에 투입했고, 국영자본이 그 뒤를 이었다. 민간자본은 흩어져있고 규모가 적은데다 정책이 명확하지 않아서 가장 적었다. 1904년이후, <<공사률>>등 법령이 반포된 후에, 기업운영과 지분권리가 상대적으로 명확해졌다. 특히 주식회사제도의 출현은 민간자본이 대담하게 에너지와 자원성산업에 뛰어들게 해주었다.

 

호북, 호남, 사천등의 성에서는 전인민이 자본참여하여 철도회사를 만드는 것이 열기를 띄었다. 심지어 "배우 거지들까지도 앞다투어 지분투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배우, 거지들까지도 지분참여하여 철로를 부설하는 현상은 성선회가 보기에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철로를 부설하는데는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고, 투자회수기간이 아주 긴데, 자본이 분산되고 약하면 큰 일을 해내기 힘들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황은 이렇게 돌아갔다. 제대로된 경영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철로부설기술이 부족함에 따라 많은 철도건설은 그 속도가 아주 느렸다.

 

다만, 이 단계에 철도가 민영이든 국영이든, 민간자본을 쓰던 외국자본을 쓰던, 이미 민감한 정치문제 및 민족감정문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흑백이 대립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09년, 장지동이 호광철도를 건설할 때, 성선회의 유세하에, 그는 4년전에 민간자본으로 철로를 부설하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모으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독일, 영국, 프랑스의 삼국은행단과 <<호광철로차관계약>>을 체결하여, 550만 파운드를 빌린다. 이 일이 공개된 후, 즉시 대규모의 반대운동을 불러온다. 한때 명성을 날렸던 장지동은 이 풍조에 휘말려 마음을 졸이고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장지동이 오락가락했던 것과 비교하여, 성선회는 일관되게 철로국유화를 주장했다. 바로 이 문제에서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의 기업가집단과 조정이 철저히 결렬되는 것이다.

 

1911년 5월, 우전부상서에 오른지 얼마지나지 않아, 성선회는 주청을 올려 이미 민영화된 "월한' '천한'철로를 국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한다. 조정은 그 주청을 허락하고, 직예총독을 지낸 바 있는 양무파의 만주족대신 단방(端方)을 내려보내 이 일을 처리하게 한다. 성선회는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의 4개국과 긴밀하게 차관건을 협의하고 있었다.

 

뒤에 다시 돌아보면, 성선회는 철로사업에 있어서, 국유이념에 있어서 민간과 중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던 외에, 두 가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민영자본과 솔직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해동안 정계와 상계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조정의 권위하에서 민간자본은 항상 말잘듣는 말랑말랑한 홍시였다. 손짓하나로 오고 가게 할 수 있었다. 둘째는 지분회수에 있어서, 확실히 민영지분에 박하게 하였따. 그가 공포한 방안에 따르면, 정부는 민간에 60%의 현금을 준다. 나머지 40%는 이자없는 주식으로 준다. 즉, 투자자는 여하한 투자수익을 누리지 못할 뿐아니라, 40%의 손실리스크도 떠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로권회수령이 반포된 후, 각성의 상인과 백성들이 집단으로 반발했다.

 

1911년 5월 14일, 창샤(長沙)에서 만인군중집회가 개최된다. 이어서 창샤에서 주저우(株州)까지 만여명의 철도노동자가 길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상인들에게는 가게문을 닫고, 학생들에게는 학교수업을 거부하고, 세금납부를 거부하자고 한다. 곧이어 사천에서는 보로동지회(保路同志會)를 조직하여, 입헌당 사람인 포전준, 나륜을 정부회장으로 뽑고, "죽기를 각오하고 철로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참가자는 10만에 이른다. 성선회는 이미 사천인민의 공적이 되었다.

 

9월 7일, 사천총독 조이풍은 나륜, 포전준등을 체포한다. 그리고 수백의 항의군중을 총으로 죽인다. 그리고 보로동지회의 해산을 명한다. 격노한 사천민중은 각지의 전선을 파괴하고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정부간의 문서왕래를 중단시킨다. 민란의 수준이 되자, 청나라조정은 긴급히 호북의 신군을 사천으로 지원보낸다. 그러다보니 우한이 비어버렸따. 10월 10일, 동맹회의 책동하에, 수백의 신군이 의거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요원의 불길퍼엄 번져서 천년제왕의 통치를 뒤집어엎어버리는 신해혁명이다. 철로국유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내려와 있던 단방은 쯔저우(資州)에서 신군에 살해당한다.

 

의외의 사건으로 화가 잉태되었다. 조정은 성선회의 모든 직위를 삭탈하고, 영원히 다시 기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성선회는 황급히 독일화물선에 올라서 일본의 고베로 도망친다. <<청사고>>에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성선회는 권리를 침해하여 법에 어긋났고, 황상을 속이고, 정책을 마음대로 집행하여, 난리를 불러왔으니, 나라를 망친 첫번째 원흉이다(誤國首惡)"

 

"오국수악"이라는 네 글자는 역사의 잔혹함과 무정함을 말해준다. 어느 국가든 현대화과정에서, 국유자본이 스스로 와해되는 것이 공동의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하나의 예외도 없다. 후세인들이 이 부분을 읽는다면, 마땅히 경계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