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양범(李揚帆)
중국의 청나라말기 외적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국타향에서 목숨을 잃은 고급관원이 있다. 그는 백이, 숙제를 본떠서, 인도에서 단식을 하여 굷어죽었다. 그는 바로 당시 사람들이 "부전(不戰), 불화(不和), 불수(不守), 불사(不死), 불항(不降), 불주(不走)"로 조롱받은 양광총독(兩廣總督) 섭명침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중요한 원인을 그의 외교적 실패로 취급하는 외에 그의 내정 및 외적방어 측면에서의 공헌은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었다.
애로우(Arrow)호는 보잘 것없는 작은 상선이었다. 당시 많은 중국상선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국제법상의 선박관할권의 관례를 이용하여, 일찌기 영국통치하의 홍콩에 등기했고, 이로써 중국관청의 검사를 피하고, 규칙을 벗어난 일들을 하려고 하였다.
다만, 중국광동수사(水師) 천총(千總)인 양국정(梁國定)이 배에 올라서 해적을 조사할 때, 이 배의 등기는 마침 기간이 지났다. 동시에, 국제법의 관례에 따르면 선박이 정박하거나 항행하는 수역이 어느 나라에 속할 때에는 그 나라는 아래의 상황하에서 검사를 할 수 있다: 당해 선박이 해적 혹은 노예판매행위에 종사했을 때, 국기를 보여주기를 거절할 때, 등등.
마카오에서 광저우로 쌀을 운송하던 애로우호는 검사를 받기 전에, 이미 로사리오라는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해적과 관련이 있다는 고발을 받은 바 있다. 마카오당국은 배에 올라 조사하고자 했는데, 그 배는 이미 도망을 쳤다. 이 배가 광저우에 도착했을 때, 양국정은 보고를 접수하였다. 그리하여 수군은 즉시 배에 올라 14명의 선원을 모조리 체포했다.
중국수사가 영국국기를 훼손했는지 여부에 관하여, 양국정의 말에 따르면, 당시 이 배는 아무런 국기도 게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의 <<타임즈>>에서 최초로 한 보도에도 언급이 없었다. 다만, 남아있는 선원들은 수군이 떠난 후, 돌연 미(米)자기(영국국기 유니온잭)를 걸었다! 파크스(Harry Smith Parkes)는 보고를 받은 후 즉시 부두로 갔고, <<호문조약>>(이 조약은 영국이 영사재판권을 갖는다고 인정했다)을 내세워, 규정에 따라 사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파크스는 아주 오만무례했으며, 쌍방이 다투는 와중에, 중국수군 한 명이 파크스의 뺨을 때렸다.
파크스는 즉시 양광총독 섭명침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풀어주고 공개사과를 하라는 것이었다. 신속히 심문을 마친 후, 섭명침은 영국영사관에 조회를 보낸다: 12명중에서 양명태, 양건부의 두 선원이 해적이다. 또 다른 한 사람 오아작이 증인이다. 그들 세 사람은 계속 심문을 받을 것이다; 나머지 9명은 송환할 수 있다. 교섭과정에서, 섭명침은 이치를 내세워 끝까지 싸웠다.
파크스의 보고를 받은 후, 영국공사 보우링(Bowling)은 이 배의 홍콩허가증이 이미 두 주나 기간경과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후, 보우링, 파크스는 영국해군과 상의한 후, 파크스가 최후통첩을 보낸다. 섭명침에게 24시간내에 모든 선원을 석방하고, 정식사과하라고. 영국의 최후통첩에 직면하여, 섭명침은 양보를 결정한다. 그날 그는 해적이외의 나머지 10명을 송환할 수 있다고 답변한다. 다음 날, 파크스는 원래 의견을 고집한다. 섭명침은 할 수 없이 남해현승 허문심(許文深)을 보내어 12명의 전부 선원을 영국영사관으로 보낸다. 다만 사과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버틴다. 이때 영국인들은 더 이상 얘기할 생각이 없어, 인원을 접수하기를 거절하고, 곧이어 광저우성에 포격을 가한다.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섭명침이 애로우호사건을 처리한 것은 순수한 외교수단으로 보자면, 그는 이치에 맞게 처리했다. 영국인의 고의적인 도발과 섭명침의 이성적인 처리수단은 마르크스로부터도 인정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2달후에 <<영중충돌>>이라는 글에서, 사론의 형식으로 1857년 1월 23일 출판된 <<뉴욕트리뷴>>에 싣는다. 이 글에서, "전체사건과정에서 잘못은 영국인측에 있다" 마르크스는 또한 <<영국인의 중국에서의 잔혹한 행위>>라는 사론에서는: "섭총독은 예의바르고, 담담하게 격동한 젊은 영국영사의 야만적이인 요구에 답변했다. 그는 사람을 체포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일어난 오해에 유감을 표명했다. 동시에 그는 단연코 영국국기를 모욕할 의도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부전 불화 불수
전쟁개시후, 섭명침은 한편으로는 아주 차분함을 보였다. 영국의 3척이 군함이 호문을 넘어 광주동부교외의 엽덕등의 포대를 공격하여 점령할 때, 섭명침은 무과 향시를 보고 있었다. 그는 소식을 들은 후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을 것이다. 날이 저물면 스스로 떠날 것이다." 다음 날, 영국군이 광주성의 건너편 하남 봉황강등 포대를 점령했다. 섭명침은 보고를 받고도 전혀 놀라지 않음녀서 계속 무과향시의 마전비무를 관전했고, 십오일이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섭명침의 차분함은 먼저 자신의 무술(巫術)활동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그는 총독아문에 "장춘선관"을 짓고, 그 안에 여동빈, 이태백의 두 신선을 모셨다. 모든 군사적 조치는 점을 보아서 결정했다. 십오일이 지나면 괜찮다는 말은 바로 두 신선이 알려준 것이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섭명침도 적극적으로 응전준비를 한다. 고시를 내려서 적을 죽이는 자는 현상금을 지급한다고 공포하는 외에, 그는 단련 2만여명을 정비하도록 명령했다. 각지 민단조직이 이에 호응했다. 광동수사도 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보면, 섭명침이 "육불총독(六不總督)"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억울한 점이 있다. 섭명침이 당시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아주 적었다. 왜냐하면 남방의 절대다수이 병력은 모두 태평천국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선으로 뽑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민단을 동원하는 것이 부득이한 방법이었다. 유한한 조건하에, 섭명침은 싸웠다. 단지 싸워서 이기지를 못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강화(講和)도 거부한다. 이것도 큰 잘못은 아니다. 만일 강화한다면 그것은 투항이다. 그러므로, 그는 강화도 하지 않고, 항복도 하지 않고, 더구나 도망치지도 않았다. 이외에 그에게 더 이상의 방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선에게 의지하고 점에 의지한 것은 우매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섭명침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대청제국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859년 정월 초닷새, 섭명침은 홍콩에 정박해있는 영국군함 Dreadnought호에 포로로 붙잡힌다. 이처럼 고관이 포로로 잡혔으므로, 영국인들도 그를 학대하지는 않았다. 섭명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늠연한 기개를 유지했다. <<홍콩크로니컬>>의 보도에 따르면, 군함의 모든 장교는 그를 아주 존경했다. 어떤 사람이 배에 오르면, 모두 모자를 벗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도 모자를 벗고 답례를 했다. 그는 군함에서 48일간 지냈다. 그리고 인도의 캘커타로 보내어진다.
인도에서 섭명침은 자신의 심정을 천명한다:
진해루두월색한(鎭海樓頭月色寒)
장성번작객성단(將星飜作客星單)
종운일범군중유(縱雲一范軍中有)
즘나제군벽상간(怎奈諸君壁上看)
향술하필구면사(向戌何必求免死)
소경무양권가찬(蘇卿無恙勸加餐)
임타일파단청회(任他日把丹靑繪)
한태수용하필난(恨態愁容下筆難)
시에서 모범으로 삼은 인물은 모두 중국역사상 민족기개를 지닌 명인들이다. '일범'은 바로 북송의 범중엄(范仲淹)이다. "향술(向戌)"은 송나라의 대부로, 그는 기원전546년 친히 진, 초, 제등 13국을 설득하여 송나라수도에서 만나도록 한다. 이후 열국간에는 십여년간 전쟁이 없었다. 섭명침은 자신을 향융에 비유하여, 자신이 죽지 않고 영국인을 따라간 목적을 설명했다. 그중 소무(蘇武)를 자신에 비유한 것도 이런 목적이었다.
이로써 볼 때, 섭명침은 자신이 포로가 된 것을 영국군주를 만나보는 계기로 삼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섭명침은 나중에 그를 따라 캘커타까지 온 종에게 이런 뜻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내가 죽지 않고 온 것은 당시 오랑캐들이 나를 영국으로 보내려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듣기로, 그 나라의 국왕은 이치에 맑다고 하니, 그 국왕을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치를 논할 생각이었다. 이미 잘 지내기로 해놓고 왜 아무런 근거없이 도발하는가?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 이렇게 그의 마음을 설득하여, 국가체제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 때 이 몸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 했다. 시종 이 일만 생각했는데, 하루 또 하루가 지나도 다른 나라에 갈 수가 없고, 이 곳에 머물게 되었으니 더 살아서 무엇하랴. 가져온 양식도 이제 다 먹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른 나라의 것을 먹겠는가?"
캘커타에서, 섭명침은 계속 시사뉴스에 관심을 보였고, 시간이 되면 휴식을 취하고, 아침에는 사람을 시켜 신문을 읽어달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영국군주를 만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단식을 한다. 그는 2월 29일 병을 얻어 곡기를 끊은 후, 3월 초칠일 술시에 병사한다. 임종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황상의 천은을 저버려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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