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애니스 앤더슨
[중국인은 원명원의 아름다움과 호화로움에 감탄하고, 그것이 불탔다는데 대하여 아쉬움을 느낀다. 지금 우리는 그저 역사의 기억에서 그 모양을 그려내고, 잔해속에서 그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인의 눈에 자랑스러운 것이, 외국인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강도들은 아예 동방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물을 약탈한 후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소위 궁전'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당시 팔국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운 이유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1793년 8월 22일 목요일
......................
원명원은 아주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같은 이름을 지닌 마을로부터 약 1마일정도 떨어져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하고 비실적인 건축물이다. 그 안에 1층을 초과하는 방은 없다.
이 궁전 - 만일 궁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의 입구는 아주 평범한 돌로된 길로 되어 있다. 병사가 지킨다. 돌길을 지나면 넓다란 장소가 나온다. 차에서 내린 짐은 일단 이 곳에 놓아두었다. 이 장소의 중간에 하나의 작은 집이 있는데, 몇몇 하급관리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작은 집은 이 궁전으로 가기 위하여 지나가야 하는 곳이다.
이 궁전은 지대가 낮을 뿐아니라 습기가 높다. 그것은 두 개의 막혀있는 연못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습지에서 나오는 악취나는 기운은 이 곳의 환경, 위생을 증진시킬 수 없게 한다. 바로 연못 옆에 있는 몇개의 방을 빼내서 영국병사의 거주지로 하였다. 이들 방의 서쪽에는 하나의 나무문을 통하여 궁전의 또 다른 부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이곳에 상당한 수의 중국병사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다만 우리가 들어가서 그들을 보려고 하자, 그들은 즉시 흩어져 숨고, 문을 걸어잠궜고,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은 외래인에 대하여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것같았다. 그들은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극도로 주의를 하였다.
이 궁전(비록 위대한 군주를 대표하는 거주지로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중요성을 표시하기 위하여 계속 궁전이라고 불러준다)은 두 개의 사합원(四合院)으로 나뉜다. 건물은 하나의 장방형으로 펼쳐져 있는데,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부족하고, 낡고 수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담장이나 돌을 깐 도로나 칠을 한 나무지붕까지. 이들 건축물의 몇 개의 대문 앞과 한 대원(大院)의 중간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뭐 아름답거나 멋있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땅위에는 돌을 깔았다. 이 지역내에는 몇 군데 풀밭이 있었는데, 보기에 다듬지 않은 것같았다. 우리가 경작하지 않는 땅이 하나도 없는 국가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들 방의 창문은 네모난 격자창문이었고, 채색그림이 있는 종이를 발랐다. 더울 때의 낮에는 문을 열고 대나무로 된 죽렴을 건다. 기이하고 예쁘게 그렸고, 편직을 아주 정교하게 했으며, 직포기의 북과 같았다. 그것들은 실내공기를 조절하는데 쓰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대낮의 더위를 감소시키고 시원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어두워지면 문의 역할을 한다. 이들 죽렴은 걷어서 문위의 벽에 걸어놓는다.
전체 가옥중에서, 몇개의 아주 보통의 탁자와 의자를 놓은 외에 다른 설비는 없다; 건물안에는 침대나 침상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다행이었다. 우리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배에서 침대를 가지고 왔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가 중국에서 머물 때 침대에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현지인들은 그들의 집안에 이렇게 편안한 침구를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침대바닥같은데서 잤다. 몸에는 면화를 넣고 재봉한 이불을 덮었다. 그들이 침상에서 잘 때 옷을 벗는 일은 드물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추위를 막기 위하여 이들 덮은 이불 숫자를 늘였다. 그들의 침상은 커다란 나무의자와도 같았다. 지면에서 2인치정도 떨어져 있었다. 의자위에는 길게 펼치거나 옆으로 늘일 수 있는 대나무로 짠 것이 있었다. 7,8명이 함께 그 위에서 잤다. 나는 나무판으로 만든 침상도 봤는데, 위에는 펠트(양모등 짐승털로 만든 것)를 깔았다.
이 거주지의 거칠고 황량한 광경은 우리가 본 광경이다. 오랫동안 여기에는 지네, 전갈과 무는 벌레가 사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의 여러 군데를 침범했다. 이 주거는 아주 높고 견고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사관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이 경계를 넘어들어올 수 없었다. 관리와 사병은 큰 길에는 모두 서 있었고, 우리는 이 불쌍한 거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아주 영광스럽게 수감된 지위에 놓였다. 황제가 돈을 내서 우리가 매일 먹을 음식물을 주는 것 이외에 우리가 잃은 자유를 위안해주는 것은 없었다.
사신의 방은 영국초병이 밤낮으로 지켰다. 위대한 외교사신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신와 스탠튼 기사 및 스탠튼 공자는 따로 식탁을 받았다. 이 요구는 즉시 실현되었다. 이날 그는 자기의 방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수행인원중 고급관리의 식탁은 마당의 그늘 아래에 마련되었다.
1793년 8월 23일 금요일
선물을 놓아둔 곳은 이렇게 햇볕이 내리뙤는 상황하에서 이렇게 부적절한 곳에 오래두면 일부 물건은 망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즉시 임시 천막을 쳐서, 이들 물건을 거기로 신속히 옮겼다.
매카트니 공사는 이런 환경에 아주 불만이었다. 그는 엄숙하게 더욱 그의 지위에 걸맞고 편리하고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거주지를 요청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사의 통역인 Plumb선생은 여러번 북경을 다녀왔다.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거주지에 머문 남은 나날동안 언급할 가치가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달 27일로 공사가 북경으로 옮겨가는 날짜가 정해졌다. 이러한 기간동안, 사절단의 모든 관리 및 하급수행원은 만족하지 못했고, 조용히 기다리지 못했다. 벤슨(음역) 대령은 담장을 넘을 자유를 박탈당한 것을 굴욕으로 생각했다. 그는 결국 별로 기분좋지 않은 싸움을 벌였다. 그는 그의 행동이 강경하게 저지당했을 뿐아니라, 문앞에 서 있던 중국인으로부터 아주 비문명적인 위협을 받았다.
다른 몇건의 이와 비슷한 싸움이 사절단의 소속인원과 이곳을 지키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는 영국인으로서 극단적인 굴욕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사명을 띠고 온 사람들이므로, 국제법률에 따라, 그들은 최대한의 그리고 보편적인 권리를 누려야 했다. 그런데 이처럼 부적합한 대우를 그들 개인과 정치인물이 받았다. 아마도 이것때문인지 그들은 겁을 주면서도 조심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겁을 주는 상대방이 바로 외교임무를 수행하러 온 사람이고, 상사의 지시를 받아서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부의 법규를 집행하거나 이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더더욱 참을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이들 법규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부의 편애나 우의는 바로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영국사절단의 천직은 우회적인 말과 정치적인 기교를 통하여 이런 호감과 우의를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793년 8월 24일, 토요일
이날 사절단의 인원 전부는 아주 느낌이 즐거웠다. 뭐라고 형용할 방법이 없다. 이때 우리는 다음주 월요일에 이 무서운 곳을 떠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793년 8월 25일, 일요일
이날과 다음날은 모두 대부분의 짐과 선물을 나르느라고 바빴다. 이 업무는 이전과 같이 쿠리(苦力)와 짐꾼을에게 시켰다.
거꾸로 매다는 등, 기계, 의기, 종과 시계는 원명원에 남겨두었다. 이것들은 옮기기가 번잡하고 손상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전체 기계구조에 손상이 가지는 않겠지만, 효과의 교묘함은 반드시 이동할 때 세심하게 처리해야하는 것이다.
1793년 8월 26일, 월요일
아침 10시, 사절단 전부에게 제공되는 마차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사병, 장인과 수행인원은 두명이 마차 1대에 타고, 사절단관리는 혼자서 1대에 탔다. 공사와 공사비서와 통역원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마를 탔다.
출발할 때의 광경은 이전과 비슷했다. 혼란하고 질서없는 광경이었다. 다만 11시가 되자, 우리는 아주 만족스럽게 우리가 최근에 거주한 이 불편했던 거주지와 이별할 수 있었다. 그후 우리는 이곳과 이름이 같은 마을에서 많은 관중을 지나왔다. 1시쯤에 북경성의 북문에 닿았다. 이 성문은 윗글에서 묘사한 성문과 서로 대칭된다. 길거리를 걸어갈 때 우리는 하나의 보탑을 지나갔다. 이는 우리가 중국에서 처음 보는 것이다. 강을 항해할 때, 그리고 통주에서 북경까지 육로로 올 때, 우리는 이런 건축물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이 도시에 와서야 이런 보탑을 발견했다. 그것은 동방이라는 지역의 특색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것은 관청과 연결된 아름다운 화원의 중앙에 건축되어 있었다.
이 보탑은 방형(方形)의 돌을 쌓은 건축이다. 아래층부터 점차 축소되어 꼭대기는 뾰족하다. 회랑이 탑 꼭대기를 둘러싸고 사방은 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때 비단으로 만든 붉은 만장이 걸려 있고, 이것을 늘어뜨려 먼데서 보면 마치 우산과도 같았다. 탑은 7층짜리였다. 내가 묘사한 이것 이외에 외부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우리가 북경으로 되돌아간 것은 우연이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므로, 우리가 북경성으로 되돌아가는데 대중들의 호기심어린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오후 2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사절단이 이후에 거주할 고귀한 궁전으로 안내되었다. 이 궁전은 한 광동총독의 재산이고, 일반적으로 영국인들은 그를 John Tuck이라고 불렀다. 무슨 이유때문에 이렇게 부르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그는 현재 국법을 위반한 죄인이다. 이는 그가 현지에서 근무할 때 국가재산을 횡령하거나 다른 부정당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 궁전은 회색벽돌로 지었고, 아주 거대했다. 12개의 대원과 6개의 소원이 있었다. 벽은 아주 정교하게 벽돌을 쌓았고, 벽돌의 사이에는 회토를 선처럼 가늘게 발랐다. 그리고 아주 균형이 잡혀 있었다. 상세히 관찰한 후에야 비로소 화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 진흙장인이 쌓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연필로 그린 것이 아니라, 흙손으로 그은 것이다. 이들 벽돌은 대리석처럼 편평하고 매끄러웠는데 16인치 길이, 8인치 폭, 2인치 두께였다.
정렬된 방은 공사와 스탠튼 기사가 거주하는 두 곳의 별실이외에는 비록 높고 크지만, 1층높이으 ㅣ집이었다. 집은 모두 넓직했고, 방형이었다. 커다란 돌바닥을 깔았다. 매 4방원자안에있는건물의 앞에는 3인치높이의 대가 있고, 그곳의 중앙에는 정교한 계단이 있었다. 당연히 서로 대칭되었다. 대의 위에는 처마가 있고, 대의 너비와 일치했다. 아름다운 나무기둥이 지탱하고 있었다. 기둥사이의 거리는 서로 같고 정교한 난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전체는 오색으로 그렸으며, 칠도 아주 아름다웠다. 아주 우아한 양대(陽臺)를 구성했다. 이는 장관일 뿐아니라, 비교적 좋은 것은 이 아름다운 건물에 편리한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처으으로 중국인이 집에 칠하는 기술이 뛰어남을 보았다. 광택은 일본의 칠기에 못지 않았다. 색채는 오래 지나도록 퇴색되지 않을 뿐아니라, 공기, 햇볕 또는 빗물의 침식을 받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이런 효능이 기름을 한층 발랐기 때문인 줄 알았다. 나중에 나는 그것이 어떤 물질을 쓰고 안료를 직접 안에 발랐고, 제2차 공정을 거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집은 아주 넓고 컸다. 몇간의 집안에는 빛이 나는 도안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그 색채는 내가 유럽에서 본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다른 방은 칠이 아주 특이했다. 금을 바른 장식도 있었다. 매카트니 공작이 거주하는 곳의 방은 아주 많았고, 또한 운치가 있었다. 그중에는 개인 희곡공연대가 있었다. 이 희곡공연대는 방형이었고, 사방에 관중들이 앉는 회랑이 있었는데 칠이 아름답게 되어 있었다. 희곡공연대의 높이는 지면에서 약 3인치이고, 강연대같았다. 나무난간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사방에는 8인치 너비의 복도가 있다. 무대의 뒤에도 방들이 있는데, 공연자들이 화장하거나 휴식하는 장소였다.
이 건축물은 아주 컸다. 지붕에는 아름다운 칠을 해두었다. 스탠튼 기사가 거주한 방은 아주 아름다웠고, 편리했다. 전체 사절단도 비슷한 거주장소를 배정받았고, 모두 아주 만족해 했다.
창문에는 종이가 발라져 있었다. 주요한 방의 문에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지, 유리가 아니었다. 창틀과 문틀은 모두 칠이 선명하게 되어 있었다. 여름에 문은 열러 있고, 대나무로 만든 발이 늘어져 있다. 만일 이렇게 그것을 불러도 된다면, 형상은 내가 윗글에서 묘사한 것과 같았다.
몇개의 원자안에는 보기 싫지 않은 가산(假山)이 있었다. 그 배치는 완전히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조형에서는 아주 기교를 부렸다. 그것이 모방한 형상은 아주 그럴 듯했다. 이들 이외에 여러곳에는 아름다운 패루를 만들어 두었다.
이 아름다운 건물의 규모는 아주 컸다. 각종 호화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방이 많고, 겉보기에 아름답고, 크다는 것을 제외하고 안에 있는 가구는 의자와 탁자 이외에는 몇개의 작은 구들(炕)이 있을 뿐이다. 구들 위에는 털깔개와 대나무를 깔아두었다.
주요한 방의 아래에는 벽돌로 화로를 만들어 두었다. 원형의 관이 이 방을 둘러싸고 있다. 위의 몇몇 방은 온난함을 느낄 수 있다. 겨울이 되면 이 화로에는 계속 목탄을 땐다. 열을 조절하는 것은 영국의 온실과 비슷하다. 내가 본 이 방에는 연통이 없었다. 그러므로 열기의 조절은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오후 4시, 전제 인원이 앉아서 식사를 했다. 탁자위에는 항상 보던 각종 찌고 삶거나 잘게 자른 식품이 나왔다. 큰덩어리의 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은 명절을 제외하면 보기 드물다. 이것에 대하여는 다음 글에서 다시 서술하겠다. 공사와 스탠튼 은 같은 탁자에서 식사하였다. 비록 우리는 여기에서 여러가지 특수한 우대를 받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전의 거소에서처럼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고, 사람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를 감시했다. 모든 인근지방은 군대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건 우리가 대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궁전은 중국의 자료에 따르면, 그 광동총독이 지방의 임기동안 끌어모은 돈으로 지었다고 한다. 주로 그 항구도시에서 영국으로의 운수업을 통하여 벌었다는 것이다. 그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았기 때문에 그는 현재 북경에서 죄인이 되어 갇혀 있다. 이 건축물을 짓는데 든 돈은 97000파운드에 달하였다고 한다. 건축재료와 노동력이 모두 값싼 중국내에서 이것은 아주 큰 금액이다.
1793년 8월 27일 수요일
이날의 주요 업무는 사절단 관리들을 각자의 방에 배치하는 일 등이었다. 동시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곳을 골라야 했다.
의복, 짐 그리고 일부 귀한 선물, 즉 가장 작은 나침반등은 각각 매카트니와 스탠튼의 방에 두었다. 나머지는 몇 개의 큰 방에 옮겨 놓았다. 이곳에는 넓고 적당한 창고가 있다. 6개의 소형대포, 2개의 대형대포는 모든 부속품을 조립하여 공사가 머무는 집의 마당에 놓아두었다.
이런 안배는 우리의 처지에서 가장 적합하고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황제의 말이다: 그는 공사를 달단의 지방으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공사를 현재의 거소에 머물게 하면서 그가 통상적으로 수도로 돌아오는 계절까지 기다리게 할 것인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이 소식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리는 통주에 도착했을 때 한 관리를 황제가 있는 달단지방의 여름궁전으로 보냈다. 우리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영국공사는 관리들을 접견했다. 그 안에는 몇몇 프랑스인이 있었다. 그들은 원래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에서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금지당했고, 그저 중국의 복장을 입고 중국인처럼 행세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지식이 있어서, 관직을 부여받았다. 이들 프랑스 사람들은 한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현재 이미 이 나라에 귀화했고, 이 나라의 상황에 아주 익숙했다. 그들은 매카트니 공사의 사명에 대하여 격려해주었고, 만족스럽게 좋은 성과를 거두기를 희망했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섭명침(葉名琛): 인도에서 굶어죽은 양광총독 (0) | 2009.01.09 |
---|---|
텐진 9개국 조계(租界)의 각국세력범위 (0) | 2008.12.12 |
청일전쟁과 일본간첩 (0) | 2008.10.18 |
상해도대(上海道臺): 상해조계의 중국관원 (0) | 2008.09.26 |
청말의 입헌군주제 시도는 왜 실패했는가? (0) | 2008.09.20 |